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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민주화 운동에 '부채감'.. 노동자들을 배신하지 않겠다"
게시물ID : sisa_4567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機巧少女
추천 : 2
조회수 : 49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1/29 21:52:17
출처 : http://media.daum.net/society/people/newsview?newsid=20131129210807457

권영국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노동위원장


"국가는 국민입니다." 다음달 개봉되는 영화 < 변호인 > 의 예고편에 나오는 대사다. 영화는 1980년대 노동·인권 변호사로 살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델로 해 만들어졌다. 엄혹했던 과거가 배경이지만, '국민을 국가로' 알고 노동 현장에서 희망일기를 써가려는 변호인의 맥은 지금도 여기저기서 이어지고 있다.

권영국 변호사(52)가 그렇다. 그는 2002년 민주노총에 법률원을 만들었고, 2008년부터 최장수 기록을 세우며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노동위원장을 맡고 있다. '권영국이 몇 명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노동자 집회와 기자회견에 그는 단골멤버로 나선다. 때로 경찰과 싸우다 연행되기도 하고, 연단에 오르면 노동자들보다 더 절박한 목소리로 "전사로 앞장서 싸우겠다"고 외치는 사람이다.

지난 26일 저녁 권 변호사가 대표로 있는 서울 서초동 해우법률사무소를 찾았다. 넓지 않은 사무실에는 박스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삼성전자서비스 자료1' '전교조' '근로기준법 위반 고발'…. 파일마다 낯익은 단어들이 박혀 있었다.

▲ 노동 현장엔 항상 그가 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처럼.
때로는 경찰과 싸우고 연행이 되기도 하지만 향후 계획은 '지금처럼 사는 것'

■ 공장 노동자 출신, 현장 이해하는 데 도움

권 변호사는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해고와 구속을 겪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선수 출신 코치들이 흔히 그렇듯이 "현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인터뷰는 3시간 넘게 이어졌다. 화두는 "배신하지 않겠다"였다.

"예전에 한 노동자가 제게 그랬어요. '우리는 고졸이고 당신은 대학 나온 사람 아니냐. 상황이 불리해지면 당신은 얼마든지 다른 데 갈 수 있다. 떠나면 그만인 당신을 어떻게 믿고 따르겠느냐'고 말이죠. 그때 '내가 먼저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가라고 밀어내지 않는 한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했죠. 그 약속으로 지금껏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향후 계획은 "그냥 지금처럼 사는 것"이라고 했다. 변호사 자격증에 걸맞지 않은 벌이에도 매일 밤늦게 퇴근하고 주말엔 집회를 쫓아다니는 고단한 삶, 그대로 사는 게 꿈이라고 했다. 그와의 대화도 바쁜 일상으로 시작됐다.

- 웬만한 노동 현안에 빠지지 않고 이름이 등장한다. 어떤 일들을 맡고 있나.

"삼성전자서비스 불법고용 근절 대책위와 최종범 열사 대책위, 삼성노동인권지킴이 등 삼성과 관련된 일들은 대부분 관여하고 있다. 쌍용차와 이마트 문제, KTX 민영화 반대 등에도 참여하고 있다. 맡고 있는 사건은 40~50건 정도 된다."

- 여러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한꺼번에 안고 있는 것 같다. 힘들지 않나.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생기면 가끔 사무실 소파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녁 9시 이후, 늦으면 11시가 넘어야 퇴근하는 것 같다. 과부하를 느낄 때가 있긴 하다. 특히 요즘은 토요일에 집회를 많이 하다보니까 쉴 틈이 없다. 또 월요일에 해결해야 할 일들이 부담이 돼 누르니까 주말에 제대로 쉬는 것 같지가 않다. 등산을 좋아하는데, 그것도 요즘은 잘 못 가고 있다."

- 어릴 때부터 반골 기질이 있었나.

"전혀 그렇지 않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교과서와 선생님 말씀이 모두 옳고 의심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규칙이나 선생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포항제철공고에 들어갔다. 대부분 졸업 후 포철에 들어가는 코스였다. 그런데 어린 마음에도 생활 전선에 뛰어들기 전에 세상을 좀 더 알아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학교 수업은 취업 위주로 이뤄지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을 직접 찾아가서 진학반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교장 선생님은 흔쾌히 받아들여주셨는데 교무과장 선생님한테는 1시간 이상 엄청나게 혼났다. '어디 겁도 없이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느냐'고. 어쨌든 그런 과정을 거쳐서 1981년 서울대 금속공학과에 입학했는데 포철공고 개교 이래 두 번째 서울대 합격이라고 들었다. 학교에서는 좀 난리가 났었다(웃음)."

■ 저렇게 피 흘리면서 외쳐대는 얘기가 뭘까


- 그럼 지금 가치관의 뿌리는 대학 생활에 있을 것 같다.

"시위가 많을 때였다. 입학 전 내 머릿속에는 '공부하기 싫어서 농땡이 부리는 놈들'이라는 어른들의 얘기가 각인돼 있었다. 좋게 보지 않았다. 4월19일 즈음한 어느 봄날이었다. '빠바방' 하는 최루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처음으로 학내 시위를 접했다. 그냥 궁금한 마음에 데모 현장으로 뛰어갔다. 청재킷을 입은 5명의 경찰이 한 남학생을 끌고가는 모습과 맞닥뜨렸다. 허리가 90도로 꺾였고 얼굴을 맞아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살인마 전두환을 처단하자'고 외치더라. 경찰들의 주먹 세례와 입을 막으려는 손을 피해가면서 필사적이었다. 그때 갑자기 모든 게 정지된 느낌이었다. 그 자리에서 한 시간은 서 있었던 같다. 너무나 큰 충격이었고, 모든 것이 뒤집어지는 느낌이었다. '저렇게 피흘리면서 외쳐대는 저 얘기가 뭐지. 이건 아니구나.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것들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들을 했다."

- 그 이후로 운동권에 뛰어든 것인가.

"충격은 받았지만 그렇다고 투사가 된 건 아니다(웃음). 솔직히 말하면 두려움이 있었다. 그때 시위에 참여하면 엄청나게 두드려맞고 심지어는 강제 징집을 당하기도 했으니까. 입학한 해 10월에서야 시위에 참여했다. 그것도 지하서클에 가입하는 것은 엄두를 못 내고 고향 선후배 모임이나 가톨릭청년회를 통해서였다. 감히 시위를 주도하지는 못했지만 참여는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두 차례 구류를 살기도 했다. 무슨 국제 행사가 있다고 해서 경찰서 유치장도 아니고 체육관 같은 곳에 수백명이 함께 1주일간 갇혀 있기도 했다. 무법천지였다."

- 졸업 후 풍산금속에 취업했다가 해고를 당했다. 노동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가 광산에서 일하셨는데 안정적 수입이 없었다. 동생 2명의 학비를 대야 했다. 장남으로서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대학 다닐 때 야학과 공활(공장활동)을 하면서 노동법 책을 조금 읽은 정도였다.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나와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고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노조 설립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관리부장을 불러와서 얘기를 들어보자'는 말을 하더라. 그때 나섰다. '무슨 말이냐, 노조는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설립하는 건데 왜 관리부장을 부르냐'고 했다. 지극히 상식적인 일인데도 사람들은 내 말을 생소해했다. 그 후에 민주 노조를 세우기 위한 활동을 했다. 틈틈이 대학 때 배운 투쟁가도 가르치게 되더라. 시위하면서도 맨날 뽕짝만 부르니까(웃음)."

- 대학 때 가졌던 생각을 뒤늦게나마 실천하자는 의도였나.

"솔직히 마음 한쪽에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끌려간 친구들도 많은데 나 혼자 취업해서 잘 먹고 잘 살아도 되나 하는 부채감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공장활동을 했는데 공장장이 '순진한 현장 근로자들 꼬드겨서 의식화시키는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 결국 경주 안강 공장으로 전보 발령을 받았다."

- 옮겨간 공장에서는 어땠나.

"8명이 함께 노조 설립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의 가방을 회사 측이 뒤졌다. < 전태일 평전 > 도 나오고 일지 형태로 노조 준비 과정을 빼곡히 적어놓은 게 발각됐다. 1년도 못 채우고 또 쫓겨났다. 이번에는 충남 태안에 있는 포탄 시험장이었다. 공장도 아니고 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유배를 간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모든 끈이 다 끊어진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안강 공장에서 폭발 사고로 한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휴가를 내서 여기저기 벽보를 붙였다. 그 일로 해고됐다. 잊어먹지 않는다. 1988년 8월8일이었다. 복직 투쟁과 파업을 벌이다가 이듬해 구속돼 1년6개월을 살았다. 출소 후에 노조활동을 하다가 또 6개월 수배를 당하고 2년의 구속을 겪었다. 노조활동을 한 것은 몇 개월밖에 되지 않는데, 꼬박 4년을 수배와 구속된 상태로 살았다."

- 그래서 억울한 마음에 노동자들을 위한 변호사가 되자고 결심한 건가.

"아니다. 2년 정도 복직 투쟁을 해봤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때 한 선배는 함께 사시 공부를 하자고 했고, 처남은 같이 사업을 하자고 했다. 어차피 취업이 안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당시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 사찰을 폭로했는데 내가 330번대에 있었다. 사업보다는 공부가 맞았지만 가족들의 생계가 걱정이었다. 아내가 '내가 회사 다닐 테니까, 딱 3년만 해보자'고 하더라. 공대 출신이 뒤늦게 사시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없어서 주위에 공부한다고 말도 안 했다. 그런데, 결국 3년 만에 합격했다."

■ 연수원 있을 때 유명 법률사무소에서 연락


- 살기 위해서 택한 길이었다. 평범한 변호사로서의 삶을 꿈꾸지 않았나.

"사법연수원에 있을 때 유명한 법률사무소에 들어가기로 얘기가 됐다. 버스를 타고 확정을 지으러 그 법률사무소에 가는 길이었다. 고향 후배이자 사시로는 선배인 권두섭 변호사가 전화를 해 만나자고 했다. '형, 우리 이거 같이 만들면 어때'라면서 '민주노총 법률원 설립안'이라고 적힌 자료를 주더라. 1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해서 결정했다. 아내와는 3주 정도 냉전을 벌였다. 결국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주더라."

- 3년간 민주노총 초대 법률원장을 맡았다. 부채감은 좀 해결됐나.

"정말 치열하게 했다. 2002년 발전노조가 파업했던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공동 파업했던 가스와 철도는 하루 이틀 만에 모두 철회했는데 발전노조는 38일간 파업했다. 정부는 언제 발전소가 멈출지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해했고 조합원을 보는 대로 잡아들였다. 매일 아침 법률원에 출근하면 책상에 그날그날 전국에서 연행된 사람들의 명단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물리적으로 모두 찾아다니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전화 접견을 시도했다. 한 군데도 빠뜨리지 않았다. 전화해서 묵비권을 비롯한 피의자 권리를 알려주고 경찰의 업무복귀서 강요에 응할 필요도 없다는 지침을 내려줬다. 한마디로 '쫄지 마라'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한 명의 조합원도 실형을 받지 않았고 손해배상 소송도 기각됐다. 발전노조에서는 유명인이 됐다(웃음)."

- 그 이후에도 민변 노동위원장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2008년 이후 두 차례 연임해서 지금껏 맡고 있다. 최장기 노동위원장이 됐다. 내년까지인데, 그 다음엔 안 해야지. 너무 장기 집권했다(웃음). 노동위원장이 좀 거친 일이다. 경찰과 불가피하게 맞닥뜨려야 하는 일도 많다. 나는 이 역할에 물러서지 않겠다는 생각이고 노조 할 때 경험이 도움이 된다. 경험이 없으면 낯설고 감이 잘 안 잡힐 수 있다. 사실 변호사들이 현장에 가는 것을 좀 꺼리는 경향이 있다. 재판을 준비하는 정적인 활동을 하다가 몇 시간씩 집회에 다녀오면 흐름이 깨질 수도 있다. 나는 그냥 부르면 간다. 불렀는데 안 가면 힘이 빠질 수 있으니까. 변호사도 공감하고 지지한다고 하면 힘이 되지 않겠나. 무엇보다 현장을 잘 알아야 노동 변호사로서 역할과 방향성을 잃지 않는다고 본다."

- 최근 삼성전자서비스 최종범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소식을 처음 듣고 입에서 '아' 하는 소리가 났다. 내가 하고 있는 게 도대체 뭘까. 어떤 식으로 기여를 하고 있는 건가. 그런 순간에는 정말 의미 없는 것을 허공에 대고 하는 것은 아닌지, 뭔가 한다고 폼 잡고 다니지만 헛발질만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바닥이 드러날 때는…."

■ 사람이 절망이고 희망이다


- '변호인' 권영국을 끌어온 것은 무엇인가.

"안강 공장에서 했던 약속이 크다. 배신감을 주고 싶지 않다. 변호사가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하면 그 의미는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당장 잘 익은 감을 얻어내는 것보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얼마나 넓히느냐가 중요하다. 노조 위원장이 상여금 500% 따내는 대신 노조의 중요한 권리를 내줬다면 그건 배신이다. 사람이 절망이고 또 한편으로 희망이다."

- '변호인' 노무현에 대한 기억은.

"1987년 노동자투쟁 할 때 현대중공업에 강연하러 온 모습을 기억한다. 그때 6월항쟁을 이끈 주역 중 한 명으로 유명했다. 이렇게 말하더라. '여러분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에 있는 분들입니다. 악법은 어겨서 고치는 것입니다. 깨뜨려서 고치는 것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맞서 싸우라는 메시지가 강렬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후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폈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 박근혜 대통령은 어떻게 평가하나.

"독재자다. 본인 말만 한다. 전체주의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하나의 가치와 이념을 강제하고 반대세력의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비판하면 종북으로 몰아버리는 분위기가 극대화돼 있다. 전국공무원노조를 압수수색한 것이 대표적이다. 불리한 뭔가가 있으면 그냥 두지를 않는다. 찍어내려고 한다. 구체적 혐의도 없이 뭔가 걸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압수수색을 단행한다. 고위 공무원이나 재벌을 대상으로 한동안 열심히 고발을 해봤는데 세월만 보내고 수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반면 정권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단체는 고발하면 즉시 수사한다. 제대로 된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앞으로 계획은.

"특별히 없다. 문제가 있는 노동 현장에 갈 것이고 재판이든 현장의 실천활동이든 변호사로서 할 수 있는 것을 다하겠다."

- 존경하는 인물이 있나.

"이순신 장군과 과학자 뢴트겐을 좋아한다. 뢴트겐은 배고프게 살면서도 과학적 성취를 위해 살았고, 이순신 장군은 심지어는 죽음 앞에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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