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이별은 예정되어 있었다.
30대에 접어들면 누구나 결혼을 꿈꾸는 연애를 시작한다. 그들은 모두 합리적으로 가장 이상형에 가까우며 어느정도의 재산과 직업을 가진 완벽한 사람을 갈구한다. 그런 결혼은 옛날 중세시대의 집안과의 결합이 주는 합리성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오직 다른 것이라고는 자신이 선택한다는 점, 바로 그것이 로맨스라 불리우는 이유이다. 선택의 근거는 크게 다르지 않을지언정..
나 역시도 30에 접어들며 결혼을 꿈꿀 만한 모든 조건적으로 딱 맞는 여자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녀의 장점이자 단점은 나이차이가 좀 나는 어린 여자였다는 것이다. 다른 면에서는 완벽했다. 애교가 많았고 사치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기분좋게 만들줄 아는 사교성을 지녔고 공부도 잘해서 전문직을 선택했었다. 집안에 돈도 적당히 풍족했으며 무엇보다 사랑받고 자란 티가 많이 나는 마음에 쏙 드는 여자였다. 행복한 연애를 했다. 진심으로 그녀를 위했고, 여느 연애보다 더 진지한 마음으로 결혼을 생각하려 했었다.
연애는 동등해야 한다고 믿었다. 갑과 을이 없는 연애를 꿈꿨다. 하지만 현실은 늘 더 사랑하는 쪽이 을이 되었고, 그것은 내 연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봐도 예쁘고 조건좋은 여자는 사랑받는 것이 더 익숙했고 그에 맞춰 나는 사랑을 주는 것이 익숙했다. 필연적으로 사랑받는 쪽은 사랑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점점 나는 희생이 강요되는 연애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그때는 그게 희생인지도 몰랐다.
연애는 생각보다 뜨거움을 그녀에게 주지 못했으나 그런대로 뚝배기같이 진한 연애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1년, 정확히 1년 8개월 끝에 우리는 10분간의 전화한통으로 연애를 끝마쳤다. 마지막까지 행복하게 잘지내라는 쿨한 말을 전했지만 내 마음은 전혀 평온하지 않았다.
참 희안한 일이다. 서로 행복함을 전제로 연애를 시작하지만 서로의 행복은 늘 일치하지 않는다. 내가 결혼하여 주는 안정감에 대한 행복을 추구했다면, 그녀는 뜨거운 연애에 더 설레했다. 그 과정속에서 더 좋아하는 쪽은 끊임없이 상처받고 그 상처에 무뎌질때쯤 누가됐든 헤어짐을 말하게 된다. 그렇게 30대의 첫 번째 연애를 끝냈다.
결혼을 예정한다는 것이 부담이 되었으리라.. 그렇지만 나는 누구나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결혼적령기의 여성보다 내가 끌리고 좋아하는 로맨스를 꿈꿨지만 이제야 안다. 그 로맨스가 전혀 합리성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
그래도 돌이켜보았을때 잘했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마지막 지금 이순간에도 나는 그녀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좋아했다는 것. 그래서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