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36994
고려대 정경대 후문에서 벌어진 '안녕남' 지지 공연 서울이 꽁꽁 얼어붙었다. 올겨울 들어 가장 찬 바람이 분 13일 오후 1시, 기온은 영하 7도였다.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건물로 들어가는 후문에는 대학생들이 게시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게시판에는 빼곡하게 채워진 대자보가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지 못하다'라는 제목의 대자보였다. 그 뒤로 20개가 넘는 자보가 줄을 이었다.
"안녕할 수 없는데 어떻게 안녕하시냐" 게시판 옆에는 분향소가 차려져 있었다. 밀양 송전탑 건설을 반대를 외치며 숨진 고 유한숙씨를 기리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분향소 앞에는 2.5미터 높이의 송전탑 모형이 놓여 있었다. 모형 앞 탁자 위에는 '밀양도, 우리의 전기도 안녕하지 못합니다'고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학생들은 유씨의 영정사진 앞에 조화를 헌화했다.
분향소 옆에는 '안녕남' 주현우(27·경영 08)씨와 그를 지지하는 학생 10여 명이 서 있었다. 학생들이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안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들 안녕하게 계십니까"라고 외쳤다. 털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두른 학생들의 코와 볼은 빨개져 있었다.
'안녕남'이란 파업 중인 전국철도노동조합을 지지하며 "다들 안녕하십니까"는 제목의 대자보를 써 화제가 돼 붙어진 별명이다. 그가 쓴 대자보는 코레일이 파업한 철도노조원을 상대로 하루 만에 직위 해제한 것에 대한 분노, 정치·사회에 무관심한 또래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이후로 "안녕하지 못하다"는 대자보가 이어졌다. 고려대 외에도 중앙대, 성균관대, 가톨릭대, 광운대, 용인대 등 각 학교 게시판에도 "나는 침묵했다", "우리 학우님들은 안녕하시냐"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었다. (관련기사:
"사람이 죽어가는데... 어찌 다들 이리 안녕하신건지")
학생들이 함께 외친 한 줄, "넌 행복해야해" 주씨 앞에서 학교 내 밴드인 '상추와 깻잎'이 '안녕남 지지 공연'을 벌였다. 1, 2학년 여학생 두 명이 멤버였다. 이들은 공식 동아리가 아니었다. 기타를 칠 사람, 노래 부를 사람이 모였을 뿐이다. 분향소 앞 의자에 앉은 그들은 노래를 불렀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졸업'이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넌 행복해야해" 노래가 흐르자 지나가던 학생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또 밴드가 이 가사를 반복해서 부르자 따라 부르는 학생들이 생겨났다. 노래를 따라 부른 한 학생은 "이런 방식으로도 응원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놀랍다"며 "응원 게시글이나 대자보 자체는 많이 봤는데 노래로 응원하는 모습은 처음이라 보기 좋았다, 형식의 파괴가 앞서니 더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노래가 흐르는 동안 게시판 앞에서 한 학생은 '○○○해서 나는 안녕치 못합니다'라는 내용으로 페이스북 포토 서명을 받았다. 지나가는 학생들은 각각 '이명박 가카가 그리워지려고 해서', '현실에 무관심했던 내가 창피해서', '귀를 막는 정부, 닥쳐오는 시험이 답답해서' 안녕하지 못하다며 답을 달았다. 공연이 끝나자 주씨는 말했다.
"지지 공연을 해준 학생들과 여기 '안녕하지 못하다'며 답하는 대자보를 붙인 사람들도 그렇고 모두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내가 쓴 대자보가 어떤 계기가 된 것일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아요." 학생들은 간식거리 쥐어줬고 교수는 지갑 털었다 이들이 그려낸 광경에 지나가던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췄다. 학생들은 "멋있다", "힘내라"며 음료수와 간식거리들을 손에 쥐여주고 갔다. 한 교수는 주씨를 비롯한 학생들에게 "고생한다, 밥이라도 사 먹으라"며 지갑에 있던 돈 5만3000원을 털어주고 갔다. 또 다른 교수는 "교수라는 신분 때문에 마음 놓고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학생들을 지지한다"며 "대자보라는 형식이 대학가에 다시금 나타난 것도 매우 새롭다, 이런 학생들이 점점 더 모일 때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려대 학생의 학부모라는 50대 여성은 "이런 학생들이 있어야 민주주의가 되살아나지"라며 응원의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다. 대자보를 읽던 조효정(가정교육학과 12학번)씨도 "대학 들어와서 회의감이 들기도 하고, 최근 진보와 종북 이미지가 겹치면서 부정적인 시각들이 많았다"며 "하지만 이런 계기를 통해 더 많은 학생들이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들을 지켜본 미국 교환학생 코디(Cody)씨는 "미국에도 대자보가 있긴 있지만, 활성화되지는 않았다"며 "(철도) 파업으로 인해 불편을 겪을 수 있는데도 이렇게 지지하는 학생들이 감동스럽다"고 말했다.
현 장에 도착한 지 2시간 뒤 노래는 끝나고 학생들은 흩어졌다. 주씨도 "30장이 넘는 자보가 붙었는데 이걸 학우들이 볼 수 있는 시간은 없었던 것 같다"며 "내일 오후 3시에 있을 '서울역 나들이'를 준비하겠다"고 말하며 어디론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