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이완용은 학부대신이였습니다. 그때 이완용이 을사늑약을 지지했고요.. 그의 적극성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관심을 받게되었으며 그해 12월에 의정대신서리·외부대신 서리를 겸직했고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또 헤이그특사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의 지시대로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양위할 것을 강요했구요, 순종을 즉위시키고 이완용 단독으로 기유각서를 맺어 대한제국의 사법권마저 일본에 넘겨주었습니다.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이 되어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고,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일본 정부에 의해 백작이 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고, 1911년 조선귀족원 부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1920년 매일신보에 경고문을 발표하여 3.1운동을 비판한 공로로 1920년 후작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도 일본으로 부터 남작의 지위를 받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