독재자의 유고를 알리는 라디오 방송이 하숙촌의 대학생들을 깨운 것은 기억하건대 34년 전 10월27일 새벽이었다. 곧이어 만세 소리들이 터져나왔다. 김문수 경기지사가 호외를 받아들고 너무 기뻤었다고 하던 바로 그날이었다. 끝내 얼굴을 돌리고 눈물을 훔치던 하숙집 아주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기억에 선하다. 유신시대는 그렇게 극단의 희비 속에 막을 내렸다.
김 지사는 당시 정운찬 강사 등 서울대 교수들이 그렇게도 열렬히 중화학공업 및 자동차산업과 고속도로를 반대하던 일도 회고했다. 변형윤도 박현채도 정치인 김대중 김영삼도 그랬다. 고속도로 현장을 찾아가 포클레인 앞에 드러누웠던 사람은 김대중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유엔 등 내로라하는 국제기구들도 고개를 저었다. 물론 이들 중에 지금껏 과오를 반성했다는 사람은 없다. 엉터리 논문을 썼고 학생들을 잘못 가르쳤다며 오류를 시인했다는 교수도 거의 없다.
그러나 이들을 책망할 필요까지야 없지 않겠나. 개발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기도 했다. 당시의 인식 지평으로는 박정희식 개발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개발연대에 대한 오독(誤讀), 혹은 난독(難讀)은 그러나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반대와 지지 진영이 여기서는 같은 오류에 빠져 있다. 박정희 시대를 회고하는 논문과 서적들은 절대 다수가 그 시대를 '필연적 결과물'로 인식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 영웅화하거나 증오하거나 그와 그의 부하, 다시 말해 정부의 통찰과 실천력을 과장하거나 폄훼하는 엇갈린 분석들이다. 지나간 역사를 단순히 '정책과 전략의 결과물'로 인식하는 것은 역사를 몇 개 수식과 법칙으로 환원해버리고 마는 중대한 오류의 하나다.
몇 주 전 광주에서 듣게 된 어느 교수의 주장도 그런 것이었다. 고속도로를 경부축에만 깔았던 점, 그리고 호남지역에 근대산업을 건설하지 않았던 소위 경제적 차별이 광주항쟁을 촉발시켰다는 익숙한 논리였다. 그러나 그런 주장이라면 포클레인 앞에 드러누웠던 정치인들이 답하는 것이 좋겠다. 제조 아닌 농업을 주력산업으로 만들어야 한다던 박현채나 변형윤은 또 뭐라고 답할 것인가. 농업을 살리라는 고함 소리는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는 지금에조차 감히 거스를 수 없다. 난독증은 그렇게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좌편향 교과서를 통해 성공을 실패로 둔갑시킨 다음 그 대한민국을 저주하고 있다.
새마을 운동과 개발 경험을 수출한다는 진영에서도 박정희 시대를 오독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박정희를 미화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 엄혹한 개발독재가 오늘날에도 작동할 것처럼 말한다면 이들도 난독증이다. 이들이 말하는 개발사에는 불행히도 박정희와 관료들만 존재할 뿐 정주영 이병철 같은 기업가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이들은 새벽마다 확성기를 통해 귀가 따갑도록 새마을 노래를 틀어대는 것이 지금도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국가주의적, 정부중심적, 관료주도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다. 스탈린과 달랐던 박정희 개발독재의 성공비밀은 오로지 박정희 대통령만이 기업가를 용인하고 그들의 아이디어를 수용하고 사적소유권 체제를 굳건히 만들어낸 것에 있다는 사실을 이들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화학공업을 공기업이 아닌 민간기업으로 만든 것이 바로 성공의 비밀이라는 사실도 언급을 회피한다. 때문에 이들이 박정희를 신화로 만들수록 진실은 박정희로부터 멀어진다.
박근혜 대통령 시대에 경제민주화라는 반시장적 구호가 내걸리는 것에는 이런 오독과 오해와, 편견과 무지가 깔려 있다. 시장은 잘못된 것이어서 정부가 바로잡아야 하고 기업가들의 계산이 아니라 정부의 계획이라야 혼란에 빠진 시장에 질서를 부여할 것이라는 무지는 반(反)박정희 세력과 박정희 추종자들이 공동으로 만들어내는 신화다. 우리가 박정희 시대를 말할 때 조심해야 할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10·26의 밤이 깊도록 상념이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