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가 기존의 정치체제 안에서 충분한 권력기반을 확보하지 못하면 외부의 힘에 유혹을 느끼게 된다. 60년대 중국 대륙을 폭력과 유혈(流血)로 휩쓴 홍위병(紅衛兵)은 공산당 지도부 장악에 자신이 없어진 마오쩌둥(毛澤東)이 체제 밖의 힘을 끌어들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 내지 강화하려고 조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위병이 주도한 문화혁명(文化革命)에 대한 평가도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으나 일반적인 견해는 있다. 그 운동이 중국 사회를 분열시켜 수백만의 인명이 살상됐으며, 지식인 탄압으로 중국 문화를 수십년 후퇴시켰다는 비난이다. 毛를 사랑하는 대부분의 중국 사람들도 그의 유일하고 중대한 실책으로 흔히 문화혁명을 든다.
그런 부정적인 평가가 아니더라도 총선시민연대와 그들이 호소하는 선거혁명을 두고 홍위병과 문화혁명을 떠올리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 될는지 모른다. 우선 홍위병은 위로부터 시작된 조직이었지만 총선연대는 아래로부터 시작된 조직이며, 문화혁명은 피를 동반한 관제(官製) 운동이었지만 선거혁명은 무혈(無血)의 시민운동이기 때문이다.
또 끊임없이 나도는 음모설(陰謀說)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는 정부나 여당이 총선연대의 조직과 활동에 개입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을 뿐더러 시민단체의 선의(善意)를 의심할 근거도 없다. 그들이 내건 대의(大義)는 누구도 대놓고 부정하기 어렵고, 많은 사람들은 그런 그들의 활동을 오히려 필요하고도 시의적절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도 총선연대 시민단체의 활동을 보면 자꾸 홍위병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활동이 이제 시작이며, 정말로 중요한 전개와 변화는 앞날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민련과 공조가 깨지면 집권여당은 불가피하게 체제 밖에서 힘을 끌어들여야만 한다. 그런데 이미 절로 만들어진 조직이 있으니 그 조직을 활용하고 싶은 유혹을 억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민단체 쪽도 그렇다. 출발의 선의와 무사(無私)를 믿는다 쳐도 그 일관된 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쌀에는 뉘가 섞여들게 마련이다. 더구나 대중운동의 장(場)은 시장 못지 않게 그레셤의 법칙이 자주 적용되는 곳이다. 거기에다 기준의 설정과 적용에 요구되는 공정성을 확보하는 일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벌써 일부 지방에서는 총선연대의 낙천자 명단이 오히려 그 지역에서는 당선자 명단으로 통하고 있다고 한다. 의식의 차이라고 무시하기에는 너무도 섬뜩한 현상이다. 총선연대의 공천반대 기준에는 지역감정의 조장이라는 항목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 경우에는 오히려 총선연대의 활동이 지역감정을 조작한 꼴이 된 셈이다.
총선연대의 기준이 너무 윤리적,감성적 측면만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선거는 유능한 정치인을 뽑는 것이지 깨끗하고 착한 시민을 상 주는 것이 아니다. 예견력,결단력,종합관리능력 따위의 너무 실제적이고 효율적인 정치생산만을 기준으로 국회의원을 뽑는 것도 문제지만, 청렴이나 의리 같은 윤리적 덕목만을 강조하는 것도 올바른 투표권 행사를 유도하는 일은 못된다.
거기에다 만약 총선연대가 출발할 때의 신선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집권여당이 그들을 활용하고 싶은 유혹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한다면 총선연대는 한국판 홍위병에 지나지 않고, 그들이 외친 선거혁명은 질 낮은 문화혁명이 되고 만다. 이런 점에서 총선연대나 집권여당이 스스로를 경계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시민들도 눈을 부릅뜨고 그들 양쪽을 모두 지켜봐야 한다.
"끊임없이 나도는 음모설(陰謀說)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는 정부나 여당이 총선연대의 조직과 활동에 개입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을 뿐더러 시민단체의 선의(善意)를 의심할 근거도 없다. (...) 그런데도 총선연대 시민단체의 활동을 보면 자꾸 홍위병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활동이 이제 시작이며, 정말로 중요한 전개와 변화는 앞날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 전 소설가 이문열이 바로 이 자리에서 한 말이다.
음모론. 한 정당의 대변인을 졸지에 코미디계의 황제로 등극시켰던 이 조잡한 얘기가 그의 말대로 항간에 "끊임없이" 나돌고 있다. 왜 그럴까? 나는 음모론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그것을 정말로 믿어서 주장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설마 한 나라를 이끌어나가시는 분들이 그 정도로 머리가 나쁘겠는가? 거기엔 아마 다른 이유가 있을 게다. 즉 거짓말도 참말과 똑같은, 아니 때로는 그것보다 더 큰 정치적 효과를 내기 때문일 게다. 게다가 히틀러의 말대로 "대중들은 작은 거짓말보다 큰 거짓말에 더 잘 속는" 법이다.
<에로영화 스타 젖소 부인과 소설가 이문열의 관계는-?>
이런 제목의 기사는 대중을 즐겁게 해준다. 설사 그 기사가 "아무 관계도 없다"는 허탈한 내용을 담을지라도 말이다. 혹시 이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 경우에는 표현을 슬쩍 바꾸면 된다. 가령 이렇게. 젖소부인과 이문열 사이에 내연의 관계가 있다는 "뚜렷한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즉 두 사람의 관계는 한마디로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관계다." 이건 나치 선전상 괴벨스가 즐겨 사용하던 어법이다.
어쨌든 아무 "증거"나 "근거"도 없이 이문열은 과감하게 총선연대를 중국 문혁기의 "홍위병"에 비유한다. 고약한 상상력이다. 총선연대의 활동의 근거는 국민주권을 명시한 우리 헌법의 참정권보장 조항에 있다. "시민들의 참여 없이 민주주의는 살아남을 수 없다." 독일의 대학교재에 나오는 말이다. 참여민주주의가 대의제와 함께 민주주의 문화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기둥이라는 것은 현대의 상식이며, 이 상식은 이미 대부분의 나라에서 실천되고 있다. 그런데 왜 그의 상상력은 총선연대의 이미지를 찾아 민주국가가 아니라 하필 문혁기의 중국으로 달려가는 걸까? 이렇게 민주주의를 볼셰비즘과 동일시하는 것도 이미 히틀러가 한번 써먹었던 수법이다.
"증거"도 "근거"도 없기에 '총선연대=홍위병'이라는 등식을 만들기 위해 그는 미래로 날아가야 했다. 즉 "총선연대는 앞으로 홍위병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조심하라." 말이야 맞는 말이다. 그의 말대로 총선연대는 "홍위병"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 조직폭력배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총선연대는 아직 홍위병이 되어 보지도 못한 채 벌써부터 그 섬뜩한 이미지를 뒤집어쓰게 된다. 이데올로기는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법이다. 음모론(陰毛論)은 포르노다. 언젠가 이문열은 마광수를 질타했지만 정말로 부도덕하고 몰취향한 것은 바로 이 정치 포르노다.
제 본능을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그것을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언어로 분절화할 수가 있다. 특히 그 일만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흔히 문인이라 부른다. 이 점을 깜빡 잊은 이문열 씨에게, 이제 그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아무쪼록 그 언어폭력에 속수무책으로 얻어맞는 사람들의 심정이 어떠한지 몸소 체험해보는 귀한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이문열 씨는 지금은 존경받는 소설가이지만 앞으로는 모 정당의 대변인이 되거나 그 당의 공천을 받을 수도 있다. 끊임없이 나도는 야합설에도 불구하고 물론 현재까지 이런 발언을 하는 이문열 씨가 정치권 일각의 사주를 받았다는 뚜렷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을 뿐더러 그의 선의를 의심할 근거도 없다. 그런데도 그의 행각을 보면 자꾸 나치 친위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의 활동이 이제 시작이며, 정말로 중요한 전개와 변화는 앞날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ROUND2 FIGHT! *이문열씨가 아니라 소설가 박경범씨가 "대타"로 붙었습니다
중앙일보, 2000. 2. 15 [시론] '언어 폭력가'는 안 된다 *** 진중권 씨 글과 그의 앞날에 대한 우려 ▲ 박경범 <소설가>
근래 들어 과거 군사정부 아래서의 갖가지 인권탄압 사례와 더 나아가 한국전과 베트남전에서의 양민학살 등 우리 국가체제내 공권력의 어두운 면이 유난히 조명돼 많은 사람들 앞에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그 모두가 당시의 대통령이 직접 시켜서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그 시대 권력의 취향을 알고 미리 그들의 마음에 드는 성과를 내어 눈에 들려했던 자들이 자행했거나 인간인 이상 어느 시대, 어느 집단에도 있을 판단력 결함이 있는 사람에 의해 일어난 확률적 사건일 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 분위기는 그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과거 우리의 국가체제에 책임이 없다고는 하지 않는 것 같다.
사실 그들 행위의 주체들이 권부(權府)로부터의 지시선상에 있든 없든 간에 국가체제와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직접지시의 증거가 없다고 해서 국가체제가 그 책임을 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부로부터의 직접적이고 체계적인 비밀지시가 있었느냐는 증거의 존재 여부로 음모론을 저울질하고 권력의 도덕성을 판가름하려는 것은 그것이 과거의 일이든 현재의 일이든 무모한 것이라 하겠다.
음모론에 대해서는 그렇다 하고, 필자는 진중권 씨가 먼저 이문열 씨의 글에 한 반론이 평소 진중권 씨의 면모에 비춰 기대한 바에 미치지 못하는 감이 있어 몇마디 더해두려 한다.
"어쨌든 아무 '증거'나 '근거'도 없이 이문열은 과감하게 총선연대를 중국 문혁기의 '홍위병' 에 비유한다. 고약한 상상력이다." 앞으로의 변화와 전개방향에 대한 우려는 얼마든지 열악한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 건강한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 건물을 지을 때 잘못하면 무너진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건축자에 대한 모독이 아니다. 자식의 비행(非行)을 나무라는 부모가 자식을 도둑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참여민주주의가 대의제와 함께 민주주의 문화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기둥이라는 것은 현대의 상식이며, 이 상식은 이미 대부분의 나라에서 실천되고 있다. "
당연하다. 국민이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돕기 위해 선거출마자에 관한 각종의 정보공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정당의 공천권 등 한사람이나 단체가 자신의 특별한 결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은, 어떤 상당한 자기절제와 신뢰성의 확인과정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고 참여의식이 있어 도시 중앙의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나라의 정책을 이끄는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치가 더 자연스러운 것인지 모르겠다.
진중권 씨의 앞날의 전개와 변화에 대해 우려되는 것은 그가 이 사회에서 맡은 역할이 어떤 뒤틀린 무엇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글에서 " '에로영화 스타 젖소부인과 소설가 이문열의 관계는?' 이런 제목의 기사는 대중을 즐겁게 해준다." 이로써 진중권 씨는 이미 이문열 씨에게 스스로도 인정하는 언어폭력의 주먹을 날렸다. 그는 또다시, "이문열 씨는 지금은 존경받는 소설가이지만 앞으로는 모 정당 대변인이 되거나 당의 공천을 받을 수도 있다. 끊임없이 나도는 야합설에도 불구하고…" 라고 다시한번 언어폭력을 행사했다.
분에 못 이겨 한번 '욱' 하며 주먹을 내미는 것은 아무리 순하고 예의바른 사람이라도 감정이 격하다 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번 주먹을 휘두르고 나서 다시 궁리해 결정타를 날리는 행위는 일반인은 쉽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폭력기술자' 만이 가능한 것이다. 같은 행위를 한 번 한 것과 두 번 계속 한 것은 그 행위의 우연성 여부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중권 씨는 혹 언어에 의한 폭력을 전문으로 삼는 '언어폭력가' 로 나아가지나 않을까 하는, 앞날의 중요한 전개와 변화에 대한 우려를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중앙일보, 2000. 2. 17 [시론] 속 이문열과 '젖소부인'의 관계 ▲ 진중권 <문화평론가>
"사실 그들 행위의 주체들이 권부로부터의 지시선상에 있든 없든 간에 국가체제와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직접지시의 증거가 없다고 해서 국가체제가 그 책임을 덜 수는 없을 것이다. 상부로부터의 직접적이고 체계적인 비밀지시가 있었느냐는 증거의 존재여부로 음모론을 저울질하고 권력의 도덕성을 판가름하려는 것은 과거의 일이든 현재의 일이든 무모한 것이라 하겠다."
그저께 소설가 박경범 씨가 이 자리에서 한 말이다. 한마디로 증거가 없다고 음모론을 중지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는 얘기다. 증거도 없이 음모론으로 타인을 음해하는 것이 "무모한" 게 아니라, 제발 그러지 좀 말라고 말리는 것이 "무모한" 짓이라는 얘기다.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일찍이 소크라테스 이래로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은 그것을 증명할 부담(onus probandi)을 진다. 그것이 논리학의 상식이다. 즉 증명하지 못할 얘기라면 애초에 꺼내지 말거나 입증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유가 있다. 자, 박경범의 말이 옳다면 과연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지 보자.
"최근 나는 사1설 정보팀으로부터 이문열과 젖소부인의 관계를 암시하는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즉 지금 청계천에는 <젖소부인 바람났네>라는 비디오테이프가 나돌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젖소부인이 바람났다는 것은 확인되었다. 문제는 젖소부인의 파트너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누굴까? 물론 그 남자가 이문열이라는 증거는 아직 없다. 그렇다고 그까짓 '증거의 존재여부'로 둘의 내연의 관계를 말하는 내 주장을 감히 '저울질하고' 이문열의 '도덕성을 판가름하려는 것은 (...) 무모한 것이라' 하겠다."
보라. 이렇게 해괴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가. 그럼 이문열 씨가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사태가 이 정도에서 그친다면 나는 아예 이 글을 쓰지를 않았다. 문제는 계속된다. 왜? 이어서 나는 이렇게 물을 테니까. "이문열 씨, 왜 직접 나서서 반론을 하지 않고 기껏 유겐트를 내세우고 그 뒤로 숨어요?" 물론 박경범 씨는 이문열과 무관함을 주장하며 오직 청년 진중권의 "앞날에 대한 우려"에서 그 글을 썼다고 호소할 것이다. 어쩌면 내게 자기가 이문열의 지시로 그 글을 썼다는 증거를 대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나는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사실 박경범이 이문열로부터의 "지시선상에 있든 없든 간에" 이문열과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직접지시의 증거가 없다고 해서" 이문열이 "그 책임을 덜 수는 없을 것이다." 이문열 씨, "책임"지세요.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보라, 박경범의 말이 옳다고 가정하니까 존경받는 소설가가 졸지에 치졸한 사람으로 전락하지 않는가. 이 부조리한 사태를 누가 원하겠는가. 이문열 씨가 원하겠는가? 설마 내가 원하겠는가? 아무도 원하지 않는 일을 대체 왜 한단 말인가. 그 연세에 무슨 영광을 더 보려고. 내가 쓴 글의 주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즉 "언어폭력을 쓰신 이문열 씨, 당신도 그런 말 들으면 기분 나쁘죠? 그러니 우리 모두 고운 말, 예쁜 말을 사용하는 명랑사회를 이룩해요." 이렇게 좋은 말을 하는 나를 박경범은 "일반인은 쉽게 할 수 없는" 짓을 하는 극악무도한 언어폭력배로 매도한다.
자, 논리 대신 이렇게 인신공격이나 하면 과연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나는 자제력이 좀 있는 편이라서 안 그러지만, "일반인"들은 이렇게 반응할 것이다. "소설가 박경범 씨는 나름대로 패러디를 한다고 했는데 아무도 웃는 사람이 없다. 이는 그의 문학적 역량에 결함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런 분이 소설가 행세를 한다니, 실로 한국 문학의 '앞날의 중요한 전개와 변화에 대한 우려를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말이 죽었다면 그도 죽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을 돌아보면 공자는 이미 죽었거나 거의 죽어가고 있는 듯하다. 드물게 論語에 두 번씩 나오는 말로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정치를 꾀하지 않는다(不在其位 不謨其政)"란 구절이 있다. 또 공자는 "천하에 도가 있으면 정치가 大夫(여기서는 정치를 전단할 수 없는 하급직위란 뜻)에게 있지 아니하고(天下有道 卽政不在大夫),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서민들이 정치를 비판하지 않는다(天下有道 卽庶人不議)."라고도 했다.
좋게 보면 전문성의 강조가 되고 나쁘게 보면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는 말이 될 테지만 적어도 이 부분에서 공자는 죽은 게 확실하다. 요즘은 자기가 있는 자리가 어디건 정치를 떠들어대는 것이 잘나 보이는 세상이다. 옛날의 大夫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직분과 이력을 가진 이라도 무리를 짓고 시세만 타면 정치가 제 것인 양 나서고, 서민들은 입만 열면 정치를 비판한다. 그것도 지금 세상의 道라 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발전해서 그리된 것이라 하니 공자의 말은 저절로 죽은 셈이다.
공자는 "남의 잘못을 여럿 앞에서 흉보는 자를 미워하고(惡稱人之惡者) 아랫자리(혹은 못난 사람)에 있으면서 윗사람(혹은 잘난 사람)을 비방하는 자를 미워하며(惡居下流而 上者) 용기만 있고 예의를 모르는 자를 미워하며(惡勇而無禮者) 과감하지만 앞뒤가 막힌 자를 미워한다(惡果敢易窒者)."고 했다. 그의 제자 子貢은 "살피는 것을 지혜로 여기는 자를 미워하고(惡傲以爲知者) 불손한 것을 용기로 기는 자를 미워하며(惡不遜以爲勇者) 들추어내 고자질하는 것을 정직으로 여기는 자를 미워합니다(惡 爲直者)."고 하여 공자의 허여함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오히려 그들 사제가 아울러 미워한 자들이 쑥대처럼 번성한다. 비방과 욕설은 용기의 딴 이름이며 고발과 폭로는 정직의 표상이다. 더한 일도 있다. 공자는 "군자는 세 가지를 두려워하나니, 천명을 두려워하고(畏天) 대인을 두려워하며(畏大人)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한다(畏聖人之言). 소인은 천명을 알지 못하니 두려워하지 않고(不知天命而不畏) 대인을 함부로 대하며(狎大人) 성인의 말씀을 업신여긴다(侮聖人之言)."고 했다.
참으로 세상이 뒤집혀도 어찌 이리 뒤집혔을꼬. 天命 같이 보이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는 것은 무시하고 비웃는 것이 요즈음의 지혜이다. 그리고 그 지혜를 가진 사람을 높이 쳐주니 지금 세상에서는 그가 오히려 군자가 된다. 조금이라도 옛날의 大人 비슷하게 평가를 받는 사람이 있으면 악착같이 달라붙어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되잖은 논쟁이라도 아득바득 벌이는 것을 보잘 것 없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는 知的 파파로치들은 공자에게는 틀림 없는 소인이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그걸 똑똑하고 잘난 것으로 여기니 이쯤 되면 공자는 죽어도 무참하게 죽었다.
거기다가 더욱 끔찍한 일은 이 같은 공자의 말을 대하는 요즘 군자들의 태도이다. 그래도 옳은 말씀이 있다 싶어 몇 구절이라도 인용하게 되면 몽매하고 썩은 보수주의자요, 봉건주의자 파시스트며, 심하면 왕도 없는 시절에 난데없이 왕당파라고 욕을 퍼부어 댄다. 공자의 시체까지 관에서 끌려나와 허리를 베인 꼴이다.
요즘 군자 중에는 어떤 이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했다. 그런데 자―, 이렇게 공자가 죽었으니 이제 나라가 살까?
"옛날의 대부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직분과 이력을 가진 이라도 무리를 짓고 시세만 타면 정치가 제 것인양 나서고, 서민들은 입만 열면 정치를 비판한다. 그것도 지금 세상의 도라 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발전해서 그리된 것이라 하니 공자의 말은 저절로 죽은 셈이다."
얼마 전 조선일보에서 이문열 씨가 한 말이다. 한마디로 시민의 정치참여가 공자님 말씀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즉 "옛날의 대부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직분과 이력을 가진" "서민"들이 감히 총선이라는 "시세"를 타서 시민연대라는 이름의 "무리"를 지어 "정치가 제 것인양 나서고" 있으니, 오호 통재라, 풍속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21세기 인터넷 시대에 이렇게 이문열은 나 홀로 왕조의 법통을 이어간다. 옛 성현의 말씀이 틀리지 않아 충신의 가문에선 대대로 충신이 나는 모양이다. 어쨌든 공자님 말씀이 정말 이런 것을 뜻한다면 나는 흥선대원군을 따라 외치겠다. "공자가 다시 살아나도 용서하지 않겠다아아."
이문열 씨는 한 가지를 잊었다. 헌법이다. 우리의 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주의란 주권재민의 원리, 즉 통치자와 피치자가 일치하다는 동일성의 원칙 위에 서 있는 정체다. 말하자면 민주주의란 시민들이 스스로 자신을 통치하는 자율적인 정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는 헌법상 주권자인 시민들이 "정치가 제 것인양 나서고" 있다고 한탄을 한다. 이 말의 밑바탕에는 정치가 시민들의 것이 아니라는 발상법이 깔려 있다. 그래서 "옛날의 대부급"에 해당하는 사람들만 정치에 "나서고" "정치를 비판"할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이런 몰상식한 발언이 존경받는 소설가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아마도 그의 정치적 이상은 봉건왕정 내지 플라톤적인 귀족정을 모델로 한 것이리라. 물론 공자와 플라톤의 가르침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하지만 이들과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엄청난 해석학적 지평의 차이를 무시하고 20세기가 끝난 이 시대에 기껏 이 고대인들의 정치이상을 설교하는 것은 엄청난 시대착오다. 어쩌면 그는 플라톤처럼 민주정을 중우정치 비슷하게 보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플라톤이 <국가>에서 묘사한 이상국가에 가장 근사한 정체를 가진 나라는 오늘날 엘리트 당원들의 전체주의 국가뿐이다.
정치는 우둔한 대중이 아니라 지성과 도덕성과 미감을 겸비한 엘리트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믿는 분들이 있는 모양이다. 물론 이들은 자기들이 그 고귀한 엘리트에 속한다고 야무지게 착각한다. 하지만 보라, 대한민국의 정치 엘리트들의 도덕성을. 우리 나라의 직업군(群) 중 국회의원만큼 전과비율이 높은 집단이 또 있겠는가? 게다가 지성? 한 정당의 대변인이 일간신문의 만화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현장을 우리는 라이브로 지켜보았다. 격조나 미감? 공천발표 후 각 당의 분위기를 보라. 육탄공격, 기물파손에 분말소화기가 난무하지 않던가.
이를 보다 못해 나선 시민들의 운동에 이문열은 아무 "증거"나 "확증"도 없이 "홍위병"이라는 끔찍한 이미지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를 비판하는 사람에게 논리적 반론이 아닌 인신공격으로 대꾸한다. "옛날의 대인 비슷하게 평가를 받는 사람이 있으면 (...) 되잖은 논쟁이라도 아득바득 벌이는 (...) 지적 파파로치들(...)." 여기서 "옛날의 대인 비슷하게 평가를 받는 사람"이란 물론 소설가 자신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염치와 겸양의 덕, 공자님은 그런 거 안 가르치셨나?
시민들의 정치참여와 비판에 혀를 내두르는 그 사람이 자신만은 신문 칼럼에 글을 써 왕성한 정치참여욕을 과시한다. 자기는 "옛날의 대부급"에 속한다고 믿는가 보다. 요즘 이문열 씨가 자주 물의를 일으키는 것은 현대적 수준의 교양이 부족해서 그렇다. 소설의 "대인"이라고 이 교양이 저절로 생기는 건 아니다. 나도 옛 성현의 말씀으로 글을 맺는다. 성현의 말씀은 언제 들어도 늘 새롭다.
"시인들은 시작의 능력이 있기에 다른 분야에서도 가장 현명하다고 착각하곤 한다."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