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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하기 힘든 것과 마주쳤을 때의 심리에 대해서.
게시물ID : phil_459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락쉬만
추천 : 4
조회수 : 55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1/09 01:03:02

저는 아주 큰 편이라서 주로 이런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키가 몇 이세요?"

말하자면 상대방을 후킹하는 나의 외모의 제 1요소는 "키"입니다.

저는 수도 없이 이런 말을 들었기에 주저 없이 준비된 멘트 1번을 날립니다.

"1xx구요, 할머니가 좀 크세요. 아버지 어머니는 중키신데, 저나 형이나 큰 걸 보면 아무래도 할머님으로 부터 유전됐나 봐요

농구는 ~~~ 미식축구부도 ~~~ 어쩌구 저쩌구."

 

결국은 상대방이 기대하는 대답을 해주는 것이 좋은 인상을 남길 것이고,

안그래도 커서 무서운 놈이 단답형의 대답을 날리면 상대방은 주로 공포심을 느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에

처음에 말 틀때 평소대로 뭔가 치밀하게 관조하면서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나. 왜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할까."

요 모드를 잠시 꺼두고

일부러 수다쟁이가 됩니다.

막 늘어놓는 거죠.

 

그러면 "아 그렇구나. 어제 그 드라마 봤어요? 되게 재밋던데."

이렇게 대화가 넘어가죠.

그럼 다시 맞장구를 쳐주면서

"아 아쉽게 못봤어요. 무슨 내용이에요?"

..

이렇게 별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가 끝나고 저는 보통, 내지는 괜찮은 놈 정도의 범주에 들어간 것을 안도합니다.

실제로 기분도 좋아요.

원하지도 않는데 상대를 겁 주면 뭔가 불쾌하거든요. 빚진거 같고. 미안하다는 뜻이죠.

 

하지만 어쩌다 한번씩 저의 "귀납적으로 합리적인 추론"을 넘어서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국은 그루핑을 하는 사고를 버리지는 못하는데, 뭐 습관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 중 하나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은 읽는 다는 인상을 풍깁니다.

말하자면 "다 안다."는 식이죠.

 

그리고 처음 만나서 이런 질문을 날립니다.

"최근에 읽은 책이 뭐에요?"

 

저는 그러면 적잖이 충격을 받습니다. 외모가 저 처럼 "특이-(커서)"한데 그 이질성을 무시하고 뭔가 새로운 것을 묻거든요.

 

이 사람이 뭘 근거로 나의 취향을 맞췄나?

 

이 순간 제 외모를 검색합니다. 셔츠, 넥타이, 소매, 손가락, 외투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손, 손에 쥐고 있는 스마트폰,

구두, 시계

문제는 없습니다. 생긴것도 사자눈썹에 안경도 안꼈는데, 이 사람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로 그 순간 가설을 세웁니다.

 

1) 내가 알지못하는 외모의 어떤 요소가 있어서, 이 사람이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것이다.

or

2) 이 사람은 사실은 누군가를 통해 (혹은 블로그 같은 것을 통해) 나를 알고 있다.

or

3) 그냥 아무 말이나 던진 것이다. (감이다.)

or

4) 저 "최근에 읽은 책이 뭐에요?" 라는 질문이 사실은 내가 전혀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반어법을 통한 일종의 모욕적인 의미이다.

 

 

하지만 나는 위의 가설들을 바로 물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책 좋아하는지?" 라고 묻는 건, 뭐랄까

저에게 있어서는 대화에서 뭔가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정확하게 그것을 말했을 때의 굴욕감이란.

수수께끼가 너무 허무하게 풀려버렸을때의 허무함이란.

 

그래서 바로 사실을 말합니다.

상대의 선제권에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죠. 어찌보면 좀 꼬인 생각이긴 한데,

키를 물어봤으면 바로 썰풀기 모드로 들어갔을 텐데, 이 사람은 저에게는 이레귤러이니까,

저로서도 탐구의 정신 발휘된 것이죠. 카테고리에 뭔가를 집어 넣는 그 쾌감.

혹은 새로운 카테고리의 창조. 테이블의 확장!

 

"아, 안톤 체홉 읽고 있는데, 단편선이에요. 첫 작품은 자의식과잉에 걸린 사람을 우습게 표현한 작품이죠. 체홉이 의사인데,

취미삼아 글을 쓰다가 희곡작가가 되었죠. 이 사람은 뭐랄까, 의사답게 사람의 내면을 후벼파고, 조롱하는 면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극장에서 재채기를 하는데 하필 그 사람 앞에 앉았던 사람이 신분이 높은 장군이에요. 이 사람은

미안하다고 말하는데 이 장군이 반응이 시큰둥해서 몇 번이고 사과를 하러 가고 장군이 버럭 화를 내자 집에서

혼자 끙끙 앓다가 죽는 다는 내용이에요. 두번째 작품은.. ..... 중략

.... ~~씨는 무슨 책 읽으셨어요? 최근에?"

 

물론 쏟아내는데, 이 사람은 "아 그래요?, 재밋겠네요?" 이런 말을 던집니다.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어떤 자기계발서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그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내가 책을 좋아하는지 알았나, 단서는 뭐였나." 거든요.

 

책 이야기를 죽 하다가보니 슬슬 시간이 지나갑니다.

주제는 책 이야기에서 시사를 거쳐서 일에 대한 것에 와있습니다.

단서는 아직 모릅니다. 그저 신비에 싸인채 슬슬 저도 그 사실을 망각할 때쯤 비로소

그 사람이 재미없다는 듯 이야기를 합니다.

 

"~~씨(저를 지칭합니다.), 되게 특이한 사람이네요? 덩치에 안맞게."

 

그때서야 저는 추론을 합니다.

"이 사람은 처음에 내 외모(크다는 속성)에 휘둘리지 않으려 했다. 그 특이성을 외면함으로써 나의 이면을 보려했다. 그리고 성공한 듯 하다."

여기에 제 개인적인 감상이 한 가지 붙습니다.

"불쾌하다. 농락당했다."

 

왜 저는 이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불쾌감을 느낀 것일까요?

대화내용은 별 것 없습니다. 책 시사 일. 그저 사실들의 나열.

그러나 어떤 저의 비밀스러운 의도가 이런 사실들에 녹아들어갔다는 것을 상대방은 어떻게 간파한 것일까요?

 

표정? 뭔가 외연을 규정할 수 없는 부 자연스러움? 연습되지 않은 모습? 혹은 그 상대방이 저와 같은 사람을 자주 주변에서 봐왔기에

쉽게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아니면 다른 어떤 것?

 

하긴, 어쩌면 말그대로 자의식과잉일 수 있습니다. 상대는 별 생각없이 뱉은 말인데 괜히 제 관점에서는 특이한 경우라서

반응이 이상했고, 그 사람은

또 아무 생각 없이 "특이한 사람이네요"라는 말을 했을 지도 모르죠.

 

상대방은 외모도 정말 평범하고, 별로 제 이상형도 아닌데, 그저 "공포를 해소하기 위한 말"이 아닌 말을 첫마디로 꺼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를 후킹하는데 성공합니다.

 

어찌보면 천진난만함이고, 어찌보면 간단한 수 읽기 일 수도 있겠죠. 뭐 말하자면 "넌 너무 커서 내가 키를 물을 것이라는 걸 뻔히 알고 있을 꺼야."

 

인간관계의 평이한 위선떨기가 아닌 죄수의 딜레마 자체를 깨버리는 저런 시도에 저는 매료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상대방에게 카톡으로 안부를 묻죠. 뭔가 불안한 것인지, 아니면 관심이 생긴 것인지.

 

어떤 규명되지 않는 설렘으로 상대방을 알아가겠다는 기투를 계속하게 됩니다.

 

그 감정을 말로 굳이 표현하자면 "저기에 에베레스트가 있으니 그 산을 올라야하는 엄홍길의 사명감"이랄까..

 

뭐하세요 로 시작해서 저녁이나 한끼.

술이나 한잔.

그러면서 이런 저런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데

"서로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외모도, 가족도, 노는 시간에 뭘하는 지도.

 

저로서는 아주 흥미로운 현상이었죠.

처음에 취향을 바로 맞추더니, 그 다음 부터는 "너와 나"가 배제된 완전한 제 3의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심지어는 논쟁까지 합니다. 그래도 재밋는 건 이성간에 논쟁을 했는데도 감정이 상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게임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아는 거죠.

여기서 "나 너한테 관심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패배의 선언이라는 것을 아는 듯.

 

서로 별로 주장이 강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아주 미세한 부분에서 약간의 긴장을 만들어놓고

상대방을 굴복시키려고 합니다.

 

대화자체는 화기애애한데, 그 속에는 칼이 오가는 거죠.

 

몇 번을 그렇게 만났는데,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은 딱 하나,

 

상대방

: "~~씨, 어렸을 때 부터 착하다는 소리 별로 안들어봤죠."

:"~~씨도 그렇죠?"

상대방

:"네 ㅋㅋ"

 

서로 뭔가의 공감대를 가진 것 같은데, 그 것이 "우린 착한 사람은 아니다."라는 것이었죠. 일부러 혼돈스러운 행동을 한다는 겁니다.

 

팜 파탈, 옴 파탈(치명적인 매력)이런 카테고리에 넣는 것도 괜찮을 수도 있겠지만,

아니면 굽히지 않겠다. 라는 대 전제가 깔린 충동적인 행동들의 연속이라는 해석도 괜찮겠지만.

 

뭐랄까, 그 것 마저도 넘어선 "즐거움" 을 추구하는데에서 오는 "즐거움"을 서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나중에 이 친구와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을 때 서로 동의한 바는.

 

1)"별로 특이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구나"라는 생각을 갖는 순간, 상대방은 기투를 중단하다는 것.

 

2) 결국 "나"라는 존재를 규명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야 결국 상대방은 나를 본다는 간단한 논리.

 

3) 상대방이 어떤 기대를 갖고 행동하는지, 조심스럽게 관찰하는 경향이 둘 모두에게 있다는 것.

 

4) 하지만, 서로 대부분의 인간관계에서는 착하고 선하다는 평가를 받도록 자연스럽게 행동한다는 것- 이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방이 표준 절차- 즉,

외모의 특이성으로 접근할 때 정확하게 기획된 행동패턴으로 대응하는 것으로 시작하면 별로 어렵지 않다는 것.

 

(이 친구는 평범한 외모를 갖고 있어서 옷을 좀 포인트를 줘서 입는 편이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그쪽으로 유도한답니다.)

 

말하자면, 저는 생득적으로 상대방이 가장 먼저 저를 볼 때 무엇을 볼지 감을 잡을 수 있고, 이 친구는 의도적으로 상대방이 그쪽으로 눈이 가도록

유도를 한답니다. 이 것의 장점이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에게 선입견, 고정관념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상대방의 고정관념의 연쇄 두 세번을 이어주면

자연스럽게 상대방은 나에 대한 기투를 멈춥니다.

 

그걸, 서로 알게 된 것은 사실 제가 먼저 고백을 했기 때문입니다.

 

패배를 선언한 것이죠. "나는 이러이러하다."라고 말했고, 그녀가 동의했기에, 저런 결론에 이른 것이죠.

 

말하자면, 엄지원의 치마와 묘한 다리의 구조, 그리고 그 쇼파에 닿아 있을 그 무언가는 강력한 선제권을 엄지원에게 부여합니다.

상대방은 이미 머리속에 "형언하기는 힘든" 끌림을 갖게 되죠.

그러면 엄지원은 "상대방이 나에게 끌린다."는 전제를 갖고 게임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아니에요~아니에요~를 말하면서 그런 이미지들을 더 신비스러운것으로 만들어나가든,

그래요, 난 졸라 섹시해요.를 투영하면서 그 끌림을 좀 더 노골적인 것으로 만들어나가든...

 

그럼 처음에 제 친구인 그녀가 시도한 것은 무엇이었느냐,

관찰의 결과였답니다. 손이 너무 곱게 생겼대요.

 

시시한 답이었지만, 그냥 무턱대고 던진 것이 아니었다는 게 다행스럽게 생각되었습니다.

 

써보고 보니 개념화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끌림,..

에 대한 글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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