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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음) 비가 되어 내리는 남편 - 4부 -
게시물ID : panic_455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숏다리코뿔소
추천 : 17
조회수 : 1325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3/04/12 00:44:30




친구 봉팔이가 집을 나선지 10분. 비가 내렸다.

그러기에 마누라가 “오늘 비온데.” 하는 말을 귀담아 들었어야지.
마눌님 말씀 황금 같은 줄 모르고, “그까짓 비 내려 봐야 얼마나 내릴라고.” 말대꾸를 했니.

이 자식아. 어깨가 다 젖는다. 봉팔아.

공중도덕이라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봉팔이는
아파트 단지를 나서며 부터 입에 담배를 물었다.

길을 지나는 처자마다 봉팔이의 몰상식함에 눈을 흘겼으나, 소용이 없었다.

입술에 그깟그깟 말버릇을 립밤처럼 바르고 다니는 놈답게,
지나는 사람들에게 코웃음을 치며 “그깟 담배 냄새 좀 맡았다고 유난 떨기는.” 하고
공중도덕을 개차반으로 만들어 놓았다.

남에 대한 예우라곤 쥐뿔도 없기에 농담 따먹기 할 친구로썬
일품이나, 상사 혹은 직장동료로선 폐품인 놈이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봉팔이를 되돌아보는 이유가 오롯이 담배연기 하나 만은 아니었다.

시커먼 점퍼에 시커먼 바지, 씨이커먼 운동화.

키가 190cm도 넘는 놈이 옷을 그 모양으로 입고 다니니,
훤한 대낮이라 하나, 오늘같이 비 내리는 어두침침한 날에는 소도둑놈이나
노상강도처럼 경계하고 싶은 인상이 들어서기 때문이었다.

무섭다는 이 완곡한 표현을 좀 더 직선적으로 풀어서 말하자면,
그렇다. 인상이 더럽기 때문이다. 더럽게 더럽기 때문이다.

이 강도 같은 놈의 발길이 멈춘 곳은 역시나,
시내의 은행. 이 놈시끼 역시 은행을 털어버릴 작정인가?

강도새끼 다운 외모와는 달리 봉팔이는 ATM 기기 앞에서
1500원짜리 소시지 같은 두툼한 손가락으로 비좁고 여리여리한
강화유리 ATM기 화면을 터치했다.

그리곤 ATM에 비치 된 돈 봉투에 후후 담배 입김을 토해내더니,
봉투 속으로 일만 원 권 돈뭉치를 밀어 넣었다.

봉팔이가 은행을 나섰을 때는 비 줄기가 더 굵어만 가고 있었다.
은행 문 앞에서 어정거리던 봉팔이는 팔을 엮어 식어가는 몸을 달랬다.

그러길 1, 2 분여 봉팔이는 이내 “쯧, 에이!” 하고 이유모를 신경질을
내며 빗속으로 몸을 던졌다. 가슴에 품은 돈뭉치를 여민 손이 계속해서
빗물을 맞았다. 돈뭉치와는 또 다른 종이장이 품에 담겨 고이고이
봉팔이의 가슴에서 잠이 들어있었다.

“봉현씨 왜 일 이세요?”
“헤헤, 소은씨 오랜만이에요.”

진짜 그렇게 소도둑 노무새끼마냥 웃지 마라. 우리 마누라 놀랜다, 이!

“허! 어머, 봉현씨 왜 다 젖었어요?”
“밖에 비가 와서요. 하하.”

아니, 우리 마누라 말뜻은 왜 비가 오면 우산을 사야겠다, 생각을 할 줄 모르냐고 이 봉팔아.

흔히들 무덤까지 가져 갈 비밀이라고 말한다. 그 말이라 함은 봉팔 친구.
죽기 전엔 일설 입 밖에 담지 않겠다는 약조가 아니 덥니까. 이 들 떨어진 죽마고우새끼야.

“이 돈이 다 뭐에요?”

소은이가 돈 봉투를 방바닥에 올려두며 물었다.
돈뭉치는 얼추 봐도 백만 원, 딱 봐도 백만 원이었다.

“제가 일전에 카드빚이 좀 생긴 일이 있어서요.”
“있었는데요?”
“그때, 저희 집사람한테 비밀로 하고 싶어서. 이놈한테 돈을 잠깐 빌렸었어요. 염치도 없죠. 녀석 떠난 지도 한참인데. 돌려드리는 게 늦었네요.”

소은이가 돈 봉투를 물끄럼 내려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디에서 백만 원이 비었었던가, 계산기를 두드리는 듯싶었다.

그나저나 봉팔이 넌 언제 무덤에 들어가 봤다고,
무덤가지 가져 갈 비밀을 이리도 쉽게 떠들고 있니? 봉팔아.

“몰랐네요. 정말로.”

소은이는 돈 봉투를 봉팔이 앞으로 슬쩍 밀었다.

종이봉투가 슬슬 끌리는 소리가 빗소리와
적막만이 가득한 거실 공기에 미미한 상처를 내고 있었다.

“갚지 않으셔도 되요. 그냥 그이가 빌려준 채로, 괜찮아요.”
“아니요. 오늘 녀석한테 줘야 할 건, 전부 다 가지고 왔습니다. 받아 주셔야 해요. 아니면 저 못 돌아갑니다.”

소은이는 베란다를 내다보았다.

활짝 열린 창으로 거센 비가 몰아쳤지만, 개의치 않은 듯 눈만 꿈뻑거릴 뿐이었다.

소은이는 금방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잘 다려 진 정장을 맵시 나게 차려 입고, 현관에는 우비를 걸어 두었다.

봉팔이는 말없는 아내 때문에 멋쩍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거실에는 아직 내 사진이 걸린 액자가 그대로였다.

봉팔이는 먼지 한 점 앉아있지 않는 액자를 따라
내가 총각시절부터 쓰던 TV, 선반, 책꽂이 따위를 차례로 훑었다.

“하하, 조금만 기다리면 녀석이 퇴근하고 돌아올 것만 같네요.”
“왜요?”
“집이 그대로에요. 하나도 바뀌질 않았네요.”

소은이는 힘없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적막이 무게를 더하며 거실바닥으로 스멀스멀 흘러내렸다.
그 공기에 숨이 막혀왔을까. 봉팔이는 “후~.” 하고 한숨을 길게 뽑아내며 말을 이어갔다.

“얼마 전에 집사람 다녀갔다고 들었어요.”

봉팔이에겐 집사람이겠으나, 소은이에겐 30년간을 알고 지낸 친동생이었다.

외모는 대충 비스무리하다는 소리를 듣는 법은 있어도,
사람 됨됨이가 닮았다는 소리는 들어 본 일이 없다.

얼마나 독한 말만 골라서 하는 여자인지.

“집사람. 집에 돌아와선, 한참을 울더라구요. 뭐라며 울었는지 짐작 하십니까?”
“얼굴은 괜찮았나요?”

소은이가 그날 처제의 뺨을 때렸었다.

어찌나 살벌하게 서로를 쏘아보는지, 아파트가 땅으로 꺼져 내려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이 들 정도였다. 나는 처제를 나무라지 않는다. 누구보다 소은이를 위해주는 것
또한 처제였다. “이제 죽은 사람 같은 건 잊어버리라니까!” 그 앙칼졌던 고함소리.

기억한다. 나는 처제를 응원마저 하고 있었다.

처제가 소은이 결혼반지를 빼앗아 베란다 밖으로 던져버리지만 안았어도,
어쩌면 처제가 그 냉랭한 승부를 승리로 이끌었을지 몰랐다.

기적처럼 베란다 난간에 튕겨 나온 결혼반지를 보고,
이성을 잃은 소은이는 처제의 뺨을 때렸다.

아마도 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동생에게 손 지검을 한 일은.

“그 놈이. 그 놈이 소은씨 데리고 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어떻게 하느냐고. 저한테 묻더라구요. 집사람이. 소은씨,
소은씨 정말 그 놈이 비가 되어서 돌아오면, 그래서 만나신다면 어쩌실 생각이세요?”
“봉현씨도 그 이야기 아시나 봐요?”
“알다마다요.”
“그럼, 이해가 빠르시겠네요. 그이는 산에 가서 묻혔잖아요.”
“그럼 왜 이렇게 기다리고 계세요. 강물에 수장한 것도 아닌데, 비가 되어 돌아오겠습니까? 저렇게 비도 들이치는데, 베란다 문을 다 열어두고.”

봉팔이가 베란다로 들이치는 비바람에 맞서며 창문을 닫으려 들자, 아내가 말렸다.

“그냥 두세요. 부탁드릴게요.”
“소은씨. 잘 생각해보세요.”

봉팔이는 결국 창을 닫지 못하고, 소은이에게 돌아섰다.

“잘 생각해보세요. 그이는 평소보다 조금 늦는 거 에요. 그이 무덤가로도 분명 수 십 수 백 번은 비가 왔을 거 에요. 남편은 그 빗물을 타고 산골자기로, 시냇물로, 강물로 언젠가 바다를 지나 비가 되어서 저에게 올 거 에요.”

처제가 함께였다면, “돌아오긴 개뿔이!” 하고 맞서줬을 텐데.
봉팔이는 망연자실 소은이를 내려다만 보고 있었다.

한 번 흐느낌 없이 소은이의 뺨을 타고 눈물이 굵직한 선을 그었다.
나는 그 순간 아내의 뺨에 내리는 하염없는 빗물과 함께, 멈추지 않는 그리움이 되어 흘렀다.



- 4부 끝 5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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