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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소설 - 눈 내리는 날
게시물ID : readers_45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레트리안
추천 : 2
조회수 : 14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01 22:13:28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 모습이 너무도 정겹고 아름다웠기에, 나는 잠시 동안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차가운 돌에 몸을 기댄 채로 겨울을 맞이하다가, 내가 왔음을 알아차리곤 손을 흔들었다. 나는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손을 빼서 그녀에게 마주 흔들며 다가갔다.


 “안녕?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자리를 내주었다. 이렇게 환하게 웃고 있긴 하지만 굳이 대답치 않는 걸 보면 많이 삐진 모양이다. 하긴, 이렇게 차가운 겨울에 한참을 홀로 기다리게 했으니.. 나 같아도 이런 개념 없는 상대에게 화를 냈을 것이다. 미안한 마음에 괜히 머뭇거리다 메고 있는 목도리를 풀어 단단히 메어주었다.


 “오래 기다렸지? 미안해. 그러니까 화 풀어.”


 그녀는 빙긋이 미소 지을 뿐,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이런 싸구려 목도리 하나로 쉽게 용서받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애써 상심하지 않으며 말을 걸었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옛날 생각난다. 그치?”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시작한 이야기였지만, 그 말은 정말로 날 옛날로 끌어갔다.


 한창 철없이 굴었던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처음으로 등교했을 때, 일학년 교실에서 나는 그녀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녀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에겐 아닐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나에겐 그렇게 보였다. 어딘가 어수선하고 낯선 교실의 분위기도 그녀의 존재감을 덮을 순 없었다. 그렇다. 난 그 때 첫 눈에 반했던 것이다.


 하지만 철부지 꼬맹이가 하루아침 만에 어른이 될 순 없었다. 나는 방법을 몰랐기에, 감히 어찌해야 할지 방법을 몰라 머뭇거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일 년간 지켜본 그녀는 겨울 같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피부는 이 계절처럼 하얀 색이었고, 눈빛은 가까이 다가오는 모든 것을 모두 얼려버릴 듯 차가워 보였다. 서툰 내 감정은 지레 겁을 먹곤 고개를 돌렸다.


 이학년이 되면서 그녀와 다른 반이 되었다. 나 홀로 쌓았던 감정들을 어찌 해야 할지 손에 든 채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쌓이는 시간으로 그녀를 덮어 버렸다. 그렇게 다시 일 년이 지나 나는 삼학년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학년이 바뀔 때 마다 친했던 친구들과 반이 갈려서, 나는 거의 처음부터 친구를 사귀어야 했다. 낮선 사람들로 가득 찬 교실에서 나는 꼭꼭 묻어두려 했던 그녀를 발견했다. 그리고 겨우 그 몇 초 동안, 그녀는 일 년을 공들여 묻어 놓았던 시간을 파헤쳐 꽁꽁 처박혀 있던 감정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어린 아이였다. 머뭇거리는 것 외엔 다른 표현법을 모르는 나였기에, 나는 앞으로 남은 시간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나에게 그녀는 먼저 다가왔다. 그녀도 마침 친한 친구들과 반이 갈린 참이라며, 다시 같은 반이 되어 반갑다고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나는 운명을 믿게 되었다.


 가까이 지내며 다시 바라본 그녀는, 여전히 겨울 같은 사람이었다. 여전히 아름다우며, 투명하고, 그러면서도 고독하여, 항상 곁에 있으며 온기를 나누고 싶단 생각이 들게 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알아차리면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는 겨울처럼, 내 마음에 가득 들어와 있었다.


 우리는 일 년 동안 수능이라는 괴물에 정신없이 쫓겨 다니느라 대단한 추억을 만들진 못했지만, 소소하게 쌓인 기억들은 충분히 아름다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함께 공부를 하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새벽에 뜬 달을 보며 등교하고, 함께 까만 하늘에 뜬 별을 보며 하교 하고.. 그렇게 남들이 보기엔 별거 아닐 모습들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흔적으로 남았다.


 그렇게 또 한 번 일 년이 지났다. 그녀는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여 진학이 결정되었고, 나는 재수를 결정했다. 그리고 나는 진학 보다 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여태껏 쌓아온 소중한 기억을 그대로 품고 갈지, 아니면 내 감정에 솔직해야 할지에 대해 결정해야 했던 것이다.


 내 머리는 소중한 기억을 그대로 품고 가기로 결정했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것도 충분히 귀중해서, 위험을 감수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행동을 결정한 것은, 내 마음이었다. 그 녀석은 멋대로 발을 움직여 그녀에게 향하게 했고, 멋대로 입을 움직여 자신을 드러냈다.


 그 순간에도 그녀는 겨울 같았다. 모든 것을 품어 주는 겨울처럼 내 마음을 품어 주었다. 내 머리 조차도 그녀의 승낙을 이해할 수 없어서 훗날 이유에 대해 물었다. 겨울 같은 당신이 어떻게 날 받아준 거냐고.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겨울이라면 당신은 봄 같은 사람이니까요.


 이후로 그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내 재수가 끝나길 기다려 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로 떠나는 나를 다시 이 년 씩이나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우리가 사귄지 벌써 십 년이 다 되어 가네.”


 눈에서 흘러나와 뺨을 타고 내린 눈물이 땅으로 툭 떨어진다. 이번엔 울지 않으려 그렇게 다짐했건만, 이번에도 내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내 마음이었다. 그리움과 슬픔으로 가득 찬 마음은, 내 생각을 집어 삼키곤 날 멋대로 울게 만들었다.


 “미안. 이번엔 울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그녀에게 사과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내 옆에 서 있을 뿐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계절처럼 나에게 다가왔던 사랑은, 땅에 떨어진 눈처럼 그렇게 스러졌다. 이름도 모를 병에 걸린 그녀는 사나운 겨울처럼 가혹한 칼바람을 뿌리며 날 쫓아내려 했지만, 겨울이 사납다고 하여 봄이 물러날 순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녀의 곁에 끝까지 머물렀고, 그녀는 내 품에 안겨 숨을 거뒀다.


 그리고 벌써 삼 년이 지났다. 이를 악 물고 참아보려 하지만, 흐르는 눈물은 멈추질 않는다. 더 이상 자신을 생각하지 말라는 유언조차 지키고 있지 못한데, 기껏 찾아와서 이런 꼴사나운 모습까지 그녀에게 보이고 싶진 않았다. 눈을 꾹꾹 눌러 눈물을 빼내곤, 손을 뻗어 목도리를 고쳐 매어 줬다.


 “내년에도 찾아올 게.”


 그녀가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저 빙긋 웃으며 쌓인 눈을 털어주곤 걸음을 물렸다.


 “그럼 안녕. 잘 지내.”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움직여 천천히 멀어졌다. 그녀의 이름 석 자가 적힌 비석은 하얀 목도리를 두른 채로 눈을 맞으며 나를 배웅했다.


 아쉬움과 그리움을 꾹꾹 눌러 참으며 돌아가다가, 결국 터져 나온 감정에 떠밀려 다시금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하얀 겨울과 무척이나 어울렸던 그녀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렇게 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 눈 내리는 날,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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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라는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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