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은 지지자들에게는 권력의 답답함으로, 비판자들에게는 민주주의의 수치스러운 시간으로 기록될 박근혜 대통령 당선 1주년이다. 정확히 1년 전 오늘 박근혜 후보는 문재인 후보를 상대로 100여만 표 차의 승리를 거뒀다. 새벽부터 기록된 높은 투표율로 인한 불안함 때문이었을까? 투표일 오전 박근혜의 입이었던 이정현 공보단장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문 후보가) 불법 선거운동을 하고 나서 당선된다고 해도 당선 무효투쟁을 할 수밖에 없다'고 위협했다. 그것은 투표하는 국민들을 상대로 한 위협이었다.
잠시 지난 대선 얘기를 더 하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 1주년인 지금까지 '대선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2년 9월의 '2시간 독대'... 그리고 자유로운 MB
지난해 9월 2일을 주목해야 한다. 이날 청와대에서 수상한 모임이 있었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과 박근혜 후보가 만났는데 두 사람은 2시간 가량 '독대'했다. 박 후보는 함께 간 최경환 의원까지 물리치고 MB와 단둘이 만났다.
박 후보가 독대를 좋아하는 정치인이었던가. 박 후보 캠프의 상징이었던 김종인씨가 지난 대선 당시 '(박 후보와) 독대인 줄 알고 나간 자리에 10명이 함께 있더라'고 한 발언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야당 대표의 단독회담 제의에 '5자회담', '3자회담' 등 수정제안을 내놓을 정도로 독대에는 거부감을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날의 독대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후부터 박근혜 캠프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독대 직후 박 캠프 공보위원이 안철수 캠프 측에 연락해서 '목동 거주 30대 여성' 운운하며 안 후보의 출마 포기를 종용하는 일(9월 4일)도 벌어졌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입수해 'NLL 파문'을 일으킨 것도 독대 이후였다. 그 사이에 국가정보원과 사이버사령부 등에서는 신나게 댓글을 달고 트윗, 리트윗을 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왜 전임자인 MB에게 한 없는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국정원 사건 등도 없었던 노무현 대통령도 취임 첫해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해 동교동 측과 불편한 상황을 연출한 바 있는데 박 대통령의 MB 챙기기는 상식을 초월한다. 바로 이 때문에 '9월 2일 독대'를 주목하게 된다. 함께 간 최경환 의원조차 알아서는 곤란한 무언가가 논의되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 박 대통령이 처한 상황을 놓고 보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자유로운 행보는 '믿는 구석' 없이는 불가능하다.
지난해 10월 18일에도 인상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김무성 선대본부장은 중앙선대위 국민소통본부 발대식에 참석해 'NLL 땅따먹기 하는 정치' 운운하면서 뜬금없이 "종북좌파에게는 절대로 정권을 내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NLL건으로 문 후보에게 '노무현 후계자' 이미지를 덧씌우려 끊임없이 시도했다.
대선 막판인 12월 14일 두 후보가 초박빙의 지지율을 보이며 선거 분위기가 달아올랐던 부산 유세에서 김무성 의원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낭독'과 같은 수준의 발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참 후에 공개된 사실,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은 국정원에만 보관돼 있었다. 김무성 의원은 누구에게서, 어떻게 대화록을 입수했던 것일까.
시간은 흘러 지난 대선의 가장 극적인 순간인 12월 16일 일요일 밤 11시와 조우하게 된다. 19일이 투표일이기 때문에 선거운동기간은 17, 18일 이틀 남은 상황에서 '국정원 김 직원' PC를 조사한 경찰이 야밤에 전격적으로 선거에 뛰어들었다. 당시 경찰의 발표는 초박빙 판세에서 박근혜 후보 쪽으로 판세를 기울게 만드는 적시타였다. 그로부터 3일 후 문재인 후보는 패배가 굳어지는 순간에 '승복 기자회견'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때의 경찰 발표가 '허위'였음을 알고 있다.
취임 이후, 국정원–검찰–국정원 그리고 검찰
▲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2차 대규모 촛불집회 '국정원에 납치된 민주주의를 찾습니다 2차 촛불문화제'가 2013년 7월 6일 오후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국정원 대선개입과 정치개입 진상 및 축소은폐 규명을 위한시민사회단체 긴급 시국회의' 주최로 열리고 있다.
박 대통령 취임 석 달이 지날 무렵 지금은 잊고 싶을, 되돌리고 싶을 악몽이 터져 나왔다. 검찰이 '국가정보원의 대선·정치 개입 의혹' 사건과 관련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기소한 것이다.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윤석열)은 6월 14일 원 전 원장에게 공직선거법 제85조 위반, 국정원법 제9조 위반 혐의를 적용해 불구속 기소했다. 두 혐의 모두 지난 대선 때 국가정보원이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한 의혹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명확해지는 것이 있다. 원세훈 기소에 대한 박 대통령의 태도가 바로 그러하다. 박 대통령과 원 전 원장은 무관하다. 임명권자도 아니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 보자면 취임 석 달 무렵, 전 정권의 국정원장이 대선에 개입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일 뿐이다. 이 무렵 야당의 요구는 '박 대통령 사과 및 재발방지 약속'이었다. 분위기상 그 당시에는 '유감 표명'으로도 해결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게 박 대통령은 '침묵'했다. 원 전 원장이 기소된 게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말이다.
청와대에서 서초구청에 연락해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아들로 지목당한 채아무개군의 가족관계등록부 조회·열람을 의뢰한 것이 6월 11일, 바로 이때였다는 점도 박 대통령의 태도에 의심을 갖게 만드는 대목이다. 결국 이 건으로 채 전 총장은 낙마하게 된다.
원세훈 기소 이후 박근혜 정부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둑이 제발 저린 격'에 해당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6월 24일 남재준 국정원장은 전격적으로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해 버린다. 그 때문에 잠시 동안 국민들의 관심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나눈 '246분 간의 대화'로 향했다. NLL을 포기했느니, 보고드린다는 공손한 말투를 썼느니 등이 잠시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실의 힘은 셌다. 노 대통령은 NLL을 일관되게 지켰고, 국민들은 더 이상 대화록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물타기는 실패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거대한 물타기 속에서 윤석열 팀장이 이끄는 수사팀은 끝없이 트위터를 파고 또 팠다. 10월 18일 수사팀은 트윗 건수를 대폭 늘려서 공소장 변경을 신청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에도 수사팀은 추가 공소장 변경을 통해 국정원 직원들이 개입한 트윗 건수가 121만 건에 달한다고 밝혔다.
121만 건이라는 수치는 국민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트윗 개수는 지난 대선이 그 자체로 '불공정'했음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1차 공소장 변경이 있은 직후 문재인 의원은 '지난 대선은 불공정했고, 박 대통령이 그 수혜자'라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지난 대선과정과 집권 1년 동안을 되돌아봤지만 흐름은 의외로 단순하다. 지난 대선 때 국정원이 도대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고, 그 역할은 조직의 수장까지 날려가면서 비교적 충실하게 검찰에서 담당해주었다. 검찰이 기소하자 다시 국정원이 등장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해서 흐름을 바꾸려 했지만 다시 공소장 변경이라는 사실의 힘으로 국민들은 비로소 지난 대선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닫게 됐다. 심지어 박 대통령 지지자들조차도.
그리고 오늘, 그동안 한 게 없어 비판할 게 없는 당선 1주년
지난 11월 22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에서 시국미사를 열어 '대통령 퇴진'을 주장할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그 주장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고 지나친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 이후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는 '퇴진' 요구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12월 18일에는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에서도 성명을 내고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포함해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로서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다. 박 정부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다. 이정현 홍보수석이 당선 1주년 브리핑을 하는 자리에서 "대통령이 하야하지 않아서 불통인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박 대통령의 복심인 이 수석이 무심결에 내뱉은 '하야'라는 말, 이 정도면 올해의 말 후보는 '종북'과 '하야'로 좁혀진 게 아닐까. 그 정도로 대통령 지위가 위태로운 형국에 이르렀다.
당선된 지 1주년, 18일 이정현 수석은 브리핑에서 업적으로 '원전 비리 및 전두환 전 대통령 미납추징금 환수, 공기업 개혁' 등을 언급했다. 공기업이 개혁됐는지는 미지수니까 논외로 하고, 앞서 언급한 두 개는 채동욱 전 총장의 업적이었고, 박근혜 정부는 그에게 모욕을 준 뒤 쫓아냈다. 그런데 그 업적을 박 대통령의 업적이라고 얘기하는 배포가 놀랍다. 이 수석은 '창조경제'에 대해서는 그 성과가 곧 나올 것이라며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동안 성과가 없었다는 표현을 세련되게 하는 수석의 언변이 돋보인다.
이 수석은 외교 분야의 성과에 대해 강조했다. 자신 있는 분야인 듯한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그는 "외교 분야의 경우 박 대통령은 그동안 30여 명의 외국 정상과의 단독회담을 통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역대 어느 대통령 못지않은 성과를 냈다"고 자평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면서 그 수준이 역대 어느 대통령 수준이라니 겸손인지, 미달인지 헷갈린다. 그리고 커다란 성과로 30여 명의 정상과 회담을 들고 있는 대목에서는 연민까지 느끼게 된다.
오늘로 낙선 1주년인 문재인 의원의 최근 발언이 박 대통령 처지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문 의원은 지난 6일 서울 마포구 한 북카페에서 열린 '팟캐스트 최고탁탁-응답하라 문재인' 공개녹화에 참석해서 "대선 불공정 문제들은 새 정부가 미안한 마음만 가진다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라 생각한다"며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음에도) 사회가 혼란하다면 우리가 국민을 설득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문 의원은 "만약에 현 정부가 끝내 성의 있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나도 민주당도 국민도 끝까지 싸워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지금까지 드러난 바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 국정원 직원들과 군 사이버사령부 직원들이 대거 투입됐다. 국가기관이 선거에 개입한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지난해 12월 16일 밤 11시에는 또 다른 국가기관인 경찰이 '거짓 발표'를 했고 이 발표가 선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지난 대선 최대 피해자는 공정한 룰에 의해 진행됨을 믿어 의심치 않고 투표장에 갔던 유권자들과 역시 공정한 선거인 줄 알고 '선거 승복'을 발표한 문재인 후보다.
시간은 숨가쁘게 흘러 당선 1년이 지났다. 당선 1주년 기념(?)으로 꼭 묻고 싶은 한 가지. 도대체 지난해 9월 2일 청와대에서는 무슨 내용의 독대를 나눴기에 나라가 이 모양이 되도록, 본인이 취임 당시 가졌던 국정 포부가 있었을 텐데 그것도 하나도 챙기지 못하면서까지 끝끝내 MB를 보존하려 하는가? 지난 행적을 되돌아보면 박근혜라는 정치인은 측근조차도 버릴 때면 가차가 없었다. 한번 도전한 의원들에게 두 번의 기회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독 MB가 누리는 호사를 보면 박근혜 1년인지 MB 6년인지 헷갈리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