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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에 얽힌 전설
게시물ID : panic_459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ementist
추천 : 29
조회수 : 4785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3/04/19 07:55:25
허수아비란 명칭을 알아 보면 지방에 따라 여러가지 이름이 있다. 허새비, 허아비, 허지비, 허채비, 허생원 등으로 
불리워지고 있으며 한자로는 안산자라 한다. 정읍에서는 허수아비, 허새비로 불리고 있다. 그 허수아비의 역사가 
언제부터 이루어진지는 알기 어렵다. 오래된 풍습인 것만은 사실이다. 안산자란 말이 중국 전등록에 나타난 것을 감안한다면 진나라 때에 이 말이 이미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허수아비란 말은 허아비와 같은 말로서 '속이 빈 아비'란 뜻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한 전설에 의하면 허수아비는 사람의 이름 즉 허수라는 아이의 아버지라는 뜻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 허수아비의 전설을 이 자리에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먼 옛날에 한 중년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평소 가정과 사회 생활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가정에 먹구름이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내가 소생하기 어려운 큰 병을 얻었기 때문이다. 좋다고 하는 갖은 약을 써보았으나 병은 더 나빠져만 갔다. 드디어 아내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때, 그에겐 3살 먹은 딸 하나가 있었다. 그 딸의 이름이 허수였다. 이 딸을 두고 어머니는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그는 아내가 죽은 뒤 그 이듬 해에 후처를 맞아 들였다. 그런데 후처가 들어오면서 집안은 평탄할 날이 없었다. 후처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 무리하게 돈을 쓰고 ,물정도 모르고 인정도 없는 표독스런 여자였다. 허수는 계모 밑에서 자라게 되었으나 계모의 심한 구박은 견디기 어려웠다. 남편인 허수의 아버지도 후처의 손아귀에 들어 기를 펼 수가 없었다. 이 아버지는 계모 밑에서 모질고 서러운 대접을 받는 허수가 가엾게 생각되었다.
어느날 허수의 아버지는 허수를 버리기로 결심했다. 계모 밑에서 날마다 매를 맞으면서 지내는 허수를 차라리 쫒아내 버리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아버지는 허수를 데리고 깊은 산중에 들어갔다. 하늘만 빤히 보이는 첩첩산중이었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이어지는 해질 무렵이었다. 주위를 돌아 보아도 인기척 하나 없었다. 아버지는 허수를 그 깊은 골짜기에 버리고 도망쳐 나오고 말았다.
다섯 살먹은 허수는 아빠를 부르며 울고 있었다. 밤이 깊자 허수는 불빛을 발견했다. 그 불빛을 보면서 걷기 시작했다. 소리치며, 울면서, 쓰러지며 어린 허수는 불빛이 있는 곳 까짚갔던 것이다. 어는 큰 마을이었다. 허수는 동네에서 큰 대문집을 찾아 갔다. 동네에서 그 집은 가장 큰 부잣집이었다. 그 집에서는 허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 집엔 아들만 있고 딸이 없는 집안이어서 딸이 하나 생겼다며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허수는 그 집의 딸이 되어 자랐다.
 그 뒤 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허수의 아버지는 몸에 병이 들고 가정 형편은 너무나 가난했다. 하루 세끼 끓일 것이 없는 굶주림 속에 헤매야만 했다. 하다 못해 허수의 아버지는 길거리에서 밥을 얻어먹는 거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느날 이 거지는 깊은 산중에서 밥을 얻고 있었다. 큰 부잣집을 찾아 들었는데 순박하고 참한 처녀가 밥을 가지고 나와 많이 주는 것이었다. 거지는 귀중한 밥을 너무 많이씩 주기에 고마운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거지는 그 부잣집을 자주 들었다. 갈 때마다 그 처녀가 나와서 융숭하게 대접했다.
 거지가 된 허수의 아버지는 엣날 자기가 버린 허수가 생각났다. 밥을 얻을 때마다 그 처녀가 나오면 꼭 허수를 기억해 내곤 슬퍼했다. 하루는 또 밥을 얻는데 거지는 처녀에게 이름을 물었다. 처녀는 머뭇거리다가 자기의 이름을 허수라 했다. 거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딸의 이름과 같은 것이었다. 거지는 마음 속으로 이 처녀가 자기의 딸인 허수가 틀림없다고 확신햇다. 거지는 터져나오는 슬픔과 반가움을 함께 참으며 흔적없이 밥을 얻어 오곤했다. 옛날 버려졌던 허수는 그 부잣집에서 곱게 자라 벌서 혼기에 접어든 처녀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세자빈을 맞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임금이 세자빈의 자격을 제시했는데 각 고을에서 뽑힌 미인들을 모아 논의 새를 보게하여 나락을 가장 빨리지 않은 논에 해당하는 사람을 세자빈으로 맞는다는 것이었다. 즉 논의 새를 가장 잘 보는 미인을 뽑는다는 것이었다.
 허수는 미인이었다.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그 고을에서 제일가는 미인으로 뽑혀 세자빈을 뽑는 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세자빈을 뽑는 자리에는 각 고을에서 온 미인들이 모였다. 그 전날 미인마다 논 한 필지씩이 배당되어 논마다 이름이 붙었다. 이튿날 황금 들녁에서 논 한필지씩 배당을 받은 미인들은 수없이 날아드는 참새떼를 쫒기에 온 힘을 다했다. 논마다 참새들이 많이도 몰려와 앉았다. 그러나 허수가 보고 있는 논에는 새들이 접근을 못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정한 시간이 흐른 다음 어떤 논이 새에게 가장 빨리지 않았는가를 측정하는 심사가 있었다. 당연히 허수의 논이었다. 허수가 지킨 논에는 새의 침범이 한번도 없었느니 그는 드디어 세자빈으로 뽑히게 되었다. 허수는 너무나 기뻐 자기가 지킨 논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논 한가운데에 사람같이 생긴 것이 눈에 띄었다. 달려가본; 어느 거지가 남루한 옷을 걸친 채 죽어 있었다. 허수의 아버지였다. 딸이 미인으로 뽑혀 대회에 나갔다는 말을 듣고 허수의 아버지는 허수의 이름이 붙여진 논 한가운데에 앉아 딸을 위해 죽어갔던 것이다. 사람이 논 가운데에 죽어 있으니 참새떼들이 몰려왔다가 모두 도망친 것이 사실이었다. 죽은 사람이 허수의 아버지임이 판명되었을 때 자리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이를 슬퍼했다.
그 뒤 허수는 임금의 며느리로 들어가 미인으로서 덕망 있고 존경받는 세자빈이 되었다 한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사람들은 허수아비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논이나 밭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우고 있음을 많이 볼 수 있다.  
 
<출처: 김동필저, 정읍지방의 민속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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