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한제국 육군 (민영환 부장님)
(행사 예행 연습중이신 장교님들이시며 모자의 문양은 조선 왕가의 상징인 오얏나무의 꽃입니다.)
시위대 侍衛隊 -- 대한제국군의 핵심부대로 왕궁 경비와 국왕 호위을 담당했습니다. 처음에 1895년 5월에 설치되었을 때에는 2개 대대로 구성된 1개연대로서 각 대대가 2개 중대고 각 중대는 3개 소대 였습니다. 일본식 편제로 추정되는데 이렇게 되면 정원은 880명이 넘어야 하나 실제로는 일본의 방해로 그렇지 못했던듯 합니다. 을미사변때 일본군을 저지하다 실패했고 곧 해산되어 훈련대와 함께 동합되어 친위대로 재편되었습니다.
나중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한 직후인 1897년 1월에 러시아 군사고문의 지도로 시위대가 다시 편성되었습니다. 이때의 편제는 1개 중대=4개 소대, 1개 대대=5개 중대로 각 대대의 인원은 1,000명 정도였습니다. 1898년에는 시위 1대대와 2대대를 합쳐 시위연대로 개편하고 포병 1개 중대를 새로 편성하여 맥심 기관총, 개틀링 기관총, 크루프 야포와 암스트롱 야포등을 다루게 하였습니다.
2년 뒤에는 포병 중대를 포병 대대로 확장하고 시위기병대대를 설치하였으며 군악대 2개 소대도 설치하였습니다. 나중에 가면 보병도 2개 연대로 늘어나서 1902년경에는 총병력 5000여명의 막강한 전력으로 구성됩니다. 1905년에 강제로 감축되었고 1907년 군대해산때 완전히 해체 되어버립니다.
친위대 親衛隊 -- 을미사변 직후 시위대와 훈련대를 통패합하여 창설한 부대 입니다. 처음에는 총 2개 대대로 구성되어 1개 대대가 4개 중대, 1개 중대가 3개 소대인 일본식 편제를 취했고 1개 대대가 880여명, 친위대 총원은 1,700여명 이었습니다.
아관파천 이후 시위대를 다시 편성할때 친위대에서 800명이나 빼나 가는 바람에 1개 중대 170명, 총원 680명으로 축소되기도 했으나 이후에 다시 증강되어 1900년에 이르면 3개 대대, 15개 중대, 60개 소대로 구성된 3,000여명의 강력한 부대가 되었으며 여기에 공병 1개 중대(195명)와 치중병 1개 중대(175명)를 추가하였다고 합니다. 1905년에 시위대와 통폐합되었습니다.
호위대 護衛隊 -- 궁내부 산하 주전원에 소속된 부대로서 총원 730명 정도 였다고 합니다. 국왕의 직접 경호를 담당했다고 합니다. 1905년에 패지 되었습니다.
진위대 鎭衛隊 -- 지방군으로서 1895년 을미사변이후 부터 설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1개 중대 220명, 1개 대대가 500명 가량의 일본식 편제로 평양과 전주에 1개 대대씩 설치 되었고 1900년부터 본격적으로 증강되어서 총 6개 연대, 18개 대대로 편성되었는데 1개 대대가 1,000명이었다니까 총병력은 2만명 가량 되었을겁니다.
(경비초소...로 보입니다.) 각 연대와 대대 주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1연대는 강화(강화, 인천, 황주) 제2연대는 수원(수원, 청주, 전주) 제3연대는 대구(대구, 진주, 경주) 제4연대는 평양(1개 대대만 있었습니다) 제5연대는 북청(덕원, 북청, 경성) 제6연대는 의주(의주, 강계) 여기에 1개 대대 규모의 제주진위대가 추가됩니다. 그러나 1905년에 일제와 싸움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8개 대대로 감축되었다가 1907년에 완전 해산되어버립니다. 강화, 원주 등지의 진위대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의병에 가담에 싸웠습니다.
(의외의 사실이지만 군 막사는 서양식입니다.)
상무영 商務營 -- 대한제국 정부가 반정부 변혁 운동을 막기 위해 만든 특수 조직으로 전국의 보부상을 모아 편성한 부대입니다. 최고 천여명의 인원이 모인적도 있었답니다.
헌병대 -- 1900년 설치된 원수부元首府 직할의 부대로 하는 일은 지금의 헌병과 같습니다. 최대 5개 중대 규모 였답니다. 한편 이들이 사용한 무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라다 소총, 엔필드 소총 1000정, 드라이제 소총, 브릿치 로딩 소총 4000정, 미국 레밍턴 소총 3000정, 피바디 마르티니 소총 1000정, 러시아 베르단 소총, 독일 마우저 소총, 육혈포 300정, 개틀링 6문, 맥심 기관총 6문, 청나라제 12파운드 청동포, 영국제 암스트롱포 10문, 독일제 크룹 75mm포 8문 그리고 그와 관련된 부대장비와 탄약 등입니다.
2. 대한제국 해군 대한제국 해군 설치의 법률적근거는 1893년 고종의 칙령입니다.(당시는 조선) 그해 2월,당시까지 조선수군 체계였던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을 근대식 해군 편제로 전환시키고 청주에 있던 육군 작전사령부인 통어영(統禦營)을 남양으로 옮긴 뒤 그 명칭을 해군통어영(海君統禦營)으로 바꾼것이죠. 아울러,이해 3월 해군사관학교 설치령도 같이 공포됩니다. 그뒤 영국을 대상으로 군함구입교섭을 시작하나 무산되고 우선 사관양성을 위한 해군사관학교 설립에 착수하게됩니다.
[조선왕립 해군사관학교] 정식명칭 : 통제영학당(統制營學堂) 영문명칭 : Royal Naval Academy 또는 The Naval School 설립년도 : 1893년 설립예산 : 1천 원(청국에서 차관형식으로 빌림) 학교위치 : 강화도 갑곶진 근처(현재 구 강화대교와 신 강화대교 사이) 모집과정 : 사관후보생,수병 모집인원 : 사관50명,수병300명 신청자격 : 사관-18세~26세사이의 양반자제 담당교원 : 허치슨(영국-민간인),콜웰(미국-퇴역대위),커티스(미국-퇴역 하사관) 교과과목 : 영어(허치슨),군사학, 항해학, 포술학 등(콜웰,커티스) 이 사관학교는 청일전쟁 직후까지 약 2년정도 운영되다가 일제에 의해 해군제가 폐쇄될때까지 약 160명을 배출했다고 합니다.
[해군 지휘관] 위에말한 사관학교출신 160명이 어떤 형태든 임관했다면 아마 참위를 달고 해군에 편제되었겠지만 기록을 찾을길이 없었습니다.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수없지만 이후 1902년 대한제국 해군이 다시부활하고 군함이 도입될때 일정한 역활을 맡았을 것으로 추측은 됩니다. 이와는 별도로 대한제국 해군에서 지휘관의 이름이 기록된 이는 신순성 님인데,최초 군함들의 지휘를 맡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순성(愼順晟 1878~1944) 약력 -한성일어학교 -일본 동경상선학교 졸업(4년제) -갑종항해사 면허취득 -양무호 함장 -광제호 함장 -망국 후 해원양성소 실습교관 기록에는 자부심과 애함정신이 대단하셨던 것으로 되어있습니다.(1944년 타계)
[해군 소속 함정] (양무호) 양무호는 원래 1888년 영국 딕슨사에서 건조한 팰라스호(Pallas)라는 화물상선이었습니다. 배의 규모는 3천4백24t, 1천7백마력으로 원양 항로에 취항했던 것을 미쓰이물산이 25만엔에 구입해 일본-홍콩간 석탄운반선으로 사용했지만 배를 움직이는데 하루 43t의 석탄을 소모하며 별다른 이윤을 얻지 못하는 골칫거리로 남자, 이 배에 고물 대포를 걸어 놓고 대한제국에 매각을 타진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늘 그렇듯 우리의 기대 그 이상을 행하시는 고종께서는 앞뒤없이 충동구매를 합니다. 25만엔에 사서 9년간 쓴 배를 55만엔이란 거금에 넘겼으니 일본에 사기를 당해도 크게 당한 꼴이었죠. 이같은 사실은 독일 신문에도 크게 보도돼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으며, 황성신문도 “한명의 수병도 없는 상황에서 군함을 사들여 재정을 낭비했다(1903년 6월 1일자)”고 비판했습니다. 양무호는 인천에 닻을 내린 이후에도 배값을 지불하지 못해 4개월여 동안 일본 군함에 의해 인천항에 억류되는 수모를 당하다가 그 해 8월 22일 시운전을 거쳐 우리 군함으로서 정식 등록됩니다. 양무호의 초대함장은 박영효의 추천으로 관비 일본 유학생으로 선발, 동경상선학교(東京商船學校)에서 근대식 항해 교육을 받았던 신순성(愼順晟)씨가 맡았습니다. 신함장은 당초 일본에 건너가 해군사관학교에 진학, 국내에서 해군사관을 하려고 했으나 일본 해군사관학교가 일본인에게만 입학을 허락해 상선학교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양무호는 신함장을 비롯 72명의 대원이 맡았으나 배가 워낙 낡은 데다 당초 일본이 운항기술을 전수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또 군함의 연료인 석탄 대금조차 마련하지 못해 항구에 정박해 있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 러 일 전쟁시 일본 해군에 강제로 징발당해 첩보함으로 사용됐으며 전쟁 후엔 화물선으로 개조, 2년만인 1905년 7월 인천항으로 다시 돌아오는 비운을 맞게 됩니다. 이후 양무호는 군함의 임무를 펴보지도 못한 채 러 일 전쟁 후 1907년 부산항에서 선원실습용으로 사용되다가 1909년 일본 해운회사 하라다상점(原田商店)에 4만2천엔에 매각,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광제호) 양무호 문제로 속을 태웠던 우리 정부는 일본 가와사키조선(川崎造船)에 1천56t급 광제호를 새로 건조했습니다. 1904년 11월 인천항에 모습을 드러낸 이 광제호엔 신순성씨가 다시 함장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광제호는 3인치 포 3문을 장착하고 서해안 경비를 담당했습니다만, 그러나 하지만 광제호 역시 군함으로서의 역할을 단 1년만에 끝내야 하는 시련을 겪게 됩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인해 총독부 체신국 해사과에 소속, 인천항을 모항으로 서해안 연안관리시설과 세관 감시선으로 운영된 것입니다. 광제호는 1910년 한일합병이 공포되기 전까지만 해도 태극기를 게양하고 운항했습니다. 신함장의 장남인 '인천 한세기'의 저자 신태범박사는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을 공표하기 전날 밤 광제호에 달았던 태극기를 내려 일제 36년 동안 집에서 보관해 왔다”며 “1945년 해방되던 해에 한국 기선 취항식에서 일장기와 바꿔 달았다”고 회고했습니다. 이 태극기는 가로 1백42㎝X세로 82㎝ 크기의 대형기로 지금의 태극기에 비해 태극 중앙선의 경사를 급하게 그려놓고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계급체계] 아래 대한제국군 계급체계는 갑오경장때 제정된 육군장관직제(陸軍將官職制)를 거쳐 대한제국시기인 1899년,6월,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며 일단 완성된 계급체계를 따른것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명칭과 등급은 정-부-참체계이고 이 계급체계는 대한제국 망국 때까지 유지되었습니다 (해방후 일시적으로 정-부-참 명칭만 채용된적도 있군요) 병들의경우 지금과달리 직업군인체제고 모병에 응하여 군에 들어온 후 말단부터 시작해 최고 특무정교까지 진급이 가능합니다. 장교는 일종의 사관학교인 무관학교를 졸업하면 참위로 임관하게됩니다. [계급 체계] 대원수(大帥府) 황제 군 통수권 원수(帥府) 황태자 대장(大將) 1품 대장 시종 무관부 무관장 부장(副將) 정2품 중장 동궁배종 무관부 무관장 참장(參將) 종2품 소장 원수부 총장 정령(正領) 3품 대령 연대장(주로 시위대) 부령(副領) 3품 중령 연대장(주로 진위대) 참령(參領) 3품 소령 대대장 정위(正尉) 3품 대위 중대장 부위(副尉) 6품 중위 소대장 참위(參尉) 6품 소위 소대장 특무정교(特務正校) 무품 원사 사병진급 상한선 정교(正校) 무품 상사 부사관 부교(副校) 무품 중사 부사관 참교(參校) 무품 하사 부사관 상등졸(上等卒) 무품 병장 일등졸(一等卒) 무품 일등병 이등졸(二等卒) 무품 이등병 해군 계급은 관련 자료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