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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 거리에서
게시물ID : readers_459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거봉봉
추천 : 4
조회수 : 30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12/01 22:33:49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그 동그란 어깨를 붙잡았다. 교복 치마가 팔랑대며 비껴 돌았다. 그는 "아빠!" 하며 어깨를 부벼오는 모습을 기대했지만

 

 

"왜요?"

 

 

돌아온 것은 잔뜩 날이 선 대답과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전부였다. 남자는 허공에 어정쩡하게 걸린 손을 슬며시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었다. "미안해, 학생. 잘못 봤어." 찌푸린 채 뭔갈 웅얼거리던 여학생은 신호등 불이 바뀌자마자 후다닥 뛰쳐 가 버렸다. 그는 소녀의 뒷모습이 정희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빨간불이 되었다. 매연에 섞여든 겨울바람이 남자를 흔들었고 그는 그 바람마저 정희같다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겨울바람은 나무를 붙들고, 철새의 깃을 움켜쥐고, 행인들의 팔을 잡으려 애쓴다. 하지만 나무는 몸을 털며, 새들은 서로의 목에 얼굴을 묻고, 행인들은 바쁘게 온기를 찾는다. 아마 겨울바람이 난폭한 것은 그때문일 거라고. 정희처럼 외로웠을 거라고, 그는……

 

……목도리에 입술을 파묻곤 중얼거렸다. 정희야, 아빠 춥다. 물론 그렇게 말한다고 들을 아이는 아니었다. 그때도, 지금도. 정희는 그의 가슴 속에서 사납게 몰아치곤 한다.

 

 

 

 

 

 

눈처럼 소복하게 쌓인 뼛가루를 처음 보았을 때, 남자는 그 자리의 침묵에게 몇 번이나 되물었다. 이게 정희라고? 그는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아마 누군가가 "이건 정희네 반 교실에서 모아온 분필 가루입니다."라고 말해주는 게 더 현실적이었을 것이다.

 

어디 추모공원 몇 층 몇 단 몇 번째에 정희가 있다는 얘길 들었을 때도 그는 꿈꾸듯 멍한 얼굴이었다. 남자는 한 번도 그곳을 찾아가지 않았. 대신 문지방이 닳도록 추모공원에 드나드는 아내에게 묻곤 했다. 거기에 있는 게 정희라고? 정희는 독서실이 답답하다며 칭얼거리던 아이였다. 남자는 우스울 정도로 조그마한 사물함에 갇혀있는 딸아이를 상상할 수도 없었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길거리를 쏘다니며 여기 어딘가에 정희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게 마음 편했다.

 

눈 내리는 횡단보도 앞에서 남자는 계속 여학생들을 불러세웠다. 매번 기대하고 실망하면서. 그렇게 그는 눈을 맞으며 오랫동안 서 있었다.

 

 

"여보, 이제 들어가자. 응?" 

 

 

그의 아내에게선 검게 얼룩진 눈물냄새가 났다. 추모공원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당신 마스카라 다 번졌네." 파랗게 질린 입술로 웃는 남자의 모습에 여자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남자는 꽁꽁 얼어붙은 손끝을 그녀눈물로 녹이며 말한. 이 추운 거리에 정희가 가득하다고. 그런데도 누구 하나 안아줄 수 없는 게 슬프다고.

 

우리 정희, 너무 춥지 않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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