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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당신의 말을 요약하면, 당신은 미래에서, 다시 말해 과거로, 왔고. 그 목적은 저한테 있다. 이 말인가요?」
앞에 서 있는 여자는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고 웃으며.
「정정하자면 목적이 굳이 당신한테 있는 건 아니지만요」
「그건 둘째 치고, 미래에서 왔다. 그런 믿지 못할 소리를 하는, 처음 보는 사람과 깊히 말을 섞을 이유는 못 느끼는데요. 아니, 그 전에. 목적이 저에게 없다면, 굳이 더 말 할 필요 없잖아요?」
「목적은 당신에게 없지만. 좋은 수단이 생겼는데 지나칠 수는 없죠.」
과대망상. 리플리 증후군? 흥미가 없진 않지만, 시간낭비다.
「대안이 있다면 대안을 고르세요. 그럼.」
비일상적이고 비효율적인 일은 최대한 깔끔하게 처리한다. 빠르게 정리했다. 돌아선다.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을 해주면,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을 해줄게요.」
매력적인 제안. 흠 잡을 데 없이. 돌아선다.
「그 일들이 뭔지, 먼저 설명해주신다면.」
웃고 있다. 웃으며, 그녀는 말한다. 처음부터 그랬듯이.
「대답 먼저. 좋아요? 싫어요?」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아, 일단 시작부터. 이곳은, 다시 말해 이 공간은, 당신과 제가 있는 곳은 3차원 공간이예요. 그러니까... 먼저 3차원은 좌표 축 3개로 이루어져 있어요. 선을 이루는 1차원, 면을 이루는 2차원, 부피를 이루는 3차원. 다시 말해 당신이 인지하고 있는 공간은 3차원이죠.」
전형적인, 얘기. ‘나, 왠지 멋지다!’ 하는 사춘기 아이들이 어렴풋이 어딘가에서 주워듣고 자랑스레 말하고 다니는. 공상 과학 소설이나 영화, 만화의 단골메뉴. 내가 동의하자마자, 정확히는 동의하고 자세한 설명을 요구한 순간, 이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쉽게, 여기에 축 하나를 더하면 4차원인데, 그 좌표축은 시간이죠. 인지하고 있지만, 인지할 수 있지만, 인지하든 안하든, 우리 공간은 시간 축에 존재해요. 나의 시간 좌표가 있고, 당신의 시간좌표가 있고. 물론 지금은 비슷한 시간좌표에 있지만. 이런 개념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좀 추상적이겠지만.」
「내가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당신의 신원의 증명인데.」
「그러려면 이 질문부터 시작해야 해요. 왜 시간은 흐를까요? 말 그대로 왜 흐르고 있을까요? 어째서 움직이고, 한 방향으로 이동할까요? 누군가의 시간은 거꾸로 가진 않는 걸까요?」
벤자민 버튼 얘기인가.
「쉽게 설명하면, 3차원 공간은 4차원 시간 축에서 자유낙하하고 있어요. 자유낙하라는 표현이 맞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오히려 퍼져간다고 하는 게 맞겠지만. 이해하기 쉽게 말해서. 자, 여기 흰 종이가 있어요. 여긴 2차원 공간. 점을 찍으면 이게 2차원 위의 존재. 떨어뜨리면 종이는 종이 째로 떨어져요. 점은 종이와 함께 떨어지는 중이고요. 다시 말해, 흐르고 있는 거죠. 이게 시간의 흐름이예요. 네, 이거랑 비슷해요. 3차원의 공간이, 4차원의 시간좌표에서 떨어지고 있는 거예요.」
「잠시만, 일단 그렇다고 치자. 당신 말대로라면, 우리의 시간은 가속하고 있는 건가? 자유낙하라는 표현대로라면. 무언가 어떤 힘을 받아서,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면.」
「조금 달라요. 가속 할 수도 있고, 등속일 수도 있죠. 또 한 방향이란 표현도 조금 다른 의미지만, 일단은 그렇게 볼까요?」
「그렇다면, 시간을 흐르게 한다는 그 힘에 반대되는 작용을 하는 힘이 있다고 보면 되는 건가? 내 상식으로는 그렇다고 밖에 생각이 안 되는데.」
「맞아요. 다행이도. 이해가 빠르시네요. 흔히 알고 있잖아요. 중력이에요.」
「두 힘은 절충되고 보완되고 상호작용하고 있어요. 단순히 말해, 중력이 강하면 시간은? 느리게 가죠. 마치 흐르는 개울에 작은 돛단배를 띄울 때와, 돌맹이를 던질 때 같은 차이려나요?」
「일단 이해는 잘 안가지만. 그럼 시간을 거슬러 왔다는 당신 주장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음... 다시 한 번 예를 들어 볼까요? 당신은 떨어지고 있어요. 아래로. 더 빨리 떨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운동방향으로 힘을 가해주면 되죠. 느리게 가려면? 반대로 가해주면 되요. 다시 말해서, 시간을 못 거스르는 일은 없어요. 힘들 뿐이죠. 많이, 어마어마하게 힘들 뿐 이예요.」
이쯤 되면 흔한 태클을 걸지 않을 수 없다.
「자, 당신 말이 옳다 치자.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미래에서 온 사람이 없는 거지?」
「방금 말했듯이, 어마어마하게 힘들어요.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불가능>의 반댓말은 <불가능하지 않다.> 이지, <가능하다>인건 아니에요. <할 수 있는 것>과, <가능한 것>의 뉘앙스도 살짝 다른 것 처럼요.」
「방금 전 까지는 본인이 미래에서 왔다고 주장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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