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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 이상
게시물ID : readers_470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소을
추천 : 1
조회수 : 25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02 00:39:09

짧게나마 써봤습니다 :3




이상(想) 

W. 소을素乙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조용히, 소리도 없이 내리던 함박눈이 어느새 꽤 쌓여있다. 한걸음, 한걸음 그녀를 향해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발자국이 새겨진다. 어느 겨울날의 새벽, 눈이 소복이 쌓인 그 땅에는 나와 그녀만이 서있다. 가로등의 불빛이 비춰진 연한 주홍빛 길거리에서 나와 그녀는 서로를 마주본다. 주위는 점점 조용해진다. 사르륵 사르륵 하며 눈이 내리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한 지금 시간이 돼서야 우리가 만났다. 고대하고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억겁의 시간이 흐른 듯 했다. 서로의 숨소리만이 오고 가는 상황에서 말이 없는 그 시간이 말이다. 손이 뻣뻣해져간다. 이게 추워서 인지 아니면 긴장이 돼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장갑을 끼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 녹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손을 뻗으려 했지만 그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의 이상형이다. 아니, 이상향이다. 그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서 살아간다. 어느 일을 착수할 때도 그녀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녀라면 이 일을 승낙할까? 아니면 거절할까, 그리고 이 일을 어떻게 풀어헤쳐 나갈까? 그녀라면, 그녀였다면, 만약 내가 그녀였다면. 소란했던 머릿속이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금 적막에 휩싸였다. 우리는 아직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눈 내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우리는 말없이 움직였다. 그녀가 앞장서고, 난 그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숨이 차 다리를 짚고 그 자리에 머무르면 그녀가 계속해서 걷다 좀 멀리 떨어져있다 싶으면 멈춰 나를 기다린다. 그녀의 차분하고 다정한 표정이 눈에 밟혀 나는 발을 재게 놀렸다. 한시바삐 그녀의 옆에 서서 걸어야 하는데 내가 유지할 수 있는 거리는 고작해야 그녀의 두 발짝 뒤였다. 용기를 내어, 노력 아닌 노력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가려 하면 그녀는 그것을 어떻게 눈치를 챈 것인지 조금 더 걸음을 빠르게 하고 내게서 조금 더 멀리 떨어진다.

겨우 발길이 닿은 곳은 산이다. 이 마을에 산이 있던가? 하는 의문이 잠시 들었지만 재촉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 둔다. 등산로를 진입하자 더욱 말이 없어진다. 사박사박 하며 신발 밑창의 모양 따라 눈이 으스러진다. 망설임 없이 뻗어나가는 그녀의 발자국에 눈이 다시 쌓인다. 그리고 난 또 그것을 으스러뜨린다.

앙상한 나목들에 눈이 쌓였다. 마른 가지 하나를 꺾자 그 위에 쌓여있던 눈들이 우수수 떨어지며 덩어리졌다.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이것은 쉬고 싶다는 무언의 항변이다. 그러나 그녀는 매정하게도 계속해서 움직인다.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아 숨을 고르니 그녀는 이미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난 거친 돌밭을 뛰어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녀의 옆자리를 향해 미친 듯이 내달려 온 결과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정상이다. 눈으로 뒤덮인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새하얀 물감으로만 채색된 한 폭의 그림 같다. 풍경에 젖어 감상하는 것도 잠시, 서늘해진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장소도 장소거니와 계절도, 눈이 오는 날씨도, 찬 새벽도 모두 추운 것들뿐이다. 아직도 내려다보이는 마을의 풍경에 집중해있는 그녀를 향해 조심스럽게 팔을 뻗었다. 그녀는 새침하게 나의 손을 툭 쳐냈다.

 

이만 갈까? 내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춥지 않은 건가? 하는 의문을 가질 찰나의 시간에 그녀는 이미 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와 내가 서있던 곳에서 보였던 풍경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저 삭막한 땅덩이만 보일 뿐이다. 우리가 서있던 산의 정상 같은 것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도, 그녀가 있던 곳도 내겐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같이 땅과 마주하며 산산이 부서졌다.

 

그녀는 내 그림자이자 빛이었다. 희망이고 기회였다. 난 그저 그녀의 뒤를 좇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바라지 않는다. 그녀에게 다다르는 것이 내 삶에서의 종점이나 마찬가지이기에.

항상 그랬다. 나는 그녀를 찾고, 쫓고, 뒤따를 뿐이었다. 그녀는 멀리서 나를 기다리는 듯 했지만 막상 내가 숨이 차오를 만큼 다급하게 그녀를 따라오면 아직 부족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사라지곤 했다.

나의 이상향은, 조금이나마 닮아간다고 생각했을 때쯤이면 다시 멀어진다.

그녀와 내가 마주한 채 눈을 맞던 그 거리엔 나 혼자만이 남아 망연히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 어느덧 눈은 그치고 소슬하니 찬바람만 불고 있다. 어슴푸레한 새벽이 지나고 해가 오른다. 눈이 녹기 시작한다. 나는 머리에 쌓인 눈을 대강 털어내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간다. 새끼발가락을 문턱에 찧었지만, 아프지 않다.

 

눈을 뜨고 비듬을 털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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