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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산문 - 광기 혹은 집착 혹은 우연 그리고 여자.
게시물ID : readers_462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GwangGaeTo
추천 : 5
조회수 : 316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2/12/01 22:51:05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있었다. 멀리서 다시 눈구름이 몰려오는지 하늘은 점점 검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이미 녹은 눈 때문에 축축이 젖어있었다. 모든 것은 우연이었다.

내가 새벽녘에 내리는 눈을 보고 학교 가기를 포기한 것부터가. 막상 학교를 가지 않았지만, 집에서 할 일은 없었다.

컴퓨터도 오래하니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나는 무심결에 창밖을 내다보았다. 검고 긴 생머리의 여자가 보였다.

노점상 할머니도 보였다. 걸어가는 커플들도 보였다. 새삼 다를 것 없던 상황이다. 다시 컴퓨터로 눈을 돌렸다.

그래도 이 좁은 방 안에서 혼자 사는 내가 할 일이라곤 컴퓨터밖에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무심결에 창밖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봤다.

눈이다. 잠시 그쳤던 눈이 다시 기운을 차렸는지, 전보다 더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눈을 피해 뛰기 시작했다.

가방을 쓰고 뛰는 사람, 우산을 다시 꺼내는 사람, 노점 상인들은 물건을 가리기 바빴고, 커플들은 세상의 어떤 풍파도 우리를 가를 수 없다는 듯이 꼭 붙어서 눈을 피할 곳을 찾아 뛰기 시작했다.

어? 그 여자다. 검고 긴 머리의 여자, 어깨와 머리에 이미 상당한 양의 눈이 쌓여있었다.

그런데도 그 여자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언 듯 보면 조각상이라고 오해할 만큼 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문득 그 여자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나는 창밖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 예쁘다. 그녀를 자세히 본 나에게 드는 첫 번째 생각이었다.

저런 데서 눈을 맞고 있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여자는 예뻤다. 길거리 돌아다니면 연예인 할 생각 없냐는 소리 많이 들어봤을 것 같은, 청순하고 눈도 크고 무튼 그런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얼굴과는 다르게 표정은 매우 슬퍼보였다.

아마 친한 친구나 엄마, 남자친구가 와서 안아주면서 어깨를 다독이면 금세라도 굵은 눈물방울을 쏟아낼 것 같았다.

그런데 저 여자가 왜 저기 서있을까? 어쩌면 그녀는 오늘 취직을 위해서 면접을 보러 가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진하지 않은 아이라인과 립스틱이 단정한 느낌을 주고, 트렌치코트 비슷하게 정장느낌이 나는 옷을 입은 거보니, 그럴 것 같다. 혹시 면접을 보러가는 회사에서 이미 다른 사람을 구했다고, 올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늦잠을 자거나 버스를 잘못타서 면접에 지각한 게 아닐까? 이 동네가 버스노선이 복잡한 편이니까 말이다. 아마 그녀는 이곳이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 왔을 것이다. 이동네 사람이면 버스노선에 한두 번 당해봐서 쉽게 잘못 타는 실수를 하지 않을 테니까. 혹시, 집이 어려운 상황에서 힘들게 공부하고 준비해서 얻은 천재일우의 기회였을까? 그래서 저렇게 몇 시간이 지나도록 멍하니 서있는 걸까? 에이, 그건 너무 나간 거 같다. 그럼 그녀는 왜 서있는 걸까?

다르게 생각하면, 그녀는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해서 공부를 하는 그런 학생이었을 것이다.

집에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 낮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밤에는 편의점 같은데서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으면서, 술 취한 아저씨들이 집적대는 걸 다 상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게 요즘 학생의 대부분 일상이니까. 그러면 뭘까.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갑자기 부모님이나 혹은 형제자매 중 누군가가 크게 다치거나, 아픈 걸까? 아니다. 그러기에는 저렇게 멍하니 서있을 이유가 없다. 미친 듯이 집으로 달려가도 모자를 판에 몇 시간을 저렇게 보낼 이유가 없다. 혹시 악덕 사장을 만나서 일은 일대로 하고 몸은 몸대로 축냈는데, 월급을 못 받은 게 아닐까? 만약에 월급을 받으면 일단 부모님께 옷 한 벌 사드리고, 친구들한테 고기도 한턱 사주고, 나도 신상으로 하나 빼서 걸치고 영화도 보고 그래야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장이 악덕 사장이라 밤늦게까지 일이란 일은 전부 시키고서는 최저시급도 안 챙겨주고, 추가수당도 안 챙겨줬겠지. 여자는 그래서 화가 나서 사장에게 전화를 했겠지. 그러자 그 사장은 욕을 막 하면서 어디 맘대로 하라고 소리를 쳤을 것이다. 곱게 자란 처녀가 그런 욕설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월급만 기다리면서 부풀었던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지니 충격이 클 것이다.

벌써 4시간이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옆에서 장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말을 걸기도하고, 더러는 따듯한 음료를 건네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곧 울 것 같은 표정에서 겨우 미소만을 띄우면서 상냥히 거절했다.

그리고 그냥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하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그녀는 정말 안 좋아보였다. 어깨와 머리에 쌓인 눈이 녹으면서 이미 그녀는 축축이 젖어버렸고, 공들여 한 티가 나는 화장도 번져서 눈가엔 검은색 물이 흐르고 있었다.

녀를 지켜보는 나조차 이미 처음의 호기심은 사라진지 오래였고, 이제는 막연한 집착과 강박관념에 빠져들어 갔다.

대체 그녀는 무엇을 위해 저기에 저렇게 서있는 걸까? 혼자서 하는 가정이 수십 개를 지나 이제 외계인이 아닐까? 의심하는 순간에 아직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가정이 문득 생각이 났다. 그렇다. 그녀는 아마 이별을 했을지도 모른다. 특히 남자친구는 그녀와 멀리 떨어져있는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었겠지. 그리고 오랜만에 남자가 만나자고 연락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옷 중에서 가장 예쁘고 여성스런 옷을 골랐겠지. 그리고 안하던 화장도 정성스럽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남자를 만났겠지. 그런데 그 남자는 그녀를 보자마자 오랫동안 생각했는데, 우리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툭 내뱉었겠지. 여자는 남자 뺨을 쳤을까? 아니다. 그녀의 얼굴로 봐서는 남자에게 왜 그러냐고 내가 뭘 잘못했냐고 한참을 물었을 것이다. 남자는 아마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하다가 돌아섰을 것이고, 그녀는 아마 자리에서 한참을 울다가 나왔을 것이다. 나오면서 마음을 다잡으려고 화장도 다시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 거리의 어딘가에 그와의 추억이 있어서 문득 그 생각에 다시 눈물이 나오려고 그랬을 거고, 우는 가슴과 생각하는 머리가 싸우면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안되겠다. 내가 나가야겠다. 그녀를 더 이상 보기에는 내가 가슴이 아파서 안 되겠다. 이 광기어린 혹은 미쳐가는 이상한 상황에서 벗어나야겠다. 가서 그녀에게 따듯한 커피를 한잔 주고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는 도중에도 내 눈은 창밖에 고정되어있다.

그런데 그녀가 웃기 시작했다. 눈에서 드디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부터 해지는 오후까지 그 긴 시간동안 보인 가장 급격한 변화, 아니 유일한 변화였다. 나는 갈아입던 옷을 두고 다시 창밖에 바짝 붙었다. 그녀는 이제 울음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울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얼굴은 누구보다 행복해보였다 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무엇일까 그녀를 이렇게 바꾼 것은…….나는 창밖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어. 저 멀리 해가 지는 곳에서 누군가가 미친 듯이 뛰어오고 있었다. 남자다.

공장에서 일하는지 작업복을 걸치고 기름때가 곳곳에 묻어있는 남자다. 그녀가 그를 보자 움직였다. 드디어 한발자국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에게 달려가 그의 가슴팍을 마구 때렸다. 그 남자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견뎌내고 있다. 어느 정도 그녀가 잔잔해지자 그는 조용히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품안에서 여기저기 긁히고 때가 탄 반지케이스가 꺼내졌다. 그리고 그는 그 안에 들어있는 조그마한 반지를 꺼내 여자에게 내밀었다. 주위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녀를 걱정하던 사람도 이상하게 쳐다보던 사람도 모두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녀는 반지를 받고 그의 품안에 안겼다.

나는 다시 옷을 갈아입고, 조용히 박수를 쳤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바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긴 시간을 멍하니 창밖만 보니 급격히 피로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냥 웃음 나왔다. 하루 종일을 투자한 일이 이렇게 끝났다는 게 뭔가 허전할 따름이다. 상념이 자꾸 떠오르지만 그냥 눈을 감았다.

오늘은 12월 25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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