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는 시인이 되는 시기라고, 저는 표현합니다. 슬픔을 알게 되고 수만가지 엇갈림이 포착되며 영원을 지각하게 되는 처음의 순간, 그 이후부터 이 갓 태어난 시인들은 이를 분출하고 싶어해 안달나게 됩니다. 예전에는 시와 편지를 쓰곤 했습니다. 누군가는 그림을 그렸고 누군가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자연스레 어느정도는 유치해질 수 있습니다. 순수한 욕망에 휘둘리던 유년과 달리 관계맺음이 새롭게 재편성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술의 미덕이라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남아있음'인데 관계맺음에 서투른 아이가 이를 고려하며 창작하기까진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는 응당 기성세대가 품어가야 할 부분입니다. 표현을 할 때 자기만이 아닌 모두를 생각하며 표현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소통과 문화를 사랑하는 어른의 의무입니다. 그래야 아이 또한 올바른 표현과 올바른 사교에 대해서 자연스레 깨우치게 될테니까요. 하지만 현재 보이는 모습들, 그리고 제 과거를 비추어보았을 때 '정제되지 못한 아름다움'들을 보호해주고 가꾸는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저 조롱거리가 되었을 뿐이죠. 조롱을 피해 아이들은 무얼 하게 되었나요. 그 수줍은 마음 지키려고 미니홈피에나마 끄적대고 작금 보이는 유치한 행위를 페이스북이나 블로그에 게시하는 것 뿐이죠. 시가 싫어진 게 아닙니다. 시를 좆을 때 받을 경멸을 피해 저곳으로 달아난 것입니다. 우리의 경멸하는 행위 자체도 안타깝지만 거기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후일 예술가들를 거세하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가들이 없는 사회를 상상해보세요. 당장이라도 이미 없는 듯이 보이지 않나요? 저에겐 적어도 주류 음악계에 한해서 그렇게 보입니다. 미래가 없는 음악들, 보존될 수 없는 음악들, 후손에게 자랑할 수 없을 유치한 음악들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정제하지 못하는 것은 창작의 순간 지나치게 자기자신과 그 순간만을 고려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어른의 이기심과 개인주의를 보고 배운 것 뿐입니다. 우리가 그런 모습들을 걷어내고 이들에게, 이 애처로운 21세기 소년소녀에게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건강한 청춘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아래는 황동규 시인께서 학창시절 쓴 시입니다.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