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바라봄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본 것만 해도 1주일 정도 되어 있었다. 사실은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서 있었을 것이다.하루에 몇 시간씩 그녀는 항상 한 장소에 서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게 이유라는게 가장 타당한 이유겠지만 그렇다면 1주일 내내 그곳에 서 있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왜 저렇게 서 있는 것일까. 궁금해서 창을 지켜 본 지 1주일이 되었지만, 알 수는 없었다. 그저 한 가지 알게 된 것은 어느 한 방향을 계속해서 그녀가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가만히 바라보면 가끔 미소를 띄기도 했다.
가만히 한 대상을 바라보면서 오랜 기간 있으니 자연스레 애착이 갔다. 나는 할 일이 없으면 그녀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이 딱히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가 애착을 갖고 있다고 자각한 것은 2일 전이었다. 목소리도 들은 적 없고 성격도 모르는 사람에게 애착을 느끼는 것은 이상한 감정일까? 그것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계속 그곳에 나온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끈기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을 것 같기는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자연스레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오늘도 별 일은 없었다. 나는 결심했다. 내일은 꼭 그녀에게 캔커피 하나라도 건네줘야지. 눈을 맞으면서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어딘가 마음 한 켠이 불편했다.
201X. 12. XX
오늘 드디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주려고 했던 캔 커피도 주었다. 가장 따듯한 것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가장 깊은 곳에서 덥혀지고 있던 것을 무리하게 꺼냈다. 손에 아주 경미하지만 화상을 입은 듯 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별로 후회는 하지 않았다.
어제 서 있는걸 보고 왔다고, 춥지 않느냐고 내가 물었다. 낮선 남자가 말을 걸은 것에 당황한 듯 싶었지만 가지고 온 캔커피를 받고는 마음이 풀어진 듯 했다. 그녀가 감사하다고 말하며 살짝 웃었다. 그래, 내 손의 따끔거림은 이걸 위해서라면 아무래도 좋다. 그녀가 뭘 하고 있었는가를 묻는것은 잊어버렸다. 예상치 못한 미소에 마음이 풀어졌기 때문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좋아서 그랬는지는 모른다. 별다른 말 없이 그렇게 헤어졌다. 그녀는 왜 그곳에 서 있던 건지에 대한 의문은 해결하지 못 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연애를 해본 적 없기 때문일까? 하지만 가슴이 마구 뛰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아마 사랑은 아닐 것이다. 그저 애착과 호기심이겠지.
201X. 12. XX
캔커피를 오늘도 가져갔다. 그녀도 고마워했다. 오늘은 손을 다치지 않고 꺼냈다. 뭔가 이득을 본 느낌이었다.
그녀에게 뭘 하고 있느냐고 묻는것을 오늘은 잊지 않았다. 그녀는 살짝 웃을 뿐 대답하지는 않았다. 나는 조금 더 자세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뭐라고 물으면 될까? 고민하는 사이에 그녀가 잠시 나 말고 다른 곳을 응시하는 것을 보았다. 공원 바로 앞에 있는 무슨 가게가 보였다.(무슨 가게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전면이 유리라서 가게 내부가 잘 보였다. 내부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다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낙심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엇에 낙심한 것인가 궁금해져 왔다. 내일은 그 가게에 한번 들어가 봐야겠다.
오늘도 별 일은 없었다. 나는 다시 돌아와 창밖으로 그녀를 보았고, 그녀는 곧 돌아갔다. 오늘은 좀 이른 편이었다.
그 가게는 뭘 하던 곳이었을까? 내일 가 봐야 겠다.
201X. 12. XX
그녀가 오기 전 시간에 가게에 들어갔다. (가게는 서점이었다.) 그녀가 거기에 서 있던 이유는 아마 이 가게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 맞은 것 같다. 가게 점원중엔 꽤나 미형의 남자가 있었다. 아마도 이 남자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뭔가 기분이 나빠져서 한참 그곳에서 서서 책을 읽었다. 읽다보니 재미있어서 시간을 너무 오래 보냈다. 한권을 다 읽어버리고 사지 않는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그 책을 샀다. 남자 점원의 미소가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대답을 건성으로 하고는 그냥 나왔다.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기 때문인지 나오면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어색하게 인사했다. 그녀가 있을 시간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녀에게 가서 나도 모르게 책을 건네주었다. 캔커피를 주던것이 습관이 되었나 보다. 그녀는 "오늘은 캔커피가 아니네요?"라고 했다. 그 말에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녀도 따라 웃었다. 그냥 읽어보니 재미있다고 말하고는 그대로 인사하고 돌아왔다.
조금 더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오늘은 그녀를 지켜보는 것을 잊어버렸다. 아쉽다. 오늘은 그녀가 무엇을 한 것일까.
201X. 12. XX
오늘은 기분이 나쁘다. 아침의 시작부터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서 서점으로 오늘도 가 보았다. 그 남자 점원이 캔커피 하나를 마시다가 어서오시라는 인사를 했다.그냥 그대로 나가버렸다. 오늘은 그대로 그녀를 보지 못했다.
201X. 12. XX
어제는 차마 일기장에 쓰지 못했지만 나는 그녀가 다른 남자를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쩐지 마음이 공허해져서 모든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나는 공허하다. 나는 이제 그녀를 바라보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바라보는것은 그 남자지 내가 아니다. 그녀가 나를 보도록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랬으니까. 내가 그녀를 지켜보았으니까.
며칠 전 내가 쓴 것은 틀렸다. 나는 멍청했다.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애착이라고 썼을 때 알아야 했다. 왜 바라보기만 했을까.
나는 그녀를 포기하기로 했다.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그녀를 바라볼 때 그 외에 다른 것들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듯이.
그쪽은 모르겠지만, 오늘 처음으로 실연을 한 것 같다. 그리고 그걸 깨닫고 난 이후에야 내가 지금껏 해왔던 것이 무엇인지 안 것 같다.
그건 아마도 첫 사랑이었던 것 같다.
201X. 01. 01
-----------------------------------------------------------------------------------
시험기간에 없는시간 쪼개서 썼습니다.
(다시 읽으니 맘에 안들어서 전체적인 수정 후 재업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