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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졌다고 포기하고 좌절하는 너희들이 더 나쁘다.
게시물ID : humorbest_46572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장비를정지
추천 : 112
조회수 : 4455회
댓글수 : 5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2/04/20 10:26:44
원본글 작성시간 : 2012/04/20 09:18:54




1950 년 8월 6.25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광주에서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남자가 하나 있었다.

이름은 윤상원

군복무를 성실하게 이행하고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주택은행에 입사해 서울로 올라온

그는 시대를 목격한 뒤 미래가 보장된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광주로 내려와 노동운동을 시작한다.

작은 플라스틱 공장에 노동자로 취직하여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역시 가난하고 못배운 사람들을 위해

그곳에서 들불야학을 이끌던 박기순이라는 여인을 만나 그 역시 야학의 선생님으로 활발히 활동한다.

둘은 어려운 와중에서도 사랑을 꽃피우며 노동운동을 전개해나갔다.

하지만 1978 년 과로와 연탄가스 사고로 박기순은 꽃다운 나이에 숨을 거두고

윤상원은 큰 충격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민주화운동을 이어나갔다.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죽고 이어진 전두환의 반란.

전두환은 서울역 광장에 모인 백만명의 민주화 시위대에게 군대를 동원해 학살극을 벌이려고 하지만

서울시내에서의 유혈사태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미국대사관의 경고로 서울에서의 학살극은 겨우 피하게 된다.

하지만 더이상 민주화시위를 놔뒀다간 큰 위기를 맞겠다는 전두환의 판단에 의해

1980년 5월 18일 광주는 공수부대에게 포위된다.





잔인한 학살과 지독한 저항.

광주 시민군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던 윤상원은 공수부대가 전남도청으로 들이닥치는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하였고 끝내 그곳에서 생을 마친다.

이때 그의 나이 30세.





1982 년 그들의 이야기를 안타깝게 여기던 동지들이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을

치뤄주었고 광주 5.18 희생자 묘역에 그들은 나란히 누워 마침내 휴식을 얻는다.





그리고 영혼결혼식 마지막에 불리웠던 그 노래.

김종률이 작곡하고 소설가 황석영이 작사한 그 노래.

노래를 입에 올리는 사람은 모두 체포하여 고문하겠다는 엄포에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된 이 노래는 점점 퍼져나갔고 마침내 민주, 시민운동 행사에서 국민의례와 같은

노래로 항상 불리우게 된다.







2010 년 이명박 정부는 광주민주화 항쟁 기념식에서 늘 불러웠던 이 노래대신 방아타령을 부르게 하려다

시민들의 극심한 반발에 부딪힌다.



광주항쟁 기념식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대통령 영상





나는 하나 묻고 싶은게 있다.

우리 앞에 가시밭길을 걸어갔던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아도 되고

길에서 군대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피를 쏟으며 저항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투표장에 가기만 하면된다.



프랑스는 대혁명이 일어난 1798 년부터 150 년의 기간동안 수많은 혁명과 황제제도로의 복귀,

수도가 점령당하는 전쟁, 매국노와 독립투사들의 치열한 대결을 거치며 195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민주주의를 확립했다.



이깟걸로 포기하지마라

이정도 일로 포기하고 조롱하기에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도 홀로 거대한 제국에 맞섰던 독립투사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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