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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랑 일베가 바짝 긴장하는 올해 최고의 영화[BGM]
게시물ID : sisa_4540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동물의피
추천 : 23
조회수 : 1490회
댓글수 : 78개
등록시간 : 2013/11/20 10:10:50
 
냉정과 열정 사이 OST - What A Coincidence  
 
 
 
 
 
 
 
 
 
 
[출처]엽기 혹은 진실..(연예인 과거사진)
http://cafe.daum.net/truepicture/4NBJ/112033
글쓴이:깔창껴도호빗 님
 
 
 
 
 
 
 
 
 
새 이미지 1.jpg
 
 
 
 

올해 본 최고의 시나리오라는 찬사와 함께 민감한 소재라며

많은 배우들이 거절해서 엎어졌었음.

(작가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나중에 거절했던 배우들 다 기억난다고 할정도)



하지만 송강호가 캐스팅 확정되면서 스탭들도 형성되고 투자도 받으며 엎어진 영화를 일으켜세움.

송강호도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영화를 찍고싶었다고 함.

새 이미지 2.jpg

예고편 http://www.youtube.com/watch?v=Zw2VXJ3SfOc&feature=player_embed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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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에게 부림사건이란?




1981년 9월 전두환 정권이 소위 '부림사건'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이것이 내 삶을 바꾸었던 바로 '그 사건'이다.

공안당국은 반국가단체를 만들어 정부 전복을 획책했다는 혐의로

이호철, 장상훈, 송병곤, 김재규, 노재열, 이상록, 고호석, 송세경, 설동일 등 부산지역 지식인과 교사, 대학생 22명을 구속했다.




그런데 이들이 실제로 한 일은 사회과학 책을 읽는 독서 모임을 하면서 자기들끼리 정부를 비판한 것이 전부였다.

구속자는 대부분 1979년 이홍록 변호사가 만들었던 부산양서조합 회원들이었다.

개업식 축하 모임, 돌잔치, 송년회를 한 것이 범죄 사실로 둔갑했고, 계엄법과 국가보안법, 집시법 위반 혐의가 적용되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이 사건에 손대게 되었다. 당시 부산에서 지속적으로 인권운동을 한 변호사는 이홍록, 김광일 두 분밖에 없었다.

그런데 검사가 김광일 변호사까지도 사건에 엮어 넣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변호를 맡을 수가 없었다.

손이 모자란다는 하소연을 듣고만 있을 수 없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변호를 맡게 된것이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일단 구치소로 피고인 접견을 갔다.

그런데 여기에서 상상치도 못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얼마나 고문을 받았는지 초췌한 몰골을 한 청년들은, 변호사인 내가 정보기관의 끄나풀이 아닌지 의심하는 기색이었다.

그들은 모두 영장 없이 체포되었고 짧게는 20일, 길게는 두달 넘게 불법 구금되어 있으면서 몽둥이찜질과 물고문을 당했다.

그들이 그렇게 학대 받는 동안 가족들은 딸 아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얼마나 맞았는지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발톱이 새까맣게 죽어있었다. 한 젊은이는 62일 동안 불법구금되어 있었다.

그 어머니는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시신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던

김주열을 생각하면서 아들의 시신이라도 찾겠다고 영도다리 아래부터 동래산성 풀밭까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헤매고 다녔다.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혹시 아들이 아닌지 가슴을 졸이며 뛰어갔다.

그 청년의 이름은 송병곤이었다.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졌다.

사실과 법리를 따지기도 전에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법정에서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변론을 하기가 어려웠다.

불법 구금과 고문으로 당사자와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처참한 고통을 거론하면서 공안기관의 불법행위를 폭로하고 비판했다.

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검사뿐만 아니라 판사도 표정이 일그러졌다. 법정 분위기가 험악했다.




다음날 보자고 해서 검사를 만났더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느냐고 나를 힐난하면서 협박했다.

"부산에서 변호사 한두 명 죽었다고 그게 뭐 대단한 일이 될 줄 아시오?" 나는 오기가 나서 법정에서 검사와 삿대질을 해 가며 싸웠다.

그 사건 수사를 지휘했던 부장검사는 후일 국회의원이 되었다.





내가 변론했던 청년들은 그 모진 고통을 받고서도 형형한 눈빛을 잃지 않았다.

어느 누구라 할 것 없이 학교 성적이 우수하고 부모님에게 효성이 지극한 청년들이었다.

변호사인 내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재판장은 피고인 전원에게 징역 3년, 5년, 7년씩 마구잡이 유죄 선고를 내렸다.

"그놈들 말하는 거 좀 보시오. 완전히 빨갱이들 아닙디까." 판사실에서 내게 이렇게 말했던 사람이었으니,

애초에 공정한 재판은 바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같은 사건으로 따로 재판을 받았던 한 사람은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항소심에서는 유죄로 둔갑해 버렸다.

부산 노동상담소 활동에서 시작해 청와대 국정상황실장까지 20년 동안 한결같이 나를 도우며 함께 일했던 이호철 씨였다.

그에게 1심 무죄를 선고했던 사람은 서석구 판사였다. 그는 이 일로 인해 진주로 좌천되었다가, 결국 사표를 내고 대구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출처 : <운명이다> 노무현 p77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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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더 재미있는 사실은







노무현을 세상밖으로 나오게 한


부림사건의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내렸던 판사가


바로 '황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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