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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질서의 '문제적 인간' 김기춘
게시물ID : sisa_45073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機巧少女
추천 : 5
조회수 : 33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1/07 20:05:30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23659

대통령 탄핵심판과 위헌정당 해산심판, 그리고 유신헌법

그가 움직이면 헌정질서가 출렁였다. 그는 만 33세와 65세, 그리고 74세에 헌정질서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그의 이름은 김기춘, 현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올해로 25년 된 헌법재판소는 여러 가지 '헌정 사상 최초'를 마주했다. 그중 가장 뚜렷한 두 가지가 2004년 대통령 탄핵심판 청구와 얼마 전 제기된 정당 해산심판 청구다. 이 두 가지 모두 김 실장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2004헌나1 :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과 김기춘

2004년 5월 14일 기각된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청구에 대한 헌재 결정문은 지금도 언제든 헌법재판소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결정문을 보면 청구인란에 "국회"라고 적혀 있고, 일종의 검사 역할을 하는 소추위원란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법사위원장은 김기춘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었다.

법사위원장이 소추위원이 된 것은 헌법재판소법의 탄핵심판 규정(49조)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김기춘 당시 법사위원장은 단순히 명목상 이름만 올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직접 탄핵의결서 정본을 들고 헌재에 찾아가 접수시켰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의결된 직후 정형근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앞으로는 김기춘 손에 달렸다"고 말했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과 구민주당의 합작품인 노 대통령 탄핵안의 최초 발상자 역시 그로 알려졌고, 정치권 어디서도 명시적으로 부인하지 않는다.

이 사건에 대해 헌재가 부여한 사건번호는 '2004헌나1'이었다. 헌재의 사건번호의 규칙은 위헌 법률 심판은 '헌가', 탄핵 심판은 '헌나', 정당 해산심판은 '헌다', 권한 쟁의 심판은 '헌마' 이런 식이다. 지금까지 '헌나' 번호가 부여된 사건은 노 대통령 사건이 유일하다. 그리고 9년이 지난 지금 최초의 '헌다' 사건이 등장했다. 사건번호 '2013헌다1'이다.

2013헌다1 :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과 김기춘

2004 헌나1 사건과 달리 2013헌다1 사건에는 문서상 김 실장이 명시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법률상 정당 해산의 청구인은 '정부'다. 이번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안은 정홍원 국무총리가 주재한 5일 오전 국무회의에서 의결했고, 서유럽을 순방 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전자결재로 재가했고,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공식 발표했다. 접수에도 김 실장이 직접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는 이번 청구의 배후로 김 실장을 지목하고 있다.

7일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법사위 회의에서 "우리는 현 상황을 총체적 공안정국이라 보고 있다"라며 "공안정국의 각본은 김기춘, 감독은 홍경식, 주연은 황교안"이라고 말했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는 6일 기자회견에서 "김기춘이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들어간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를 포기하고 그의 기획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유신헌법과 김기춘

또 있다. 위 두 사건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헌정사 최초'였던 1972년 10월 17일 유신헌법 제정에 김 실장은 깊숙이 개입돼 있다. 지금은 작고한 헌법학자 한태연 전 서울대 법대 교수는 2001년 12월 8일 한국헌법학회 주최 학술대회에서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관련기사: "유신헌법은 박정희가 구상하고 신직수·김기춘이 안을 만들었다")

"72년 비상계엄이 선포된 다음 날 아침 청와대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고 갔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메모를 꺼내 놓았다. 박 대통령은 '이건 내가 만든 건데, 이 안을 헌법학자들한테 맡기려고 했으나 보안관계로 맡기지 못하고 법무부에서 작성한 것인데, 헌법제정에 대한 내 구상'이라면서 법무부에 가서 작업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나와 갈봉근 (당시 중앙대) 교수가 법무부에 가보니 신직수 법무부 장관과 김기춘 과장이 주동이 돼 법안을 모두 만든 상태였다. 신 장관이 '골격은 손댈 수 없다'고 해 자구수정 작업만 했다."

이 증언에 대해 김 실장은 주동은 아니었다는 취지로 해명했지만, 유신헌법 제정에 관여했던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다. 1972년 당시 김 실장은 9년차 검사로서 법무부에 파견 근무 중이었다.

기본적으로 김 실장은 법리에 굉장히 밝다. 단순히 검사를 거쳐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을 거쳤던 이력만 놓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김 실장 하면 빼놓을 수 없는 1992년 초원복집 사건 당시 유일하게 기소됐던 그는 자신에게 적용된 대통령선거법 제36조1항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고, 헌재로부터 위헌 결정을 받아 공소 취소를 이끌어낸 바 있다.

이런 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어김없이 법적 외피를 쓰고 있고, 기자들은 또 '헌정 사상 최초' 기사를 송고하기 시작했으며, 정국은 요동치고 있다.

그가 33세에 관여했던 유신헌법은 최고 권력자를 향한 총격이라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고, 그가 65세에 나섰던 대통령 탄핵심판은 결국 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압승이라는 역풍을 맞고 실패했다. 인생의 말년이라고 할 수 있는 74세의 승부수는 과연 어떻게 끝날 것인가.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아직 100년이 채 안 된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그는 확실히 '문제적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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