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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세계
게시물ID : freeboard_65523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우울몽
추천 : 2
조회수 : 372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1/26 21:33:12



‘자 기 자신을 구원함으로써만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영적 결핍이라는 무서운 병에 걸려 불구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질환은 치명적이다. 인류는 자신의 도덕적 파멸로부터 시작하여 자기를 절멸 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다 해왔다. 육체의 죽음은 다만 그 결과일 뿐이다.’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순교 일기] 중에서-

 

21 세기 영화에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하나의 잊혀진 이름이 되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영화를 본 사람들은 대게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지독하게 지루하거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적적이거나. 영화를 예술로 믿으면서 19세기의 교양을 가지고 영화를 만든 일련의 감독들이 있다. 이를 테면 잉그마르 베르히만, 페데리코 펠리니, 루이스 뷔뉘엘, 로베르 브레송은 그 대표적인 이름들 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계보에 거의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일 것이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21세기에도 히치콕과 존 포드는 계속 언급되고 있지만 이 감독들은 점점 더 잊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건 기적을 보기 위해 지루함을 견뎌낼 것인가 혹은 지루함을 감수하고라도 기적을 목격할 것인가의 문제가 된 셈이다. 이 사태까지 오게 된 것은 아마도 21세기가 너무 즉물적인 세계가 되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기적은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 되고, 모든 것은 심지어 미쳤다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속도의 경쟁 속에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러면서 영화는 어떤 극단적인 두 방향으로 갈라져버렸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교활하거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진하거나. 그리고 그 두 극단 사이에서도 위대한 영화들은 계속 등장했다.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시점부터이다. 필름이 사라지고 디지털이 영화의 기본 질료를 차지하고 영화사에서 50년대와 거의 유사한 것처럼 보이는 테크놀로지 전쟁 시대에 20세기 영화들의 전통을 들고 온 영화들이 이제 하나 둘씩 도착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테면,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엉클 분미>는 마치 장 비고가 아시아의 정글로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혹은 벨라 타르는 <토리노의 말>에서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 혹은 갈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게르투르드>를 들고 온다. 그리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그 이름들 중 가장 반가운 이름일 것이다. 올 해 조사한 사이트 앤 사운드 2012년 조사에서 타르코프스키는 평론가와 감독 조사 모두에서 이전보다 더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스토커>가 평론가 29위, 감독 30위.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평론가 27위, 감독 13위. <거울>이 평론가 19위, 감독 9위를 차지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평론가보다 감독에게 타르코프스키의 영향력이 더 크다는 것이다.) 점점 더 다스토피아적으로 바뀌어 가는 것처럼 보이는 21세기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라는 이름은 하나의 감독을 넘어 하나의 정신 세계라고 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안 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1932년 4월 러시아의 볼가 강 유역에 있는 자브라이예에서 태어났다. 타르코프스키의 아버지인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는 시인이었으며, 어머니인 마리아 이바노브나 비쉬나코바는 인쇄소 교정공이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1936년 별거에 들어갔고, 아버지는 자브라이예 지방을 떠났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 돌아오지 않을 아버지를 기다리면서 볼가 강의 안개를 맞으며 살았다고 한다. 어린 타르코프스키는 그런 어머니를 고통스럽게 바라보았다. 여기서 타르코프스키는 두 가지의 이미지를 보았다. 하나는 강의 물안개였고, 하나는 기다림이었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보면 마치 영화가 물에 흠뻑 젖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 볼가 강 유역은 예전부터 비가 자주 내렸고, 그로 인해 넓은 곡창 지대를 형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타르코프스키는 후에 자신의 영화에서 이 러시아라는 땅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에게 러시아라는 땅은 사회주의의 열기가 들끓는 공간이 아니라, 흙과 하늘로 이루어진 하나의 대지였으며, 거기서 자신의 영화적 비전을 찾았다.

 

타 르코프스키는 1952년 20살이 되는 해에, 동양어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의 삼행시라고 알려진 하이쿠를 공부하였다. 이 하이쿠는 일종의 서정시로, 타르코프스키는 그 시들을 통해 삶에 대한 관찰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쓸쓸함이라는 정조였다. 타르코프스키 영화가 굉장히 절제되어 있고, 정제된 느낌을 주는 것 역시 이 하이쿠의 영향일 것이다. 에이젠슈테인 역시 이 하이쿠에 관심을 가졌는데, 그는 세 개의 상관없는 문자를 가지고 의미를 만들어 내는 하이쿠의 형식상의 특징에서 몽타쥬의 표현성을 보았었다. 하지만 타르코프스키는 하이쿠의 형식이 아니라, 하이쿠의 정감을 본 것이었다. 타르코프스키는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과정을 거치는 데, 그는 1954년에서 1956년까지 시베리아에서 지질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스스로 해저 탐사반에 자원해, 심해를 탐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심해에서 타르코프스키 본인 말에 따르면 ‘자신의 눈에 보이는 해저의 느린 물결의 움직임을 카메라로 잡아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영화 감독을 하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러니까, 타르코프스키는 영화 감독이 되기 위해 두 가지의 학문을 거친 것이다. 하나는, 시를 포함한 언어였고 하나는, 땅과 물을 포함한 지질학이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속성을 결합시켜 타르코프스키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모 스코바에 온 타르코프스키는 1956년 당시 소련의 국립영화학교였던 VGIK에 입학하였고, 거기서 에이젠슈테인의 제자이기도 했던 미하일 롬 교수님의 지도를 받아 영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에이젠슈테인의 입학 동기는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와 오타르 이오셀리아니로 알려져 있는데,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와는 VGIK 졸업 작품이었던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의 시나리오를 함께 적었고, <안드레이 루블료프>까지 함께 작업을 하기도 했었다. 당시, 소련 정부에선 ‘부르주아 성향의 영화’라는 이유로 타 유럽 영화의 관람을 제한했고 타르코프스키는 소비에트 몽타쥬 영화들과 리얼리즘 영화들을 주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타르코프스키는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의 <대지>를 보게 된다. 자신이 볼가 강에 살던 어릴 적의 그 땅을 기억하면서 영화를 본 타르코프스키는 그 영화의 몽타쥬의 형식보다, 땅과 하늘, 신화와 민담, 농민들의 모습들에 영감을 받아 이 영화를 자신의 영화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1960년 타르코프스키는 VGIK 졸업 작품으로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을 찍으면서 당시 뉴욕 영화제 대상을 받았고, 2년 뒤. 제작 도중 중단 되었던 <이반의 어린 시절>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서 영화계에 대뷔했다. 이 영화를 찍을 때, 타르코프스키는 전에 찍었던 버전을 모두 폐기하고, 블라드미르 보고모로브의 원작 소설을 처음부터 다시 각색해갔다.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타르코프스키는 그 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게 된다.

 

타 르코프스키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1960년대에 유럽 영화는 이제 막 모더니즘 영화들이 등장하면서 영화에 두 번째 세기를 열어젖히고 있었다. 그 해, 오즈 야스지로가 유작 <꽁치의 맛>을 찍었고 존 포드가 자신의 서부극의 종말을 알리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찍었고, 루키노 비스콘티가 데카당스 미학의 절정으로 <레오파드>를 찍었으며, 하워드 혹스가 <리오 브라보> 이후로 거의 그의 영화 경력의 마무리를 알리는 마지막 걸작 <하타리>를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장 뤽 고다르가 <비 브르 사 비>를 만들었고, 프랑수아 트뤼포가 <줄 앤 짐>을 만들었고, 토니 리차드슨이 <장거리 주자의 외로움>을 만들었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일식>을 만들었다. 타르코프스키의 놀라운 점은 그가 <이반의 어린 시절>을 만들 당시 유럽의 모더니즘 영화를 거의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타르코프스키가 모더니즘의 작가로서 영화를 시작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왜냐하면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주요 특징들은 이미 그가 VGIK 졸업 작품으로 만든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에서 보여지고 있으며, 이 영화는 고다르가 <네 멋대로 해라>를 만들고 안토니오니가 <정사>를 만들기 전에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타르코프스키는 영화를 찍기 시작한 동시에 그 자신의 스타일을 찾은 영화사상 거의 유례가 없는 감독일 것이다.(굳이 비교하자면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정도가 그 예가 될 것이다.)

 

개 인적인 이야기. 내가 가장 먼저 본 타르코프스키 영화는 <거울>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의 가장 내밀하고 가장 섬세한 영화로 타르코프스키를 만난 것이었다. 나는 이 영화를 2009년 전주 영화제에서 봤는데, 솔직히 말하면 거의 영화가 시작되고 10분 만에 졸아서 기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다음 본 타르코프스키 영화 역시 <거울>이었다. 그 때는 졸지 않고 봤지만 영화에 어떤 감흥 같은 것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나는 <거울>을 다섯 번째로 다시 보면서 이 영화가 무엇을 얘기하려고 하는 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가장 놀라운 점은 그가 기억을 이끌어 내는 방법이었다. 영화에서 기억을 보여주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플래쉬 백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에서 단 한 번의 플래쉬 백도 사용하지 않았다. <거울>에서는 의도적으로 플래쉬 백을 없애고 차라리 두 개의 시간대. 어머니의 시간과 나탈리아의 시간을 나눠놓았으며 <희생>에선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하게 회상을 현실과 공상의 사이에서 흐트러트린다. 대신 타르코프스키가 기억을 꺼내는 방법으로 택한 것은 바로 사운드를 통해서이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 <스토커>에서, 주인공 ‘안내자’는 집에서 잠을 자다가 기차 소리에 잠을 깬다. 그 때, 화면에 기차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 기차 소리는 영화의 후반부에 세 명의 남자가 구원의 방에서 나올 때 다시 한 번 들린다. 그런데, 이 구역 근처로 기차가 지나다닐 리가 없으므로, 이 기차 소리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소리이다. 그런데 초반부에, 우리는 이 안내자를 통해 기차의 소리를 들었다. 타르코프스키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비슷한 방법을 사용하는 데, 사운드를 먼저 선행시켜 들려주고 그 다음 그 사운드에 맞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지와 사운드가 항상 매치 된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일상적 관념에서 벗어나 그 두 가지를 따로 떼어놓고 사고하라는 타르코프스키의 지시이다. 그런데 왜 그런 방법을 택하는가? 타르코프스키에게 사운드란 하나의 상징적 이미지인 것이다. 이를 테면, 우리가 기차 소리를 듣는다면 우리는 기차를 보지 않아도 기차를 머릿 속에서 이미지화 시킨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 우리는 기차라는 하나의 이미지에 대한 각자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그런 의미로 영화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경멸했으며, 자신의 영화를 이론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을 반대했다. 기차라는 이미지는 관객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하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르코프스키는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끊임없이 쫓아갔다. 그의 영화의 기적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를 테면, 희망이라는 단어는 어떤 구체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물질화 될 수 없다. 그런데 타르코프스키는 그 희망이라는 추상을 장면의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 보여줄 때, 그 형이상학이 물리학으로 뒤바뀌는 순간을 포착했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 기적은 항상 움직이는 무엇이다. 그렇게 해야만 영화라는 동-영상에서 이미지가 항상 가시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스토커>에서 다리가 잘린 어린 딸이 영화의 마지막에 염력으로 물 잔을 움직이는 장면이나 혹은 <노스텔지어>에서 주인공 고르차코프가 말라버린 온천장을 촛불을 들고 세 번 건너갈 때 카메라는 그 움직임을 주목하고 있으며 거기서의 변화를 예의주시한다. 그래서 타르코프스키의 카메라는 (느릿느릿한 인물들의 움직임과는 달리) 항상 수평 트래킹을 하거나 크레인 쇼트로 움직인다. 타르코프스키에게 카메라 역시 하나의 물질인 것이다.

 

이 방법과 거의 유사하게 타르코프스키는 시간의 연속적인 흐름을 보여주는 고전적인 편집에서 벗어나 시간의 흐름을 깨뜨리는 불연속적인 편집을 사용했다.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에서 시간이란 쇼트의 본질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영화가 다른 예술과 가장 다른 점은 바로 시간을 다룰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뤼미에르의 <열차의 도착>을 ‘시간을 직접적으로 사로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예술사의 첫 번째 사례’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마도, 타르코프스키에게 영화는 조각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각이 거대한 하나의 재료의 덩어리를 깎아 예술작품을 만들 듯이, 영화는 하나의 시간의 덩어리를 깎아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렇게해서 만들어진 하나의 시간 즉 하나의 쇼트를 타르코프스키는 ‘봉인된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많은 사람들이 타르코프스키하면 떠오르는 가장 큰 스타일상의 특징인 ‘롱 테이크’ 역시 그 시간을 붙잡아두려는 의미에서 가장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타르코프스키가 사용하는 롱 테이크는 다른 롱 테이크 미학의 대가들. 이를 테면, 미조구치 겐지, 테오 앙겔로풀로스, 미클로스 얀초와는 다른 것이었다. 타르코프스키는 현실의 리얼리티를 강조하기 위해 롱 테이크를 사용하거나 미학적 타당성으로 롱 테이크를 사용하지 않았다. 차라리 타르코프스키는 시간 그 자체를 보여주기 위해 롱 테이크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노스텔지어>를 통해 서구의 평론가들이 타르코프스키를 재발견하였을 때, 롱 테이크의 미학에 집중하여 영화를 분석하고 해석하려 들 때, 타르코프스키는 그 모든 비평을 무효화시키기도 하였다. 왜냐면 타르코프스키 영화에선 그 롱 테이크 자체에 어떤 메타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롱 테이크의 이미지로 유지되고 있는 그 시간 자체가 더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에서 이미지를 나눈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까지 말했다. 왜냐하면, 이미지를 자르는 것은 관객이 그 이미지를 통해 감독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관객이 그 롱 테이크의 시간 안에 붙잡힌 이미지를 관객들이 보면서, 그 이미지에 부여된 시간을 함께 공유하고 그러면서 그 이미지(사람이든 사물이든 풍경이든)에 대한 역사와 삶과 문화를 관객이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타 르코프스키는 롱 테이크라는 스타일에서만 아니라, 영화의 내적 테마에서도 시간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 시간은 언제나 과거의 전사(前事)의 시간이었으며,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현재 혹은 미래일지라도 과거의 기억에 집중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초기작 두 편인 <이반의 어린 시절>과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타르코프스키는 과거의 역사 안으로 직접적으로 들어가 연대기적 방법을 통해 실제 역사를 재구성했다. 그 다음 영화인 <솔라리스>는 미래를 배경으로 했지만 그 안에서 주인공 켈빈은 과거에 죽은 아내의 기억을 통해 아내를 부활시키면서 과거의 시간 안에 사로잡힌다. <거울>에선 아버지가 사라진 과거의 기억이 계속 등장하며, <스토커>에선 과거에 운석 충돌로 인해 생성된 구역으로 세 남자가 들어간다. <노스텔지어>와 <희생>에선 과거의 사건들이 배경이 되어 주인공들이 장소에 도착한다. 그러면서 타르코프스키는 시간을 일관되게 쫓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쇼트들은 연속적인 체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형상으로 존재하였다. 그래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의 이야기는 간단하게 요약될 수 없었다. 그래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볼 때 가장 놓치기 쉬운 것은 바로 주인공의 행동 동기이다. 주인공들이 도대체 왜 저런 행동을 지금 하는 지 알 수 없는 장면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보기 위해선 우리가 지금까지 영화를 보았던 관습을 완전히 잊고 새로운 생각으로 영화를 봐야만 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이야기의 영화를 찍지 않았다. 차라리 그는 정감의 영화를 찍었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이 하는 행동들은 논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행동들이 아니라, 그 순간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하는 것인 셈이었다. 이것은 타르코프스키가 배우를 캐스팅하는 과정과도 연결 된다. 타르코프스키는 배우를 캐스팅 할 때 자기가 캐스팅하고 싶은 배우들의 사진을 보고, 그 배우의 얼굴이 마음에 들면 그 배우의 집에 전화를 걸어 그 사람의 마스크와 목소리가 일치하면 그 순간부터 타르코프스키는 그 배우를 믿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타르코프스키는 배우를 선택할 때 어떤 연기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상상력이 일치될 때 그 배우를 믿음으로써 자신의 영화 속에 그 (배우가 아닌) 사람의 정신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은 것이었다.

 

타 르코프스키는 그 믿는 다는 행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이 부족한 우리에게(!) 직접 기적과도 같은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예는 <거울>에서 바람의 속도와 똑같은 속도로 카메라가 수평 트래킹하는 그 장면일 것이다. 타르코프스키가 믿었던 것은 바로 희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과학의 발달에 회의를 표하는 장면들을 줄곧 삽입했으며, 비인간적인 전쟁터에 이끌렸다. 그리고 그 어두운 비전은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이어졌다. 타르코프스키는 불안했기 때문에 희망을 믿은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영화 감독에게 불안이 없으면 그려낼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고, 희망이 없다면 형식이 없을 것이다.’라고 까지 말했다. 그래서 <이반의 어린 시절>과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주인공들은 전쟁터로 들어가고, 그로 인해 육체와 영혼의 수난을 겪지만 그들은 결국엔 그 수난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는 방법을 깨닫는다. 혹은, <솔라리스>와 <거울>, <스토커>에서 그리는 과학 문명은 인류의 절멸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절멸을 막기 위해 타르코프스키는 인간의 순수한 영혼과 사랑의 문제를 가지고 들어온다. 그래서 그 순수성과 사랑을 통해 과학의 논리성을 초월한다. 혹은 <노스텔지어>에서는 촛불 하나를 들고 온천장을 건너는 행위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희생>에선 벙어리인 아들을 위해 자신의 집을 불태운다. 타르코프스키는 물의 이미지와 불의 이미지를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두 이미지는 대립된다기보다, 하나로 공존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불이 나면 그 장소에서 빠져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공간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선 물이 필요하다. 그래서 타르코프스키가 영화에서 불을 피우는 곳에는 항상 물이 존재한다. 이를 테면, <노스텔지아>에서 촛불을 꺼트리지 않은 채 가로질러야 하는 곳은 온천장이다. 혹은 <거울>에서 프레임의 후경에 불타는 집을 보여줄 때, 동시에 프레임의 전경에는 빗물이 떨어진다. <희생>에서 극작가가 자신의 집을 모두 불 태울 때, 그 집 타르코프스키에게 불이라는 것은 태초의 순수성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불을 밝히는 것은 그 순수성을 표현하려는 극단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그 불의 세계가 물의 세계와 만날 때, 그것은 세상의 순리와도 같은 것이다. 물을 만나면, 불은 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르코프스키는 그것을 단순하게 물로서 불을 끄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한 프레임 안에 물과 불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자연적인 순리를 우리들에게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타르코프스키는 불이라는 하나의 극단을 물이라는 하나의 극단과 함께 공존시키면서 세상의 이항 대립을 화해시키는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그래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엔 시종일관 비가 쏟아진다. 그에게 비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끈과도 같은 것이다. 흔히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영화에서 비를 ‘어머니 대지와 아버지 하늘을 이어주는 선’이라고 표현했다.

 

이 것은 중요한 키워드이다. 왜냐하면, 그의 영화는 기다림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VGIK에서 만든 졸업 작품 때부터 줄곧 염두에 둔 영화 만들기 방법이었다. 영화의 캐릭터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그 기다리는 대부분의 존재는 아버지(혹은 남편)이다. 그리고 이 물리적 기다림을 타르코프스키는 이미지의 차원으로도 확장시키는 데, 이를 테면 <스토커>에서 기적을 일으키는 방에서 세 사람이 그 방을 폭파시킬지 말지를 두고 설전을 벌인 후, 쓰러져 쉬고 있을 때, 카메라는 느릿느릿하게 후진 트래킹을 한다. 그 때, 그 방에 뚫린 천장 사이로 비가 쏟아진다. 비는, 이 세 사람의 싸움이 멈추기만을 기다렸다가 그 순간에 기적처럼 쏟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비는 땅에 있는 이 세 명의 사람을 화해시킨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일종의 원형적 구성을 취하는 데, 그의 대뷔작인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주인공은 12살 소년이고 영화를 찍을 때 마다 그의 영화 속 캐릭터들은 나이를 먹어간다. 그리고 <희생>에선 60대 극작가가 주인공이고,(타르코프스키가 이 영화를 찍었을 당시의 나이.) 거기서 타르코프스키는 그 자신의 영화를 끝낸다. 그리고 그의 대뷔작인 <이반의 어린 시절>의 오프닝은 나무를 보는 안드레이의 모습에서 카메라가 나무를 따라 수직으로 올라가는 장면이고, 그의 마지막 작품인 <희생>에선 말을 못하는 아들이 죽은 나무를 되살려 말을 하는 것을 보여준 후, 나무를 따라 수직으로 올라간다. 타르코프스키는 그가 찍은 영화들마다 다른 소재와 다른 테마로 영화를 찍었지만, 필모그라피가 하나의 원형적 구조를 이룬다는 점에서 오즈 야스지로와 비견될 것이다. 그러나 오즈가 같은 인물, 같은 공간, 같은 사건을 다른 시간(오즈의 영화에선 계절이 뒤바뀐다.)으로 보여주었다면, 타르코프스키는 반대로 다른 인물, 다른 시간, 다른 사건들을 하나의 공간으로 보여주었던 셈이다. 이반이 살아가는 전쟁터,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들어가는 전쟁터. 켈빈이 향하는 솔라리스 행성, 가족이 살던 집, 잠입자가 들어가는 구역, 안드레이가 방문한 이탈리아, 알렉산더가 살고 있는 집은 모두 같은 공간처럼 보인다. 그곳은 눈에 보이는 이성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으로 옮겨가는 공간들이며, 그 공간들 속에서 주인공들은 영적인 신비로움을 느끼며, 영혼의 고향이다. 그리고 <희생>에서 타르코프스키는 그 영혼의 고향인 집을 불태운다. 이 영화는, 타르코프스키가 망명을 떠난 뒤 처음으로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고통을 그것을 불태움으로써 물질적인 차원의 고향에 대한 향수가 아닌, 정신적 순교(일종의 분신자살과도 같은)의 차원에서 고향에 대한 향수를 표현한다. 그리고, 그 향수를 통해 그의 아들에게 기적을 베푼다.

 

타 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볼 때 가장 신기한 장면은 그가 원근법을 파괴하는 장면들일 것이다. 이를 테면, <이반의 어린 시절>의 오프닝에서 클로즈 업 된 이반은 화면의 왼 쪽으로 빠져나가는데, 2초가 채 되지 않은 시간에 그는 저 멀리서 롱 숏으로 다시 화면 왼 쪽으로 들어온다. 혹은 <노스텔지아>에서 안드레이가 고향 러시아에 있는 노모와 아내, 딸을 생각할 때 수평 트래킹으로 이 세 명의 모습이 각각 클로즈 업-풀 샷-롱 샷으로 등장하고, 계속 수평 트래킹 하면 그 위치가 바뀐 채 세 명의 모습이 다시 등장한다. 그런데 그 위치가 바뀌어서 등장하는 시간은 채 5초가 되지 않는다. 이는 르네상스 회화가 원근법을 정립해낸 15세기 전의 회화적 구성일 것이다. 그리고 원근법을 없앤 회화의 가장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성상화를 그렸던 안드레이 루블료프이다. 그의 유명한 「구약성서의 삼위일체」에서 루블료프는 세 명의 인물(각각 성부-성자-성령으로 상징화되는)을 원근법을 무시한 채, 동등한 비율로 그려내고 있으며 그래서 그림에선 깊이감을 느낄 수 없다. 대신, 이 세 인물의 엄격한 구도는 삼각형의 구도로 등장하는데, 이 삼각형의 구도는 타르코프스키 영화에서 중요한 형상이다. <스토커>에서 만나는 교수, 작가, 과학자는 술집에서 처음 만날 때 삼각형의 구도로 서 있다.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안드레이와 길을 떠나는 키릴, 다닐은 삼각형의 구도로 길을 떠난다. 그래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 3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하다. 그 3이라는 숫자는 삼위일체를 통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타르코프스키의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대부분의 가족은 3명이고, 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3명이고, 3번의 과정을 통해 결과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 3이라는 숫자는 깨질 듯하면서, 계속 위태롭게 유지된다.

 

대 부분의 소련의 예술가들이 정치적 억압을 피해 러시아 땅을 자발적으로 떠났지만 타르코프스키는 러시아 땅을 떠난다는 것을 고통으로 생각했다. 타르코프스키 본인은 자신이 성자라는 표현에 질색했지만, 그는 그 자신의 운명을 그 자신이 가장 잘 예언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정말 성인처럼 보인다. 그는 <스토커>를 만든 후, 더 이상 러시아에서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이탈리아로 가서 고향 러시아를 그리워하는 <노스텔지아>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죽을 것을 염두에 두고 <희생>을 만들었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는 유독 공중으로 부양하는 이미지 숏이 많이 등장한다.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오프닝인 이반의 꿈 장면에서 이반이 하늘을 날아오르고,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오프닝에서도 예핌이 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아오른다. <솔라리스>에서 켈빈과 하리는 우주 정거장의 무중력 상태에서 키스를 한다. <거울>과 <잠입자>, <희생>에선 꿈과 같은 상황에서, 주인공이 공중으로 떠다닌다. 그는 물리력의 법칙을 무시하면서 세상의 모든 풍경에 영혼이 담겨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다스토피아의 기운이 넘쳐나는 20세기에 살았던 이 감독은 19세기에나 가능했을 법한 믿음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 그것은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순수성이며, 그 영혼을 문학적인 방법이 아닌, 영화적인 방법으로 보여주기 위한 고통스러운 투쟁이었다. 그는 <희생>을 만든 후 차기작으로 [햄릿]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1986년 12월 29일 파리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건 <스토커>의 ‘구역’을 촬영하기 위해 당시 소련이 공업 지대로 개발하여 오염된 에스토니아의 탈린에서의 촬영으로 인해 발병된 것이었다. 타르코프스키는 그곳으로 들어가 종교적 믿음이 과학적 이성보다 인간에게 더 큰 기적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그 자신은 그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다. 타르코프스키가 쓴 두 권의 책 제목은 [봉인된 시간]과 [순교 일기]이다. [봉인된 시간]의 마지막 문구는 그가 <희생>을 만들 때 적어 놓은 글이다. ‘사람들은 묵시론적 침묵의 증후군이 임박한 지금 생존의 그 어떤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생명의 물을 부어 넣은 메마른 나무에 관한 전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중략) 한 수도승은 메마른 나무에 물을 주기 위해 양동이를 들고 언덕에서 산마루까지 한 걸음씩 날랐따. 오직 그의 행위가 신에 대한 신념, 그 기적에 대한 믿음 속에서 필연적이라는 생각으로 그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기적을 보기 위해서 살아간 셈이다. 어느 날 아침 나무는 살아났고, 가지에는 잎사귀가 덮였다. 기적은 분명 진실에 다름 아니다.’ [순교 일기]의 마지막 일기는 그가 죽기 2주 전에 적은 12월 19일의 일기이다. ‘햄릿…….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전혀 일어날 수 없었다. 아래쪽 위(胃)와 등에 통증, 그리고 신경에도 통증이 심하다. 다리를 움직일 수 없다. (중략) 팔도 또한 아픈데, 일종의 신경통 같다. 나는 아주 약해져 있다. 나는 죽어가는가? 햄릿……? 만약 팔과 등에 통징이 없다면 화학요법이 도움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나는 무엇을 위해서도 남아 있는 힘이 없다. 그것이 문제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그의 차기작인 [햄릿]을 놓치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유령을 좇아 광기에 빠지는 이 햄릿의 이야기에서 타르코프스키는 ‘끊어진 시간의 끈’을 다시 잇기 위해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햄릿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리고 그 복수를 통해 햄릿이 자신의 영혼을 희생하는 그 고통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프로젝트는 실행되지 못했다.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사상 거의 유일하게 단 한 편의 실패작도 내놓지 않은 기적의 시네아스트일 것이다. 그의 영화를 보는 것은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21세기에 다시 보는 것은 인간의 순수성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다시금 느낄 수 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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