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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역사소설]대한제국 200년사 -(8)제헌의회(制憲議會)
게시물ID : history_469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2013년체제
추천 : 41
조회수 : 1268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2/06/13 20:23:58
정약용이 재임 20년만에 고령과 병환을 이유로 은퇴하자, 순조의 대리청정을 맡고 있던 효명세자의 장인인 조만영이 제국당의 지지로 새 총리대신을 맡게 되었다. 따라서 외척인 풍양 조씨(豊穰 曺氏) 일파들이 조정에 자연스레 득세하게 되었다. 


순조의 대를 이을 유일한 아들인 효명세자가 스물 두 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해 버리고, 순조마저도 효명세자가 죽은지 4년 뒤인 즉위 27년 만인 44세로 세상을 하직하게 되자, 순조의 손자이자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이 불과 일곱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1834년) 


갑작스런 왕실의 잇단 죽음으로 권력에 공백이 생기자, 총리대신 조만영은 자신의 딸이자 헌종의 친모인 조대비(효명세자의 부인)로 하여금 어린 헌종의 수렴청정을 맡게 해 황제가 행사하게 되어 있는 외교, 국방권 마저 실질적으로 장악하려 들었다. 


그러나 조만영의 이러한 시도는 그 동안 순조의 견제와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으로 잠시 권력에서 밀려나 있던 안동 김씨 일파의 강력한 반발로 주춤하게 되었다. 헌종 즉위 직후 열린 내각의 첫 회의에서는, 향후 권력의 향배를 놓고 이해관계가 서로 확연히 다른 각 정파들끼리 치열한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국왕이 아직 어린 나이시니 국정은 생모이신 대비께서 맡아보시도록 하셔야 할 것이오" 

헌종의 외할아버지인 총리대신 조만영이 고압적인 어투로 입을 떼었다. 조만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곳곳에서 서로 다른 반응들로, 실내는 순식간에 웅성거리며 술렁였다. 

"어허 조대감, 거 무슨 말씀이시오. 아직 대왕대비이신 순원왕후께서 두 눈이 시퍼렇게 살아 계신데 어찌 대비께서 수렴청정을 하신다는 말씀이시오. 더구나 대비께서는 부군인 효명세자께서 왕위에 오르시지 못하고 승하하셨기에 중전의 자리에 오르시지도 못하셨는데 어찌 수렴청정을 맡을 수 있다는 말씀이시오" 


순조의 비이자 헌종의 할머니인 순원왕후의 친정 오라비인 부총리 김좌근이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조만영과 김좌근의 설전은 각료 회의 내내 서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팽팽하게 평행선을 그으며 진행되었고, 국왕의 수렴청정을 누가 맡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집권세력인 제국당은 대왕대비 일문인 안동 김씨와 대비 일문인 풍양 조씨를 지지하는 정파로 서로 나뉘어져 크게 분열되었다. 


집권당인 제국당이 수렴청정의 자리를 놓고 서로 이전투구하며 정쟁을 일삼자 야당인 입헌당은, 1830년 7월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립의 예를 들며, 이 기회에 왕실은 명예직으로만 존재하고 일체의 정사에 간여할 수 없도록 하는 완전한 입헌군주제의 성립을 주장하며 제헌의회 소집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입헌당은 이때까지 정약용의 영도와 조일전쟁으로 인해 자신들의 주장을 보류해 왔으나 새로이 총리대신이 된 조만영과 제국당이 노골적인 왕정복고 정책을 취하자 전면적인 투쟁에 나선 것이었다. 입헌당은 전국 각지를 돌며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라는 군중집회를 개최하여 인민들에 대한 직접적인 호소에 나섰고, 정약용의 치세동안 민주적 정치환경에 익숙해진 인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 내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조선대생 수백 명도 동맹휴학을 하고 광화문 앞에서 천막을 치고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는 철야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이에 서울 시민들도 동조하여 날마다 수천 명이 광화문으로 몰려들어 조만영 내각과 제국당을 규탄하는 집회와 시위를 벌여 나갔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 아래 고궁의 긴 돌담을 따라 곱게 늘어선 노란 은행잎들이 맑은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며 하나 둘씩 포도로 떨어지는 어느 가을 날 오후. 단아한 인상의 아직 앳되어 보이는 한 젊은이가 수 천명의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열리고 있는 <만민공동회>에서 절도 있는 발걸음으로 단상에 올라섰다. 


"존경하는 서울시민 여러분, 그리고 고생하고 계시는 조선대 후배 여러분. 무릇 나라의 주권은 국왕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민 여러분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영국이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된 이유는 바로 인민의 대표들로 구성된 의회가 있어서 그 곳에서 인민들의 뜻과 바램을 잘 존중해서 정치를 해 나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또 불란서에서는 왕과 귀족들이 저희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인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한 결과 인민들이 들고 있어나 바로 얼마 전에 샤를 10세(CharlesⅩ)라는 독재자 왕이 쫓겨나고 루이 필립(Ruis Philippe)이라는 새로운 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왕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명예직으로만 있고 실제로 정치는 바로 인민 여러분들이 뽑은 의회에서 맡아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이 나라가 튼튼해지고 잘 살려면 왕이 국정을 혼자서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고 인민 여러분의 지혜와 생각을 잘 존중하고 반영해서 정치를 이끌어야만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얼마 전에 돌아가신 정조대제처럼 훌륭하신 성군께서 우리 나라를 이렇게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놓으셨고 지금 왕위에 오르신 국왕 전하께서도 영명하시기 이를 데 없지만, 국정을 돌보기에는 아직 워낙 나이가 어리신 까닭에 인민의 대표자들과 두루 상의하셔서 선정을 펼쳐셔야 하는데, 지금 임금께서 어리다고 외척들이 정치를 자기들이 맡아 하겠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인민들을 업신여기고 자기들 집안 몇몇끼리 다 해 먹겠다는 거와 다름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 분들도 다들 훌륭하시겠지만 안동 김씨네와 풍양 조씨 문중에서 태어난 사람들만이 이 나라를 책임져야 한다는 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한 나라의 주권은 무릇 인민들에게만 있고 인민의 대표자들로 의회를 구성하고 법을 만들어 나라를 운영해야만 그 나라가 부강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입헌당은 헌법을 만들기 위한 제헌의회를 소집할 것을 인민 여러분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강력히 촉구하는 것입니다." 

청년의 간결하면서도 힘찬 연설이 끝나자 군중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으로 화답하였다. 

"아직 새파란데 참 똑똑하구먼. 대체 누구지, 저 젊은이가?" 
"저기 바로 박지원 대감 손자 아닌가. 조선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지. 영판 할아버지 닮았어. 거 이름이... 맞다, 박규수라 그러지 아마" 


조선대를 졸업하고 바로 입헌당에 입당한,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불과 20대의 나이로 〈만민공동회〉를 기획하고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일약 입헌당의 차세대 지도자로 부각되어 정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만민공동회>가 연일 대성황을 이루자 위기감을 느낀 조만영과 제국당은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나, 군 총사령관 홍경래는 인민의 군대인 제국군이 인민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댈 수 없다며 단호하게 군대 동원을 거부하고 나섰다. 


안팎으로 수세에 몰린 조만영은 전쟁영웅이자 군 총사령관인 홍경래의 눈치를 살피다 군대를 동원한 사태의 수습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결국 수렴청정을 거두고 입헌군주제로의 헌법개정을 약속하게 되었다. 이것이 대한제국 최초의 시민혁명으로, 영국 의회가 왕실의 양보를 얻어낸 명예혁명에 비견하여 조선의 명예혁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1834년) 


명예혁명으로 조만영이 실각하고 인민의 절대적인 신임과 지지를 받고 있던 홍경래를 총리대신으로 하는 과도적인 거국중립내각이 구성되어 입헌군주제를 골간으로 하는 헌법 제정에 착수하게 되었다. 제헌의회를 수립하기 위한 선거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제국당과 입헌당은 선거인단을 구성하는 문제로 첨예하게 충돌하게 되었다. 


제국당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공히 양반에게만 주자고 주장하는 데 반해, 그런 구도에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입헌당은 양반들끼리만 구성하는 의회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라고 강력히 반발하고 나서 논의는 초반부터 난항에 빠져들었다. 양대 정당의 입장 차이가 너무 현격하기 때문에 협상에는 좀처럼 진척이 없는 반면에 각 당의 강경파들은 날치기 처리를 통한 강행 통과와 장외 투쟁 복귀를 각각 주장하며 점차 파국으로 치달아 가게 되었다. 


양당의 협상이 좀처럼 타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게 되자, 정계에서 은퇴하여 고향인 남한강변으로 낙향해 있던 정약용이 서울로 올라와 양당의 영수들을 연쇄적으로 만나 중재에 나섰고, 새로이 거국중립내각의 총리대신을 맡은 홍경래도 양당의 협상이 결렬되면 군부가 직접 나서 정권을 접수할 수도 있다는 은근한 압력을 가해 결국 두 정파는 서로 조금씩 양보해 서둘러 타협안을 도출해 내게 되었다. 


양당 영수회담에서, 초대 선거에 한해서는 양반의 서얼한테까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주고 차기 선거부터 차츰 그 범위를 넓혀 나가기로 하는 한편, 제헌의회 의원의 임기를 길게 10년으로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타협안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제국당 내 강경파의 반발로 자칫 제헌의회 구성 자체가 어려워 질 수 있다고 판단한 입헌당의 지도부는 일단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판단하여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협상안 이나마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법 타협안이 알려지자, 고등교육의 혜택으로 의식적으로 각성되고 활발한 산업활동으로 어느 수준의 부를 형성하는데 성공한 시민계급들이, 기대했던 자신들의 정치적 진출이 완전히 봉쇄되자 가장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으나 차기 선거부터의 참여를 약속 받고 양당의 합의안을 수용하게 되어 격렬했던 시국은 한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하늘이 열리고 조선 땅에 왕조가 들어선 지 오 천년만에 최초로 인민의 대표기관이 권력을 갖게 되는 역사적인 총선이 전국적으로 치러지나 일반 평민들의 참여가 봉쇄된 터라 양반들만의 잔치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법률의 정비에 따른 각종 원칙의 확립과 공평한 과세의 기준이 마련되기를 기대하는 일부 선진적인 시민계급의 지대한 관심과 후원 속에 선거는 열띤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제헌의회는 총선 결과 정원 100명 중 제국당 44, 입헌당 22, 보수당 18, 기타 군소 정당과 무소속 16석의 분포로 나타났다. 제국당과 입헌당의 양대 구조로 치러지리라는 애초의 예상과는 달리, 양반들에게만 투표권을 준 결과로 보수당의 선전이 두드러졌다. 정조유신 이후 기득권을 상실하고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던 조선봉건사회의 전통 양반세력들이, 보수적인 전통가치의 옹호와 영국 등 서양 오랑캐의 배척을 주장하고 나선 강경 유림으로 구성된 보수당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여 이들이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서는 의외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었다. 


절대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한 제국당은, 보수당과의 연정을 주장하는 노장층과 수구세력들의 부활을 경계하여 차라리 입헌당과의 공조를 주장하는 소장층과의 분열로 혼란스러워지나 결국 내각은 일부 무소속이 가세한 제국당과 보수당의 연정으로 구성되게 되었다. 


새 총리대신에는 보수당내 영남지역 유림들의 지지까지 보탠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친정 오라비인 김좌근이 헌종의 외할아버지인 조만영을 누르고 당선되어 안동 김씨 일파가 다시금 득세하는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정조에 충성하여 정조유신에 참가했던 공신들과, 이들과 뜻을 같이하는 소장층은 제국당에서 탈당하여 일부가 입헌당에 합류하게 되어, 제헌의회의 최종적인 의석 분포는 제국당과 보수당의 연립여당 61, 야당인 입헌당 33, 기타 6석으로 정리되었다. 당의 결성 이유였던 제헌의회의 구성에 일단 성공한 입헌당은 제헌의회의 수립과 함께 당명을 자유당으로 바꾸게 되었다. (1835년) 


다산 정약용이 76세를 일기로 서거하자 황실과 내각은 황제에 버금가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이례적으로 황제가 제배하는 예우를 갖추었다. 7일간 전국의 모든 관공서와 학교, 공장과 상점까지 문을 닫고 정약용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영국 정부도 갓 즉위한 빅토리아(Victoria) 여왕이 직접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문을 보내 왔다. 

정약용의 죽음으로 중재자를 상실한 제국당과 자유당의 충돌은 날이 갈수록 더욱 날카로워져 사사건건 제국 의회에서 맞붙게 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영국은 본격적으로 아시아 경략에 나설 채비를 갖춘다. 영국은 본래 중국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먼저 조선을 식민지화 계획이었으나 유럽에서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전쟁을 치르느라 그 시일을 미루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조선의 사회체제가 인도 등 여타 식민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조직되어 있고, 지배층을 구성한 지식인들의 지적 수준이 서구 열강의 수준을 능가하는 처지인데다 일반 인민들의 국가와 왕조에 대한 애국심과 충성심도 대단하여 섣불리 야욕을 드러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 정부는 정동에 있는 영국대사관을 통해 은밀히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으나, 최근 30여 년간에 급속도로 발전한 산업화와 두 차례의 전쟁으로 막강해진 군사력을 감안할 때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더구나 빅토리아(Victoria) 여왕은 영국 왕실과 상류사회에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던 동양의 선비 정약용의 고매한 인격의 단아함과 신비로운 사유(思惟) 세계를 흠모해 오던 터라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에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하게 된다. 


여기에 옥스포드(Oxford)와 캠브리지(Cambridge) 등 영국의 주요 대학에 유학을 다녀 온 조선의 유능한 젊은 학자, 관료들과 학창시절부터 오랜 교분을 쌓아온 진보적인 소장파 의원들의 우호적인 자세도 여기에 한 몫 거들게 된다. 자유주의적인 휘그(Whig)당과 보수주의적인 토리(Tory)당에 의해 상호 견제되는 의회 민주주의의 활성화도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통치 시도를 저지하는데 유리한 정세로 작용하였다. 


영국의 관심은 어차피 조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시장을 갖고 있는 중국에 있는 것이니 만큼 중국에 진출하는데 있어 여러 가지 방면으로, 중국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대한제국의 도움을 받으면 자신들의 군사적 희생도 반감 될 수 있다는 계산을 최종적으로 내리게 되었다. 영국은 본격적인 중국대륙 진출을 위해 내각과 군부, 동인도회사 등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다각적인 검토에 착수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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