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프레임(생각의 틀)을 얼마나 잘 따르고 있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왜 부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에 투표하는가를 설명합니다
[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방법- 홍세화]
소수가 대다수를 지배하는 방법은 2가지가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판명된 지배방법이다.
1. 80을 분열시킨다. 이를 이주노동자/내국인노동자(노노갈등), 여성/남성, 숙련노동자/비숙련노동자, 정규직/비정규직 등등으로 나누면 저희들끼리 분열하므로 단결되지 못한다. 이를 지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2. 80 스스로가 자기의 처지를 배반하게 만든다. 즉 80에 속하면서 20을 편들도록 의식화한다. 이는 학교교육이나 언론장악 등 현재 일반화된 체제의 틀로 가능하다.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
코끼리는 미국의 보수 '공화당'을 상징한다...
조지 레이코프에 따르면 프레임의 3대 요소는 가치관, 신념, 소망이고 인간은 이 3대 요소에 따라 각자의 프레임을 짠다. 인간은 이 프레임의 틀 안에서 정책을 지지하고 선거에서 투표한다. 인간은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이익에 따른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라 프레임에 따른 감정적인 비합리적 선택을 한다.
진실을 알면 사람들이 돌아설거라 믿지만 .프레임과 진실이 충돌할 때 사람들은 프레임을 바꾸지 않고 진실을 버린다.
보수와 진보간의 대립에서 거의 일방적인 보수의 승리는 미국에서 일어났고 또한 이슈가 되었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책 나온 시점에서>
이와 같은 아이러니한 상황에, 저자인 조지 레이코프는 '프레임'이라는 해법을 제시한다. 저자는 이러한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며, 정치적으로도 명쾌히 해명할 수 없는 국민들의 태도에 인지과학을 응용시킨 '프레임' 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 프레임의 개념
어떤 하나의 판단 규범이 된다는 것에 소위 '패러다임(paradigm)'과 유사하고, 또 무언가를 규정에 맞게 해석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와, 또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는 점에서 심리학의 '인지부조화'와 유사한 개념이다.
예를들면 촛불 집회'보다 '촛불 시위'라는 단어가 득세한다면,, 시위는 화염병, 폭력, 불법 등을 생각하게 할 것이고, 이는 평화, 질서 등에 심각히 위배되는 것처럼 생각될 것이며, 따라서 '촛불집회'자체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창출할 것이다
■ 보수진영의 '프레임' 언론 통해 확대재생산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프레임은 무엇이 있을까. 대표적인 것으로는 "부패는 참아도 무능은 참을 수 없다"는 말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프레임이 우리의 뇌리에 각인된 원인은 무엇일까.
조지 레이코프는 언론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조지 레이코프는 "보수주의적 프레임을 불러일으키는 구절을 계속해서 반복해 들려주고, 그런 식으로 쟁점을 정의하는 것은 우익이 오랫동안 써먹어온 전략"이라며 "이러한 반복을 거치면서 그들의 언어는 정상적인 일상용어가 되며,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사고방식이 된다"고 설명했다.
국내 상황에 접목해 보면 "노무현 정권은 아마추어 정권" "부패는 참아도 무능은 참을 수 없다" 이러한 프레임을 언론을 통해 자주 접하는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자리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특정정당이나 일부 보수 언론이 사용했던 '프레임'이지만 어느 순간 경쟁 정당 관계자들도 사용하고 있고 이는 굳건한 '프레임'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 상대의 프레임은 아예 언급하지도 마라!
이 책은 상대방의 프레임을 부정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 프레임이 강화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이후 미국의 진보 진영이 잇달아 보수 진영에게 패하고 있는 이유가 미국의 보수는 자신들의 정치적 가치와 정체성을 적절한 프레임에 넣는 반면 진보는 그러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보고 정치와 선거에서 프레임 형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예 1>
보수주의자는 '세금 인하'를 '세금 구제' 프레임으로, '상속세'를 '사망세' 프레임으로 재구성하여 '세금은 모든 납세자에게 고통을 주는 해로운 무기와 같은 것'이므로 반드시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통해 부시를 비롯한 보수파는 자신들은 영웅이며 세금 인하에 반대하는 진보주의자는 악당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데 성공하였다.
예2>
닉슨은 언론에 나와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라고 강변했다. 그런데 그가 사기꾼이 아니라고 주장할수록 유권자들은 그를 사기꾼으로 믿게 된다. 사기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 닉슨은 사기꾼이 돼 버렸고 어느 순간 대통령직을 그만두도록 내몰렸다.
■ 사실은 언제나 옳으므로 언제나 통할 것이라는 신화
계몽주의와 함께 탄생한 이 신화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존재이므로, 우리가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기만 하면 그들은 옳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라는 가정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인지과학에 따르면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개념들은 누가 사실을 알려 준다고 해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실을 접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 그것이 의미를 지니려면 그것은 우리 두뇌에 존재하는 시냅스와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실은 우리 머릿속으로 들어왔다가 그대로 밖으로 나간다. 그것은 우리 귀에 아예 안 들어오거나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당혹해 한다.
그러고는 그것이 비합리적이거나 미쳤거나 어리석은 것이라고 딱지를 붙여 버린다.
진보주의자들이 단순히 “보수주의자들에게 진실을 들이댔을 때”, 바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 보수주의자들이 그 사실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프레임을 지니지 않는 한, 이런 방법은 효과가 전혀 또는 거의 없다.
즉 조지 레이코프는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의 프레임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냥 보수주의자들이 어리석다고 생각해 버린다"며 "그들은 어리석지 않다. 똑똑하기 때문에 (선거에서) 이기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 대중들은 언제나 합리적인 행동을 할 것이라는 신화.
(그러므로 보다 자신들(서민들)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 정강 등을 지지할 것이라는 신화) <책 발췌>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 이익에 따라 투표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투표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투표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동일시하고 싶은 대상에게 투표합니다.
물론 그들은 자기 이익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이익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기의 정체성에 투표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정체성이 자기 이익과 일치한다면 두말할 것 없이 그쪽으로 투표할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주요합니다. 사람들이 언제나 단순히 자기 이익에 따라서 투표한다는 가정은 심각한 오해입니다.
■ 정치적 운동이 상업적 마케팅과 동일시하는 은유.<책 발췌>
은유에 따르면 후보자들은 상품이고 쟁점에 대한 후보자의 입장은 상품의 질이나 특성이 됩니다. 이러한 가정은 거에서 어떤 쟁점을 전면에 내세울지를 여론 조사를 통해 결정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자, 여기에 여러 쟁점들의 목록이 있습니다. 이 중 우리 후보의 편에서 가장 높은 지지를 받는 쟁점이 무엇인가 찾습니다. 만약 노인과 소외 계층을 위해 값싼 처방약을 수입하자는 공약이 78퍼센트로 가장 높은 지지도를 기록했다면, 처방약에 관한 정강을 전면에 내세워야 할 것입니다.
또한 쟁점에 해당하는 시장을 분할해서도 공략해야 합니다. 지역별로 가장 중요한 쟁점을 발굴하고, 해당 지역을 방문했을 때는 그 쟁점에 대해 집중적으로 언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생각만큼 잘 통하지 않습니다. 물론 가끔은 쓸모 있기도 하고, 사실 공화당은 그들의 전략에 이 방법을 가미해서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진짜 전략과 성공 요인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데올로기적인 신념을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 지지자들의 프레임을 이용하여 자기 지지자들을 향해 발언합니다.
[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책중에서]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1110199 1.
왜 행복하지 못하냐? 불확실한 미래때문입니다.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불확실한 것에 대해서 인간은 불안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미래에 대해서 불안하니까 앞날에 내가 어떻게 될까 대단히 불안하죠. 그래서 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히 만들기 위해서 지금 모두 다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이냐?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오늘을 저당 잡히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도 오늘에 진정으로 충실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내 삶에 진정으로 충실할 수 없을 때 어떻게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른 이를 위한 충실한 삶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이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불안 요인이 되고 있는 것. 즉 "아프면 어떻게 할까. 또 내 자신이 앞으로 커서 자식 교육이나 시킬 수 있을까?" 하는 누구나에게 부딪히는 그 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오늘을 살리기 위한 노력입니다. 이 문제가 바로 사회 보장 문제입니다. 내가 어떠한 상황이 되어도, 적어도 불확실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어도 자식 교육 문제, 의료문제, 기본적인 주거 문제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같이 공동으로 같이 극복할 수 있습니다.
같이 해결한 다음에 그 다음에 경쟁을 하든 뭐든 다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럴 때만이 '오늘을 충실하게 살 수 있는 것' 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점점 신자유주의 아래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오늘을 저당 잡히고 있습니다. 오늘의 내가 없는데 오늘을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2.
야당에서 이야기하는 것인데 아주 노골적이었죠. "부자에게는 세금을, 서민에게는 복지를", 20에게는 당신은 세금 좀 내, 그것으로 80 복지 좀 이루자, 이것 아닙니까? 대학 등록금 비싸고 참 괴롭습니다. 서민들 봉급 수준에 비춰 봤을 때 대학 등록금 엄청나죠. 또 서민들의 경우는 집안에 큰 병이나 날라치면 집안이 풍비박산 나죠. 그러면 자기의 처지에 비춰 볼 때 무상교육, 무상 의료 또 서민에게 복지를 부자에게는 세금을 그런 얘기가 나오면 귀가 솔깃해야 될 것 아닙니까? 관심 있게 듣고 가서 찍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죽어라고 안 찍어요. 그 없는 돈에 돈 다 내 가면서 가족이 병들었는데 어떻게 할 겁니까.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도 치료비 다 내 가면서. 자식 교육 안 시킬 수 있나요? 자식에게 "너는 나처럼 살면 안 돼" 그러면서 없는 돈에 사교육비 들여 가면서 그렇게 다 교육비 내 가면서 아무리 무상교육, 무상 의료 이야기를 해도 찍지 않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올까요. 내가 20에 속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가요? 물론 그 부분도 무시할 순 없죠. 그러나 그것보다는 80에 속하는 사람의 의식을 누가 통제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20을 포함한 이 모든 사람의 의식을 누가 통제하느냐? 어렸을 때부터 그 의식을 누가 형성하느냐? 무엇에 의하여 형성되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교육을 통해서죠. 그 교육 제도, 교육 내용, 교장 선출, 교사 임용, 학생 선발권 같은 교육의 모든 것을 누가 장악하고 있나요? 80이 갖고 있나요? 어림도 없지요. 20이 다 장악하고 있습니다. 국가권력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교육 과정은 교육을 통하여 지배 체제가 요구하는 의식을 갖도록 작용합니다. 왜냐하면 교육과정을 장악한 것은 민중이 아니라 국가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서 계층 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불평등한 구조를 어느 정도 좀 받아들이고, 나아가서 80에 속하지만 지금 내 자식이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조금만 열심히 하면 SKY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카이 아시죠? 결국 내 자식이 지금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공부만 열심히 하면 '하늘'에 간다. 그래서 계층 상승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럴려면 불평등이 있어야 좋은 거죠. 어쩌다 80의 일부가 20 쪽으로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문제는 80에 있다가 20에 간 사람들도 절대로 자기 출신 계층의 또는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와도 용은 개천을 절대 대변하지 않습니다. 그럼 해결책은 80에 속한 사람이 깨어냐야 합니다. 이 국가 권력에 의하여 형성한 의식을 지워야 합니다. 적어도 자기 처지에 맞는 의식을 갖도록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요즘 남미의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이야기할 때에 참 부럽습니다. 하나의 예만 들겠습니다. 남미는 대농장주에 의한 대토지 소유자가 있고, 거기에서 품삯을 받고 일하는 농업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작농과는 개념이 좀 다르죠. 우리의 소작농은 소출 중에서 일정 정도를 지주에게 바치지만 거기서는 품삯을 받고 일합니다.
소작농이든, 농장 노동자이든, 플랜테이션에 속한 농업 노동자이든 땅이 없는 설움을 받고 있는 점에서는 똑같죠. 땅 없는 설움을 받고 있는 농업 노동자에게 차베스나 모랄레스가 접근해서 하는 이야기는 간단했습니다. 아주 솔직해요. "나에게 표를 주세요." 옛날에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 게 새집 다오"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표를 다오, 땅을 줄 게. 너무 솔직한 거죠. 대대로 땅 없는 설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에게 표만 달라. 내가 대통령 되면 땅을 주겠다. 그러니까 땅 없는 설움을 갖고 있는 그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면 표를 안 줄 이유가 있겠어요? 그들의 처지에서는 당연히 표를 주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되니까 20명 단위로 협동조합을 만듭니다. 땅만 주는 것이 아니라 트렉터까지 줬습니다. 그게 정치죠.
그것하고 똑같은 구도예요. 말하자면 베네수엘라의 농업 노동자나 볼리비아의 농업 노동자들은 모랄레스나 차베스가 그런 얘기할 때 자기 처지에 맞게 표를 주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런 얘기하면, 자기 처지에서 요구하는 건데 "어 이거 무서운 사람들이네" 하고 생각합니다. 80에 속한 여러분이지만 제가 장담하건대 여러분의 의식은 20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언로라는 것이 그런 겁니다. 옛날에 지배 세력들이 문자를 가지고 있었고, 문자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을 장악했습니다. 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바로 생각을 장악할 수 있는 것이죠. 옛날에는 양반들이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양반들이 문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교육을 장악했을 때 그것이 곧 사람의 의식을 장악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