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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솔직한말로 재평가 이뤄져야함
게시물ID : sisa_3587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김잭규
추천 : 11/4
조회수 : 625회
댓글수 : 57개
등록시간 : 2013/02/08 23:22:02



박정희 지지자들의 대부분 공통점은 독재는 나쁘지만 경제공로부분은 잘했다이다.(독재 찬양하는 또라이도 간혹 있다만)


교과서나 티비의 프로파간다에 버금가는 박정희 공로 치하는 가끔 보면 구역질이 날정도의 포장이라 생각된다.


박정희 주 업적의 수출주도형 전략과 경제개발 계획


이게 과연 박정희가 없었어도 가능하냐는 질문에 앞서 말하고 싶은건 박정희는 쿠데타 찬탈정부라는것


이건 중요하게 거론하지 않겠지만 역사를 보면 의문이 든다.


이 사람이 한 업적이 정말 업적인가?


대한민국은 1960년 315 부정선거 후 419혁명으로 2공화국이 건립됬는데


당시 총리의 경제개발계획은 미국과의 협조로 이승만의 반대가 있었지만


이승만과의 협조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려했다.


정권이 부정선거로 교체되고 당시 총리는 경제개발계획을 입법하기 위해


당시 구권파와 신권파의 대립을 평화적인 문제로 해결했다.


당시 데모와 집시법을 제정할정도로 격해진 국내정세였지만


평화적 대화로 국민도 419의 여파를 


넘어 경제개발을 위해 힘쓰고 경제개발계획을 입법했다.


다음날 쿠데타 터짐 으앙!


경제개발 계획의 과정을 길게 쓴건 당시 총리는 1공화국에서 2공화국까지


미국과의 협조로 입법까지 하고 수많은 계획을 세웠다.


박정희가 찬탈해서 자신이 집행했는데 박정희의 중앙집권적 전제국가가 아니면 이러한 집행이 불가능했을거라는


가정은 애초에 이러한 과정을 봤을때 말이 안되는 소리다.


또한 경제개발 계획 5개년 후의 3차 경제개발계획에서는 중화학공업을 몰빵하기 시작했다


수출주도형 전략은 외국 시장이 안좋으면 한국에 직격타가 온다


말그대로 도박과 같다.


1차 오일쇼크를 간신히 넘기고 2차 오일쇼크때 박정희 정권은 부도위기에 있었다.


미국에 빌린 차관이 문제였다.


당시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초금리 인상을 펼친 미국은 차관을 빌려준 국가들에 불리할 정도의 금리인상 때문에


당시 한국은 죽을맛이였다.


부채 금리인상으로 당시 2차 오일쇼크때 박정희 정권은 망해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때 도입하려고 한게 부가세와 소득세 인상이다.


저곡가 저임금 정책으로 착취당할때로 착취당하고 노동3권까지 유신헌법으로 없애버리려 한 박정희는


이미 짤만큼 짠 노동자들에게 조금 더 짜보자는 심성으로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결과는 부마항쟁이다.


박정희는 당시 김재규 부장의 부마항쟁 보고를 듣고 총기발포도 불사할 의지를 보였다.



박정희의 이런 개소리는 김재규의 총알로 돌아왔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에 관해 문제가 많았고 사실상 도박판을 벌였다고 보는게 나을정도인 정권이였다.


수출주도형 국가였지만 부채 때문에 빚 갚기에 급급했고


미국의 플라자 협의에 의한 미국의 달러 인하 엔화 절상이 아니였으면 과연 한국은 성공 할수 있었을까?


해외에 의존한 경제구조는 해외의 경제구조에 의하 국가의 존립이 결정된다.


박정희는 당시 실패했고 플라자협의의 5공떄 겨우 회생할뻔 했고


수출주도형에서 질적양상의 과도기를 거쳐 한국이 단순 수출국가를 넘어 아이티 강국이 됬는데



이걸 정말 수출주도형 전략의 공로라고 말해야 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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