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씨의 죽음 앞에 슬퍼한다는 것 김선일씨의 죽음에 온나라가 들썩인다. 촛불시위를 한다고 몰려나오고, 사람들은 저마다 검은 리본을 가슴에 달고 사뭇 슬픈 표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김선일씨의 죽음에 온나라가 들썩이는 것이 좀 불편하기도 하다. 한국 사람들이 이렇게나 자신과 상관없는 한 생명의 죽음을 자기 것인 양 생각하고 있다는 게 믿겨지지가 않는다. 내가 알기로, 대다수 한국 사람들은 자기 살기 바빠서 사람 생명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말이다. 지금껏 죽었던 다른 사람들, 직장에서 쫓겨나 울부짖다 자살한 비정규직 노동자, 서울시에 내야 하는 세금을 못 내 빚만 지고 자살한 비닐하우스촌의 빈민, 직장과 가정을 잃고 거리를 떠돌다 병에 걸려 죽어가는 노숙자, 그리고 돈 벌려고 한국 땅에 왔다가 다치고 죽어간 외국인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렇게 국민적인 분노가 없었던 걸로 아는데, 왜 김선일씨의 죽음에는 이렇게 분노할까. 분명, 그 죽음은 효순, 미선의 죽음처럼 정치적 죽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 죽음은 각종 매체에 보도되고 기록된 미디어적 죽음(이런 말을 쓸 수 있다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먹고 사는 걸 힘들어하다 죽는 사람에게는 ‘그게 인생’이라며 한숨만 쉬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죽은 사람에게는 과다한 동정이 쏟아진다.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없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눈에 한 번 보이고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봤다고 하면 대단한 게 생긴 것처럼 행동한다. 삶에도 차별이 있듯, 죽음에도 차별이 있다. 자신들과 나라와 관련된 죽음 앞에서, 또 미디어로 불이 붙여지고 보여주는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동정을 느끼고 슬퍼하지만, 그렇지 않은 죽음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무감하다. 그래서 나는 김선일씨의 죽음이 안타까우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잊혀져버리는 다른 죽음들을 생각하면 짜증이 난다. 죽음에도 차별이 있다 자신들과 나라와 관련된 죽음 앞에서, 또 미디어로 불이 붙여지고 보여지는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슬퍼하지만, 그렇지 않은 죽음에는 무감하다 그래서 잊혀져 버리는 다른 죽음들을 생각하면 짜증이 난다 김선일씨의 죽음은 미국의 개로 살 수밖에 없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전쟁터(이라크 혹은 기업체)에 가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한국의 사회적 상황이 맞물려 짜인 누비이불 같은 것이다. 김선일씨가 아랍어를 전공하고 미군에 군납하는 업체에서 통역 일을 했다는 것은 미국을 위해 일할 수밖에 없는 한국인의 상황과 일치한다. 이미 우리는 미군 밑에서 침략전쟁에 일조하는 부대를 둘이나 보냈고 추가파병을 추진하고 있다. 김씨의 살해자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오히려 미국이고, 우리는 이번 일로 미국을 비판하고 미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외쳐야만 한다. 그게 김선일씨의 정치적 죽음을 정치적으로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와 더불어 김선일씨의 죽음은 돈을 벌기 위해 전쟁터에 들어가야만 하는 이 사회 모든 사람의 은유다. 그 전쟁이 아무리 명분 없는 침략전쟁이어도 돈을 벌수만 있다면 가나무역은 이라크 땅에 가서 돈을 버는 것이다. 마치 똥 있는 곳에 모여드는 똥파리처럼 미군의 침략전쟁에서 한탕 하기 위해 미군에 군납하는 업체가 모여든다. 김선일씨 역시 그 군납업체에서 돈을 벌기 위해 ‘미군은 테러리스트고 부시가 싫다’며 테러리스트 앞에서 외친 자기 신념과는 상관없이 그 땅에서 일했다. 돈만 벌 수 있다면 그게 뭐든 상관 없는 이 전쟁 같은 삶, 그게 한국의 삶이고 가나무역의 삶이고 김선일의 삶이었다. 이라크는 아니지만 한국이라는 전쟁터에 사는 나와 당신 모두는 혹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렇다면, 김선일씨의 죽음을 슬퍼한다면, 이런 상황에 대해서도 뭔가 생각하고 울어야 한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답게 살지도 못하고 돈만 벌다 죽어야 하는 우리들을 좀 측은히 여겨야 한다. 그렇다면 김선일씨의 죽음뿐 아니라 빈민과 노동자, 여성, 장애인, 모든 약자들의 아픔과 죽음을 함께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 김선일씨의 죽음에 슬퍼하며 촛불을 들고도 다음날 아침에 길거리의 노숙자가 내미는 손을 모른 척 지나가거나 회사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착취하는 당신이라면, 당신은 위선자이거나 사회적으로는 미국이 이라크에 하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김선일씨의 죽음은 이 병든 세상에서는 생길 수밖에 없는, 그리고 어떤 나라에서는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죽음이다. 그 죽음이 이다지도 충격으로 받아들여지는 나라라면, 한국은 뭔가 가능성이 있는 나라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지 못했더라도, 이번 기회에 한국 사람들은 전쟁과 자본의 폭력 아래 희생당하는 모든 인간들의 죽음을 김선일씨의 죽음처럼 받아들이고 분노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눈물은 악어의 눈물이다. 결국 문제는 다시 자신의 삶으로 되돌아오는 것이고, 김선일씨의 죽음이 의미가 있다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의 죽음을 놓고 그 앞에서 있지도 않은 한-미 동맹이나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영향력 따위의 얘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뭐라 할 말도 없다. 그의 죽음에 조의를 표한다. 문강형준/무크지 <모색> 편집위원 퍼온글이구여 우리주변에서 일어나는 죽음에대해 한번 생각하게 하네여 태클은 사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