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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게시물ID : humorbest_47324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나Ω
추천 : 153
조회수 : 19562회
댓글수 : 13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2/05/11 12:44:01
원본글 작성시간 : 2012/05/11 11:46:09
여기에 편하게 끄적거려도 되나요?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이혼을 하셨다.
내가 중학교 시절에 오빠가 일기나라 였나? 일기같은 걸 쓰는 사이트에 써놓았던 일기를 보게 되었는데
그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왜 이혼하셨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내가 만약 7살 꼬맹이가 아니라 고등학생 아니 중학생 정도만 되었어도
그 새끼를 죽여버렸을것이다. 어머니의 가게에 밥먹으러 갈때마다
가게앞을 기웃거리고 있던 그 새끼. 시간이 지날수록 내 앞에서 착한 아저씨 마냥 말을 걸어오던 그 새끼.
어머니의 환하게 웃던 그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어렸지만 알수 있었다. 그 새끼랑 바람이 났다는걸.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을 결정하고 어머니가 짐을 싸서 나가던 날
난 태어나 처음으로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서있었다. 

'아빠랑 살래? 엄마랑 살래?'

나는 엄마를 택했다. 하지만 엄마는 아니였다.
아버지가 출근하실 때마다 용돈으로 100원씩 주셨는데 난 그걸 쓰지 않고 돼지저금통에 
차곡차곡 모았었다. 
나를 떼놓고 가려는 엄마를 붙잡으며 돼지저금통을 내밀면서 
이것 줄테니 나 놔두고 가지마라고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엄마는 갔다."



나는 아무런 기억조차 나지 않는 3살 때지만
오빠는 7살. 이미 엄마라는 존재가 익숙해져 있었을테고 엄마가 세상의 전부였을 나이.
그 때문일까? 


처음으로 오빠가 나에게 폭력을 쓴 날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였다. 
온 집안을 날라다니며 나를 쫓아오며 밟고 뭉개고 주먹질을 해댔다.
그 순간이 25살이 된 지금에도 잊혀지지 않는다.
육체적인 아픔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컸다. 처음으로 맞은 그날 전까지는 한없이 다정한 오빠였었다.
같은 방을 썼기에 그 날 오빠 옆에서 숨죽이며 울었다.


새어머니 라는 분이 오셨다.
우리는 그 분을 엄마라고 부르진 않고 이모라 불렀는데
오빠는 이모가 오고 난 후로 더욱 삐뚤어졌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소한 이유들로 맞았다.
이유가 없을때도 있었다.
라면 끓여와라 해서 끓여오면 물이 왜이리 많냐 물이 왜이리 적냐 맛이 없다 등
나 지금 짜증나는데 너 나한테 1시간만 맞으면 안되냐? 라던지

한번은 맞고만 있는 내가 너무 병신 같아서 이겨보려고
부엌에 있는 식칼을 가져와 오빠를 위협해 본적도 있었다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중학생에 체구 있는 남자를 위협하는건 처음부터 말도 안되는 것이였을까
난 또래에 비해 말랐고 체구가 작은편이였기에 금새 칼을 빼앗기고 도리어 위협 받았다
아마 그때 오빠를 이길수 없다는 인식이 뇌리에 박힌 것 같다 

눕히고 몸을 밟거나 차는 경우가 대부분이여서 얼굴엔 상처가 없어서 아버지는 모르셨다.
맞을 때 하는 소리는 비슷했다.
알아듣지도 못할 쌍욕들과 화냥년의 딸이라 너도 창녀가 될거다 라던지
이모와 목욕탕 한번을 갔다와도 이모를 따랐다는 이유로,
이모가 먹을 밥에 에프킬라를 뿌리라고 시키거나 그렇게 못하겠다고 하면 또 때리고 

아버지는 회사 택시일을 하고 계셨고 교대로 근무하셨기에 집에 오시면 바로 주무시곤 했다
난 오빠라는 인간처럼 연기를 잘하는 인간은 처음봤다.
아버지 앞에선 공부 잘하고 학교생활 성실히 하는 바람직한 아들의 모습만을 보였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후 오빠의 폭력을 날로 더 해갔다.
오빠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좀더 커진 몸집에 나는 하루하루 학교 끝나고 집에 들어가는게 공포였다.
몸 위주로 때리던 것이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 
반항의 극에 달린건지 아빠가 알던 말던 상관없다며 내가 니년을 죽일거라고 
나만 보면 짜증이 난다고 했다. 그 화냥년이랑 닮았다고. 
난 아직까지도 엄마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사진 한번 본적 없다. 
오빠에게 맞을때마다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채 "잘못했어" 라는 말만 반복하며 
한달 내내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나 나올법한 두눈에 시퍼렇게 멍든채로 학교를 다녔다.

아버지께서는 내 얼굴을 보시고
여자앤데 얼굴을 이지경으로 만들면 어떡하냐. 너도 다 컸으니 손대진 않겠다. 
하지만 한번만 더 이런 일이 있으면 용서하지 않는다 고 말씀만 하셨다.

그 담날 아버지가 일을 가시고 나서
너가 멍청하게 얼굴에 멍이 들어서 내가 아빠한테 저런 소릴 들었다며 또 맞았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때리지 않겠다고 했다. ??? 의아했다.
때리지 않겠다며 웃는다. 무서웠다.

그 뒤로 오빠는 정말 날 때리진 않았다.
하지만 영화에서 봤을 법한 고문 같은것을 내게 행하기 시작했다.
변기에 머리 박기나 하루종일 다락방에 가두거나(물론 화장실도 못가게 했다)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벌 500번 해라. 오토바이 자세로 2시간 있어라 목을 조르는 등
차라리 맞는게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집에 방이 2개 뿐이었기에 
이모와 아빠방, 나와 오빠방 이렇게 썼었다.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오빠는 내게 몹쓸짓을 하기도 했다.
어느 일요일 아침에는 디즈니만화가 시작 하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슬슬 깨는데 뭔가 이상했다. 
오빠가 내 가슴을 만지고 있었다. 난 어떻게 해야될지 몰랐다.
지금 내가 소리를 지르거나 눈을 뜨면 오빠한테 맞을것 같았고
모른척 해야될일도 아닌것 같았다. 부스럭 거리며 일어나려는 시늉을 하니 오빠가 급하게 손을 뺐다.

정말 미칠것 같았다. 
눈썹이 떨리고 손이 부르르 떨리는데 두려웠던 오빠이기에 아무런 말도 못하는 내가 병신같았다.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이걸 말하면.
우리 둘 먹여살리려고 밤낮없이 일하는 아빠에게 걱정 끼치는걸까?
아빠가 이 말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을 할까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실까 

그래도 말하는게 맞는것 같았다. 말했다.
거의 숨도 못쉴정도로 눈물이 나왔지만 또박 또박 말했다.

아버지는 오빠를 쫓아내려 하셨다.
오빠는 그대로 집을 나갔고 일주일도 안되서 다시 집에 돌아왔다.
오빠가 집을 나갔던 그 일주일이 너무 행복했었는데..

사춘기 시절에 할수 있는 "실수"라 하시며 
아버지께서 항상 말씀 하시는 한번만 더 그러면... 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 후 
오빠는 자고 있는 나의 속옷을 벗기고 아래를 이리저리 보고 있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고 자신의 것을 부비기도 했다.
더러웠다.
아버지는 또 한번만 하고 넘어가실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
사실 가슴 만졌다고 얘기했을 때도 굉장히 피곤한 기색으로 받아들였기에

경찰에 신고를 할까? 
그때 당시 긴급출동SOS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거기에 제보를 할까?
어떻게 하면 벗어날수 있을까 많은 생각을 했다.

티비에서 나오길 경찰의 가정 내 폭력은 솜방망이 처벌이라 하여 맘을 접었다.
만약 오빠가 죄값을 받게되도 평생 감옥에 있는 것도 아닐거고 언젠가 다시 돌아올거라는 생각에 
그냥 내가 집을 나가기로 결심했다.

집을 나가 고시원에서 생활했다. 
아침 낮으론 학교 저녁엔 당구장에서 알바를 했다. 
당구장 알바는 그리 힘든 알바가 아니여서 즐거운 맘으로 했고 
내가 오빠를 벗어나 있다는 사실 하나로 하루하루가 달라졌다. 

시간이 흐르고 오빠는 군대를 갔고 난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그립지 않던 집 여기저기 부딪히고 맞았던 기억밖에 없는 집의 벽들이나 
오빠가 있었던 공간을 보니 도저히 있을수가 없어서 그동안 모아왔던 돈으로 
원룸을 얻어 나와 지냈다. 25살이 된 지금까지...

친오빠와는 인연을 끊었지만
그 시절의 기억들이 아직까지도 날 괴롭힌다
오빠라는 두글자만 생각해도 가슴이 쿵쾅거리고 눈썹이 떨리고 머리가 아파온다
어려서 당하기만 했던 내 병신 같은 모습들도 억울하고 분하다 

날 두렵게 하고 날 화나게 하고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에 폭행과 추행당한 기억밖에 없는 그 원인이 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질까? 오빠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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