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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쩌라고?" - 우리는 대체 왜 분노하는가?
게시물ID : sisa_45092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거북이두루미
추천 : 2
조회수 : 101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1/08 14:43:08
원문 : http://www.whys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57

> 칼럼
"그래서, 어쩌라고?"

우리는 대체 왜 분노하는가?

무명논객 칼럼니스트  |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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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1.08  12:5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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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SBS 드라마 '대물'중에서> 강현석(차인표분) 분노의 연기

이 글을 보는 독자들은 제목이 다소 도발적이라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목을 저렇게 지은 이유는, 필자가 근본적으로 묻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질문이 나온 배경은 이렇다. 지금의 시대를 규정지을 수 있다면 필자는 분노의 시대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것에 분노하는지, 어떻게 분노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페이스북에, 댓글에 욕이나 한 마디 쓰고 비웃기만 하면 그만이다. 이 글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러한 방식의 분노들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떠오르는 대로 기술하자면, 사회가 그만큼 '옳지 못'하기에 사람들은 분노하게 되었고, 분노의 해소 방향으로 문제 상황에 대한 사유보다도 엉뚱한 대상을 향해 분노의 화살을 돌리는 것 같다. 우리는 분노하지만, 그리고 매 순간 일상에서 부조리함을 느끼지만 그것의 해소를 위한 마땅한 출구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분노가 엉뚱하게 표출되는 것이다.


한 동안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소위 '된장녀'를 향한 불만, 분노는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굉장히 대표적인 예다. 사람들은 너 나 없이 남녀평등을 부르짖게 되었다. 이제, ‘남녀평등이라는 가치는 우리 사회가 발전하기 위한 필수적인 가치이다. 소위 된장녀를 향한 우리의 불만은 바로 남녀평등이라는 가치에 위배되기에 터져 나오는 것이리라. 그러나 필자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된장녀가 모두 사라지면, 된장녀를 욕하며 남녀평등을 부르짖던 이들의 소원대로 세상에 남녀평등이 실현될까? 단언컨대 그것은 아닐 것이다.


   
▲ <사진=KBS> 남자친구와 헤어지며 받은 선물을 파는 한 여성

된장녀를 향한 비난의 맥락은 된장녀의 혐오스러운, 혹은 납득하기 어려운 비상식적인행위들에 대한 성토이지만, 사실상 이런 비난의 문법 속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지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보았는가? 된장녀가 잘못된 이유에 대해 우리는 누구나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 상황인지에 대해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남녀평등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된장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게 과중한 압박과 의무, 그리고 특권을 동시에 부여하는 가부장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남녀평등이라는 의제에 관한 한 무엇이 남녀평등실현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작용하는지는 여러 이견이 있을 수는 있으나 적어도 된장녀가 문제의 근본은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된장녀를 보며 남녀평등을 부르짖는다. 된장녀가 문제라고? 내가 해줄 말은 이렇다. “그래서, 어쩌라고?”


필자가 보기에, 우리가 페이스북을 보거나, 인터넷 웹서핑을 하며 만나는 수많은 '부조리를 향한 분노'는 사실상 그것이 '무엇이 문제 상황인지' 그리고 '왜 그런 일이 발생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유가 자리하고 있다기보다는 '저 사람들은 왜 저럴까? 난 아닌데." 식의 자기만족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런 방식의 분노는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한 '창조적 파괴'가 아니라 단지 문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배설'에 그칠 뿐이며 분노의 배설은 엉뚱한 희생자를 낳을 수 있음은 이미 인간이 겪어온 역사 속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모든 사람에게 문제에 대한 사유를 요청하는 것은 다소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삶은 여전히 힘들고 고단하며, 바쁜 일상 속에서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문제 상황을 깊이 사유한다는 것은 부르주아나 할 수 있는 것이라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분노가 생산적인 정치과정으로 이어지기보다 단순히 소비되는 경향에 그치는 것은 단순히 개개인이 사유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직관적으로 생각해볼 때, 그것은 첫째, 정치과정으로써 분노의 배출구가 존재하지 않거나(우리가 크게 분노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치과정으로 반영되어 정책적 변화가 이루어진 적이 있었는가?), 존재하더라도 효과적으로 조직되지 못하기 때문이며, 둘 째, 윤리적 기준 자체가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윤리적 기준이란, 우리가 문제 상황을 맞닥 뜨렸을 때 우리가 기준으로 삼는 행동지침이다. 모 기사 댓글에서 본 충격적인 내용을 대충 요약하자면 "당신들이 돈을 못 버는 건 당신들이 게을러서 그렇지, 왜 국가와 사회 탓을 하느냐?"인데, 이런 식의 '나만 아니면 돼'라는 천박한 사고가 윤리적 기준으로 작동하는 사회는 그야말로 끔찍한 사회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윤리적 기준은, 문제 상황에 대하여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 철학적 사유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질문한 그래서, 어쩌라고?”의 대답이다.


부조리에 대한 분노야말로 분명 사회를 바꾸는 근본적인 동력이지만, 그 분노가 '어떻게 해소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숙고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지금처럼 타인을 향해 자신의 충만한 분노를 발산하며 욕을 남발하는 소비적 행태는 그다지 올바른 방향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단지 그것은 "나는 저러지 않는다."라는, 자기 만족적 행위일 뿐, 그 분노를 효과적으로 해소하는 방법도 아니거니와 오히려 더욱 큰 분노의 대상을 찾게 만든다. 때로 이러한 분노가 엉뚱한 실체를 찾아 헤메게 되면 그것은 광기로 변한다. 그 광기에 희생된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가? '올바름'을 위한 분노가 아니라 '분노를 위한 분노'가 지배하는 사회란 얼마나 끔찍한가? 우리는 매일 부당함을 목격하고 분노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 ‘된장녀의 사례처럼, 단순히 욕을 하고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분노의 진정한 원인을 찾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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