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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무제(無題)
게시물ID : readers_45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河伯之後◀
추천 : 2
조회수 : 41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01 22:06:53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머리와 어깨에 쌓인 눈의 양으로 보아 적게 잡아도 대여섯 시간은 그렇게 서 있었음이 분명함에도,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바로 옆까지 다가와 있었음에도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듯하였다.

 

「아직도 기다리는 거야?」

 

 긴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자, 그녀는 비로소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와 잠깐 눈을 마주쳤을 뿐, 이내 아무 말도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뿌옇게 내리는 눈 때문에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그저 뚫어져라 지평선 너머를 바라볼 뿐이었다. 무거운 침묵. 그는 한숨을 깊게 내어 쉬고는 발길을 돌렸다.

 

 

 다음 날도 눈은 그치지 않았다. 그녀 역시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어제부터 집에도 가지 않고 계속 기다린 것인지 아니면 아침 일찍부터 다시 나와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미 두 뺨은 창백하게 얼어 있었다.

 

「그만하고 돌아가자.」

 

 그가 무겁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돌아보지 조차 않았다. 그저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묵묵히 앞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그녀의 팔을 붙들어 흔들어 보았으나 그녀는 그에게 응하려고도, 그렇다고 그를 뿌리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앙다문 입술과 꼭 쥔 주먹으로 그에게 무언의 대답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다시 무어라 말을 해보려 했으나, 그 모습에 결국 그 말을 삼켜야만 했다. 아마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으리라는 것을 그 자신도 알 수 있었다. 또 다시 침묵. 그는 조금 더 머뭇거려보려 했으나, 결국 그녀를 남겨두고 돌아서서 무거운 발길을 떼었다.

 

 

 이제는 바람도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혹독해지는 날씨에 그녀가 포기하기를 기대해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서 있었다. 계속해서 맞은 눈으로 옷은 젖어 들어가 있었고, 긴 머리카락은 바람에 흩날려 이미 산발이었다. 그는 문득 화가 났다. 왜 그녀가 그렇게까지 기다리는 건지,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미련하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기다리는 거야?」

 

 그녀가 대답하리라 기대하지도 않으면서, 그는 곱씹듯이 내 뱉었다. 딱히 대답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무어라도 말하지 않으면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돌아오리라는 보장은 있는 거야?」

 

 그녀는 역시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무어라도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돌아올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고,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것이 언제가 될 지는 기약조차 없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오직 그녀만이, 도대체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바보처럼 계속 기다리려 하고 있을 뿐이었다. 답답함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먹먹함을 토해내야만 했다.

 

「넌 바보야? 대체 왜 기약도 보장도 없는 일에 매달리는 거지? 다들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모르겠어? 미련한 짓은 그만 하고 이제 포기-」

「돌아올 거예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몸은 추위에 조금씩 떨리고 있었으나, 그녀의 목소리만은 떨리지 않았다. 그는 순간 그녀가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지, 아니면 예상대로 조금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고집스러운 대답에 실망해야 하는지가 헷갈려 다음으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잠깐의 침묵.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돌아올 거예요. 반드시.」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다시 긴 침묵에 빠졌다.

 

 

 눈발과 바람은 더욱 휘몰아쳤다. 오늘에야말로 그녀를 데리고 오겠다고, 그는 굳게 생각했다. 그녀가 계속 저항한다면 강제로라도 끌고 올 심산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 곳에 있었다.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고,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핏기조차 없었다. 앙다문 입술 사이로 뭉쳐 나오는 입김만이 그녀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려줄 따름이었다. 그가 더욱 마음을 굳히며 입을 열려 하는 찰나, 그녀가 여전히 정면을 응시한 채 먼저 입술을 떼었다.

 

「돌아올 거예요.」

 

 남자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리도 굳게 마음을 먹고 왔건만, 정작 그녀의 짧은 말 한 마디에 담긴 무게감에 그는 짓눌리고 말았다. 그저 단순한 고집 이상의 무언가가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돌아올 거예요. 반드시.」

 

 그는, 처음으로, 그녀가 단지 미련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불어오던 바람은 멎었다. 눈발도 조금은 잦아들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그녀가 있는 곳을 향했다. 그녀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역시 그녀를 데리고 와야 할지, 아니면 이제 그녀를 놓아두는 것이 옳은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차라리 자신도 그녀와 함께 서서 기다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눈을 밟아 나갔다.

 

 그녀는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서 있지 않았다. 그녀는 눈 속에 털썩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그리고 웃고 있었다.

 

「돌아왔어요.」

 

 그가 그녀를 일으키려 하자, 그녀가 말했다.

 

「돌아왔다고?」

 

 그는 망연하게 대답했다.

 

「네. 돌아왔어요. 지금은 다시 떠났지만요.」

 

 그는 순간, 그녀가 기다림과 추위에 지쳐 결국 환상을 보는 것은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용하면서도 행복감에 젖은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에, 이내 그 생각을 잊고 말았다. 그녀는 살며시 눈물을 흘리면서 미소 지었다. 그는 아무런 생각도, 말도 하지 못한 채 힘없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한시도 시선을 떼지 못했던 그 방향. 뿌옇게 흩날리는 눈발로 인해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일순간 저 멀리 지평선 저 너머로 사라지는 그림자가 보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발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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