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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와 장평대전 -2
게시물ID : humorbest_47092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춘풍설
추천 : 12
조회수 : 1882회
댓글수 : 0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2/05/04 11:29:02
원본글 작성시간 : 2012/04/30 23:08:45
장평대전 長平大戰

BC 260년에 벌어진 전국시대의 막바지이자 전국시대 전투의 화룡정점을 찍는 전투입니다.
아. 장평대전하면 무슨전투이지? 하고 처음들어보시는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워낙 유명한전투이라 역사를 좀 안다하면 다 아는 그런 전투입니다. 이 전투로 인해 조나라 장정 30~40만이 생매장당하고 조나라는 장정수를 복구못해 빌빌거리다가 진나라에게 꿀꺽 삼켜져버렸지요.
화약무기가 발명되기전에 발생한 희대의 학살사건입니다. 이 장평대전이 벌어진곳에서 유골이 발견됬다고도 합니다.

장평대전의 원인은 한나라의 상당上党지방을 낼름삼켜버린 조나라때문에 일어난거라고 제가 1부에 써놨습니다. 당연히 진나라로써는 빡도는거지요. 그래서 진은 조나라를 공격하러 들어갔습니다.

사실상 그래도 그당시 국가중에 진나라를 이길수있는 국가하면은 초나라가 겨우 대등하게 싸울수있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백기에게 시달려서 초나라도 한수접어줬습니다.

아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당시 조나라는 전국 사군자라고 인물이 하나있었지요 조의 평원군입니다만 이사람은 상당태수가 상당지역을 준다고할때 낼름받아먹으라고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립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조나라의 희대의 명장 염파는 군사적 관계를 잘알고 있었기에 반대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의 효성왕은 병크를 저질르고 말았지요. 상당지방을 낼름삼켜버렸습니다!

오오미 이게 왠걸! 진나라에서는 당연히 빡돌아버렸습니다. 당연히 진은 조나라의 배때지에다가 칼빵을 쑤셔넣기위해 상당지방으로 원정을 갔습니다. 당시 장평대전 초기의 사령관은 백기가아니고 왕흘이라는 장수였습니다. 하지만 진의 의도대로 상당지방을 점령하지못하였습니다. 이 진나라의 군세를 막은 장수는 위에 써있는 백전노장인 염파가 진의 군대를 막았지요. 염파는 진나라군사를 함부로 건드리지 않고 장기전으로 질질끄는 수법을 썼습니다. 당연히 진나라의 대군은 보급로의 문제로인해 고민하던차에 염파를 경질시키는 이간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사령부에는 왕흘빼고 대신 인간백정인 백기를 투입했지요. 그 당시 진나라의 정치구조는 범수와 백기의 대립구조라고 생각하시면됩니다. 범수는 당시 진나라의 재상이었습니다. 범수는 당시 백기를 상당히 견제하였습니다. [장평대전 후에 백기는 실각당해 자살을 명받고 죽긴 하였지만 범수는 그후 재상자리에 물러나 띵가띵가 잘살고 죽었지요.]

범수는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노림수를 썼습니다. 실패하면 쪽박이고 성공하면 대박인 그런 노림수를 썼지요. 범수의 노림수는 맞아떨어졌습니다. 장평에서 진나라가 조나라를 이긴것입니다. 당시 진나라는 염파를 내쫒기위해 이간책을 썼는데 진나라는 그 방법은 조나라에게 소문을 퍼뜨리게하였습니다. 소문의 내용은 '염파보다 조괄이 훨씬 낫다'라는 내용의 소문이지요. 당연히 조의 효성왕은 팔랑귀인지 염파를 뻥 내쫒고 그자리에 조괄을 앉히게하였습니다. 당시 조의 재상인 인상여는 반대하였고 조괄의 어머니도 반대하였지요. 

아. 조괄이 누구냐하면은 조나라의 전성시대를 이끈 인상여 조사 염파 이목중 조사의 아들로써 조사는 이름을 날리는 명장으로써 조를 진나라와 대등하게끔 만든 장수입니다. 하지만 그의 실책중 하나인 그의 아들인 조괄은 신동으로 소문났지만 인망이 부족하고 성격이 소인배적 성격[...]이고 오만하였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나라를 말아먹을 성격인겁니다. 아무튼 이런 성격의 인물이 조나라 전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장평대전을 이끌었으니 말을 다했습니다. 조괄은 자신의 병법을 맹신한나머지 백기의 임기응변을 당하지 못하고 한순간에 밀려버렸습니다. 또한 진나라의 신속한 기마부대가 조의 보급로를 댕강 잘라버렸지요. 조괄은 이에 신속하게 대처하지못하고 어처구니없는 병크를 저질렀는데 그것은 바로 포위망을 뚫기위한 돌격[...] 당연히 조나라는 뚫지못하고 조괄은 고슴도치가 되어 사망하였습니다. 

지휘관을 잃은 조나라는 진에게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식량도 부족하였을뿐만아니라 사기도 말이아닌지라.]

조나라 군사가 항복한후 백기는 한순간에 조의 40만대군을 덜컥 받아버렸습니다.
하지만 백기는 여기서 갈림길에 섰습니다. 진으로 대려가거나 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거나. 둘중하나를 선택하는 기로에 놓여있었습니다. 왜냐하면 30~40만이나 되는 군사를 먹일 식량이 부족하였던것이 큰 이유였습니다.

백기는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렸고 이 결정은 후에 역사가들이 '희대의 학살극'이라는 타이틀이 붙어질정도로 잔인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바로 조나라의 30~40만군을 생매장 시키는것으로 결정을 내린것입니다.

그날. 조의 대군은 장평의 땅에서 생매장을 당하였습니다.

이후 조나라는 백기를 무척싫어하고 증오하였고 조나라는 이로 말할수없는 인적 물적 자원을 감당하지 못하여 빌빌거리다가 진에게 흡수당하였습니다.

이 장평대전은 전국시대가 막바지로 향하고있을때 그 막바지의 가속페달을 밟게하는 역할을 하게되었으며 전국시대 패권구조가 진으로 쏠려버리는 역할을 하게되었습니다.

장평대전후 조의 명장인 염파는 희대의 간신인 곽개의 모함을 받고 부대를 이끌고 위나라로 향하였으나 위나라에서 중히 쓰이지 못하고 다시 조나라가 불러들이자 조나라로 향하던중 희대의 간신인 곽개로 인해 귀국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다 초나라에서 비참하게 쓸쓸히 말년을 보냈습니다. 
또한 장평대전을 승리로 이끈 백기또한 그의 정적인 범수의 모함을 받고 좌천당하였고 승산없는 전투에 출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였다가 두우라는 지방에서 자결을 했습니다. 자결할때 백기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유언의 내용은 이렇지요.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 모양이 되었단 말인가? (잠시 생각한 뒤) 그래, 나는 죽어 마땅하다. 장평에서 항복한 40만 포로를 생매장하였으니 이것만으로도 나는 죽어 마땅하다!"

이후 BC 221년 진나라는 전국시대를 끝마치고 중국을 통일하였습니다. 하지만 장평대전이 일어난지 50여년뒤 진나라 군사 20만명은 인과응보인지 서초패왕 항우로 인해 생매장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과응보가 아닐런지...

그리고 세월이 흐른후 명나라에서 장평대전을 기리는 시를 복여량이라는 시인이 썼다고 합니다.

장평조고[長平弔古]

조나라 병사 사십만, 어느 해부터 모였던가?
趙兵四十萬 生聚自何年

하루아침에 진나라가 땅에 묻어 죽이니, 누가 그 앞에서 말을 몰고 지휘했나?
一朝爲秦坑 是孰驅之前

음산한 구름이 환한 해 가리고, 서방에서 불어온 바람 구천에 울부짖네.
陰雲慘白日 西風號九泉

하고 많은 억조 군중이니, 더벅머리 아이의 머리라도 매달 수 있었겠지.
林林億兆衆 竪子頭可縣

널리 죽임당함을 달게 받아서, 백골이 깊은 골짜기 가득 메웠네.
甘心受大戮 白骨深谷填

도깨비불 밤마다 일어나 비추니, 만겁의 원한은 풀기도 어려워라.
磷火夜夜明 難消萬劫冤

통쾌하도다 두우의 검이여, 아마도 하늘은 있었나 보구나.
快哉杜郵劍 庶幾稍有天

단하의 흐름은 다하지 않으니, 이 원한 마침내 면면히 이어지리.
丹河流不盡 此恨終綿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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