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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을 비판하는 시각과 그에대한 재반박.
게시물ID : history_747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아우렐리우스
추천 : 15
조회수 : 2774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3/02/04 16:58:56

광해에 대한 논쟁이 계속 되고 있네요 ㅎㅎ

 

광해군에 대한 옹호글. 그리고 반박글은 많이 보이지만,

그에 대한 재반박글은 보이지 않아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대부분이 여기저기서 퍼온거라서 내용이 조금 부실함을 이해해 주시길....

 

 

 

 

1. 광해군은 대동법의 적극적인 시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동법에서 광해군이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던것은 맞다.

하지만 이는 광해군의 지지세력인 북인이 방납으로인해 이익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지지세력들을 달래주느라라고 이해할수도 있다.

 

그렇지만 결국 대동법은 (경기도에서만 한정적이었지만) 광해군이었기에 시행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결국 광해군이 '선해청'을 설치하면서 대동법은 시행될 수 있었다.

기득권(양반, 지주)층이 극렬하게 반대한 대동법이 시행될 수 있었던것은, 어쨋든 광해군의 용단때문이다.

이처럼 광해군이 대동법을 시행할 수 있었던것은 임진왜란의 2년여 동안 '분조'를 통해서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특히, 동의보감을 통해서도 광해군의 민생회복에 대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선조의 어의였던 '허준'은, 선조의 죽음으로 귀양이나 죽어야 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죄를 모두 사면해주고, 광해군은 허준이 동의보감을 집필할 수 있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도성출입 허용, 내의원 도서 출입 허용 등)

이처럼 광해군이 동의보감 집필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것은 민생회복에 대한 의지때문이라고 해석이 가능하다.

 

 

 

2. 광해군시절, 경연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광해군의 지나친 독단성을 나타낸다

 

 

하지만......

 

광해군은 정통성이 크게 없는 왕이었다.

영창대군에게 정통성에서 밀리고,

임해군에게는 장자가 아니라는점에서 밀리는 등

광해군은 안팍으로 적이 무척 많았던 인물이다.

 

따라서, 신하들과의 경연을 피했던것은 이러한 점을 인식해야한다.

 

또 광해군이 경연을 피하기는 했지만,

연산군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것이 아니라

국방과 외교, 민생 등 자신이 직접 챙긴 부분도 상당히 많다.

 

 

3. 임진왜란 직후, 대규모 궁궐공사는 너무 무리수였고, 백성들의 피해가 심각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통해 조선의 왕의 권위는 엄청나게 떨어졌다.

 

경복궁은 불에타서 없어졌으며,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자 궁궐에서는 분노한 백성들에의한 약탈과 방화가 난무하는 등

'왕조국가'인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왕의 권위'가 실추되었으므로

왜란 때 실추된 왕의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조치이기도 했다.

 

처음에, 파주 교하 부근에 새로운 도성을 지으려고 했지만 결국 이를 취소하기도 했다.

따라서 광해군이 무턱대고 대규모 궁궐공사만을 쫓은 인물은 아니었다.

한양에서의 궁궐공사는 왜란에 의해 대부분이 타버렸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사안이기도 했다.

 

 

 

4. 실상은 중립외교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원칙이 없는 외교'일 뿐이다.

 

일례로, 심하전투에서 강홍립이 이끄는 1만3천명의 조선군 중 9000명은 전사하고, 나머지 4000명은 모두 포로로 잡힌다.

즉, 분명한 원칙도 없이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눈치만 살살보다가 어설픈 투항으로 조선군의 궤멸을 자초한 것이다.

(단, 다른 사서를 보면 9000명의 전사가 아니라 8000여명이 포로로 잡힌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광해군은 명나라의 3차례 출병요구를 모두 거절한다.

또 후금에게는 밀서를 보내기도 한다.

비록 명나라의 4번째 요청에 어쩔수 없이 파병했지만, 이를두고 원칙이 없는 외교라고 표현하기는 힘들다.

 

 

광해군은 처음부터 끝까지 '명'과 '청'의 싸움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중립외교를 펼쳐 왔으며,

비록 마지막에는 명나라와 사대부들의 요구로 출병요청을 들어주기는 하지만

3차례나 명의 파병요구를 거절했다는것은 명나라와의 '사대의 예'로 시작한 조선의 역사에서 이는 엄청난 외교이기도하며,

실제로 3차례의 출병요구를 모두 거절하는것에 성공하며 오히려 이 과정에서 명나라에대해 외교적 우위에 서있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중립외교로 눈치를 보던 중에 심하전투에서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궤멸한것은 사실이지만,

불과 몇년후 맹목적인 명나라와의 사대로 수십만명이 사망하거나 피해를 입은 '병자호란'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만일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끝까지 시행이 잘 되었다면,

병자호란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심하전투에서의 손실로 더이상의 조선의 피해는 없었을 것이다.

 

 

 

5. 광해군 재평가의 시초는, 일제강점기 시절 '이나바 이와키치'라는 식민사학자가 시초이다.

 

이나바라는 일본인학자가 광해군의 재평가를 제일 먼저 시작했다고해서,

'광해군의 재평가=식민사관' 이라고 매도하는것은 말도 안된다.

 

이것은 논리의 이탈이며 논의할 가치가 없는 항목이다.

 

 

 

6. 따라서, 광해군 15년 동안은 민생안정, 외교, 국방 등에서 어떠한 성과도 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끝난 세월일 뿐이다. 따라서, 인조반정은 당연한 숙명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답은 여러분이 알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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