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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핥기 로마사(20)- 다시 쇠퇴하는 로마, 동서 분열
게시물ID : history_449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악진
추천 : 3
조회수 : 1205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05/26 04:11:29
1. 콘스탄티누스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아들들에게 나라를 물려주었다. 아들들은 막장드라마를 찍으면서 서로를 죽였고, 승자는 콘스탄티우스2세였다. 동방원정 도중 부제 율리아누스의 반란을 듣고 이를 진압하러 가는 길에 질병에 걸려 죽었다. 죽으면서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인정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율리아누스는 3년 뒤 동방원정 도중 전사하고, 미스테리의 인물 요비아누스가 전쟁터에서 황제로 옹립된다. 전혀 무명이었던 이 인물은 동방원정을 수습하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는 길에 죽는다. 율리아누스의 군대로부터 옹립된 지 8개월 만이었다. '배교자' 율리아누스. 그는 엄격한 아리우스 기독교를 교육받고 자랐음에도 그리스 철학에 심취하고 로마전통신을 공경했다. 그리하여 집권 후에는 로마전통사상을 부활시키려 하였고, 이 때문에 후대에는 '배교자'라는 별칭을 받게 된다. 2. 쇠퇴하는 서로마 서로마의 쇠퇴는 단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누적된 문제들이 이민족 용병들에 의해서 현실화되었을 뿐이다. -경제의 쇠퇴 : 서기300년을 전후해서 일시적으로 회복된 적이 있을 뿐, 서로마의 인구/세입/경제는 이미 회복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서로마는 국방력 유지를 위해 세금을 계속 올렸음에도 세입은 바닥을 모른 채 줄어들었다. 5현제 시절 정복할 수 있는 모든 땅을 정복한 로마는 더 이상 새로운 정복지를 찾지 못했다. 페르시아는 이길 수 없는 상대였고 북쪽과 남쪽은 불모지였다. 결국 정부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시민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뜯어냈는데, 시민들은 부자건 빈민이건 세금을 피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 이는 로마의 경제를 화폐경제보다는 자급자족을 하는 자연경제로 역행시켰다. 척박한 서로마의 토양에서는 자급자족조차도 쉽지 않았기 때문에 잉여작물을 시장에 판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으며, 상업이 침체되자 부유층은 농촌으로 들어갔다. 부자들이 도시를 떠나자 도시세입이 줄어들어 도시 행정은 마비되었다. 로마시는 하나의 거대한 관, 죽은 도시가 되어 갔다. -군대의 상황 : 세입이 줄어들자 군인들의 전투력은 즉각 하락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고안한, 주둔군과 기동군을 나누는 제도도 결함이 드러났다. 기동군은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기강이 해이해졌고 주둔군은 임무를 망각한 채 주둔지에서 재산을 늘리는 데 혈안이 되었다. 게르만에게 멱살을 잡힌 5세기초의 군대규모는 부흥기인 4세기초에 비해 1/20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다. -게르만 용병의 고용 : 국방력이 약화되자 그 동안 게르만의 침입을 막는 데 주력한 로마군이 오히려 게르만의 힘을 빌리는 처지가 되었다. 먼 옛날 마그나 그라키아나 카르타고가 용병을 부릴 때에도 꿋꿋이 시민들과 동맹시의 병력만으로 군대를 꾸렸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부족한 병력을 용병으로 충당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점점 게르만의 비위를 맞추면서 회유정책을 펼쳤고, 마침내 로마 국경 내에 살 곳을 마련해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르만 용병을 묘사한 짤방. 국방을 남에게 맡겼던 이들치고 잘된 놈을 본 적 없다. 3. 게르만족 4세기 초 게르만들은 라인강에서부터 흑해에 이르는 로마의 국경선을 따라 흩어져 있었다. '게르만'이라고 싸잡아서 부르지만 이들은 서로 별 상관도 없는 별개의 민족이었다. 이란 이라크 아랍 터키를 묶어서 '이슬람'이라고 대충 부르는 것과 비슷하달까. 게르만 민족은 동게르만·서게르만·북게르만 민족 등으로 크게 나누어 지지만 이것도 두리뭉실한 분류다. 동게르만 민족에는 반달족·부르군트족·고트족 등이 있으며, 훈족에게 떠밀려 왔다. 앵글로 색슨족과 롬바르드족·프랑크족 등이 서게르만 민족이다. 북게르만 민족은 소위 노르만인('노르만'이라는 이름조차도 두루뭉술한 통칭이다)으로서 10세기 이후에 남하했다. 훈족에 떠밀려 온 서고트족이 발렌스 황제에게 정착할 곳을 마련해달라고 부탁하자, 발렌스는 트라키아에 정착할 것을 허용했는데 당시에는 누구도 몰랐지만 이 약속은 어마어마한 결과를 몰고 온다. 황제가 허락했음에도 정작 트라키아 총독이 "고트족 꺼져"를 외쳤고, 분노한 서고트족은 트라키아 총독을 방법해버렸다. 이로 인해 발렌스는 서고트, 트라키아의 고트, 훈족 모두를 상대로 "전쟁이닷!" 선언을 했다.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발렌스는 죽고 군대도 괴멸되었다. 아드리아노플 전투의 참패는 로마멸망의 오프닝으로 여겨진다. 4. 테오도시우스 그 스스로는 제법 유능한 군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드리아노플 패배 이후 게르만은 막고 싶다고 막아지는 존재가 더 이상 아니다. 테오도시우스는 도나우강 유역에 고트족의 정착을 허용하고 화친을 꾀한다. 군사동맹인 '푀데라티'를 맺고 영주권을 얻는 대가로 병력제공을 약속 받았다. 그는 중병을 앓은 직후 기독교에 심취하였고 신학논쟁에도 뛰어들었다. 니케아 공회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 주의는 황제들과의 친분을 무기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는데, 테오도시우스는 니케아 공회의 결과를 재확인하면서 아리우스 주의를 폐기했다. 예수의 신성과 삼위일체를 동의하는 것이 보편적Catholic 기독교라고 선언했다. 그는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경고를 무시하고 테살로니카에서 주민7000명을 학살했다가 교회 출입을 금지당했고, 암브로시우스에게 반년 넘게 싹싹 빌고서야 용서 받았다. 짤방은 밀라노 성당 앞에서 암브로시우스에게 용서를 구하는 테오도시우스를 그린 그림이다. 5. 로마제국의 분열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의 통합을 위해 그토록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로마가 하나로 계속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통일제국의 꿈이 정치지도자에게는 달콤하겠지만, 로마문명은 하나의 정치구조 아래 있기에는 너무나 방대하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과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 간의 문화적 차이는 점점 커져갔다. 동서는 점점 다른 문명권으로 분화되어 갔다. 테오도시우스가 어린 두 아들에게 각각 동서로마를 물려준 후로 로마는 다시는 통합되지 않았다. 동로마에서 황제는 법과 종교를 동시에 관장하는 존재였다. 황제는 제국의 주인이자 신의 대리인이었고 동방의 사고방식 역시 이를 지지했다. 반면 서로마에서는 400년경 교회와 국가의 역할 구분이 서서히 이루어졌다. 경제적인 측면의 차이는 더욱 선명하다. 동로마는 인구가 많아서 세금을 충분히 거둬들일 수 있었지만 서로마는 300년경 아프리카 속주의 세금 없이는 국정을 꾸려나갈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사실 16세기에 남미에서 막대한 금을 들여오기 전까지는, 한 번도 서지중해의 경제력이 동지중해를 넘어섰던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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