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 무렵 종이 울리고 사대문이 닫히면 거리는 조용해지고 남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이 시각에는 여성들만이 외출이나 산책을 하며 어두워진 거리의 정적을 가르고 있다.
혹 잘못해 이 시간까지 거리에 남아 있게 된 남성은 최대한 여성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며 귀가를 서둘러야 한다.
이때 여성들에게 접근하는 남성은 엄벌에 처해진다.
이 진기한 풍경이 19세기 말 서울 밤거리의 모습이었다.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I. B. Bishop)의 [학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1897]에 따르면 당시 한성에서는 밤이 되면 남성들에게는 통행이 금지되고 여성에게만 외출이 허용되었다고 한다.
이 제도는 제중원의 의사였던 미국 선교사 앨런 (H.N Allen)이나 남연군 묘 도굴범으로 유명한 프로이센 상인 오페르트 (E.J Oppert)등 당시 조선을 방문한 다양한 외국인들에게서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들 눈에 무척 낯선 풍경이었던 모양이다. 1895년에 통행금지 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조선 사회에서는 이처럼 밤의 거리가 여성들에게 양보되었다(손정목 [조선시대 도시사외 연구], 일지사, 1977).
물론 그러한 '양보'는 일차적으로 내외법에 의해 여성들의 낮 시간 바깥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던 데 대한 '보상'의 차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던 것 같다.
비숍이 "거리에서 남자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이 제도는 때로 폐지된 일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면 꼭 사고가 발생했으며 그로 인해 폐지되었던 제도는 더욱 강력하게 시행되었다"고 언급한 것은 이 제도의 또 다른 의미를 시사한다.
남성들이 밤에 다니면 '꼭 사고가 발생'하기 때문에 통행을 금지 했다는 것. 즉 밤에는 남성들이 사고를 일으키기 쉬우므로 '위험에 노출될 여성들'이 아니라 그 '위험요소를 갖고 있는 남성들'을 집 밖에 못 나오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치안 문제에 대한 선조들의 지혜로운 역발상 이라 할 만하다.
올여름 한 여대생이 거리에서 한 남자에게 납치, 살해되는 참혹한 사건이 발생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밤 늦은 시각에 외출을 했다가 봉변을 당했다는 이유로 "그 시간에 위험하게 '여자'가 왜 밖에 나갔나?"라고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의 조선 사람들이었다면 "그 시간에 위험하게 '남자'가 왜 밖에 나갔나?"라고 '정치적으로 더 올바르게' 말하지 않았을까?
2010년 9월 24일 중앙일보 이영아의 여론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