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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고 있는 남자 上
게시물ID : panic_4734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뿡분
추천 : 17
조회수 : 1117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5/11 12:14:10

 

 

 

<보고 있는 남자>

 

 

 

 

 上

 

 

그 남자를 처음본 건 3월의 어느 날이었다.

 

새벽에 출근하는 날이 많았던 나는 그날도 5시에 맞춰둔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난 참이었다. 나는 습관대로 방 창문을 열어서 공기를 환기시키고 온수를 작동시킨 뒤 화장실로 직행했다. 방 하나 딸린 월세방에 무슨 기대를 하겠나 싶지만 아귀조차 잘 맞지 않는 화장실 창문은 늘 골칫거리였다. 살고 있는 집은 1층에 위치해 있지만 않았더라면 화장실을 쓸때마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는 귀찮은 일을 건너뛰어도 됐을 텐데. 나는 수도꼭지가 뜨거운 물을 토해내는 동안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워서 얼른 칫솔에 치약을 짜서 입에 넣었다. 민트향 치약이 부드러운 거품을 일으키며 입안 곳곳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입가로 삐져나온 거품을 혀로 낼름 핥으며 불만스레 웅얼댔다.

 

“이사를 가던지 해야지.....”

 

혼자 사는 사람, 그중에 특히 혼자 사는 여자는 범죄의 대상이 되기 쉽다는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나는 그럴 때마다 “남자 옷이라도 걸어두지, 뭐”하고 어깨를 으쓱해버렸다. 위험하다는 이유로낯선 사람을 룸메이트를 들이고 싶진 않았고, 그렇다고 치안이 좋은 동네로 이사 갈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라고 해서 위험한 동네에 혼자 살고 싶겠어?’ 라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별 수 없다. 주위의 걱정 따윈 신경 쓰지 않는 척하고, 이렇게 화장실 쓸 때 마다 커튼이나 치며 살아야겠지. 계약 기간이 끝나는 동안에 여기서 살 수밖에 없으니까. 집 가까운 곳에 파출소가 있다는 위안은 있지만, 아무리 거리가 가까워도 내 가족이 바에야 바로 달려와주겠느냔 말이야.

 

샤워를 끝낸 나는 수증기가 찬 거울을 문질러 닦고 얼굴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입고 들어온 옷을 대충 껴입고 젖은 손으로 창문 커튼을 젖었다.

 

촤르륵.

 

익숙한 소리를 들으며 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엄마야!!!”

 

웬 남자가 거기 서있었다.

창문 밖에, 내 화장실 창문이 있는 벽에, 바싹 붙어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눈이 마주쳤지만 도망치지 않는다.

뭐? 안 도망쳐? 저런 미친.....!

 

분노에 찬 나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아저씨 뭐예요?!!!?!!!!”

 

바닥에 나동그라진 바가지를 집어 들고, 아직도 창문밖에 서있는 미친놈을 잡으러 뛰쳐나가기 직전이었다. 앞 건물에 사는 남자가 머리를 내밀었다. 필시 내 찢어지는 비명소리를 듣고 내다본 것이리라.

 

“무슨 일입니까?”

 

그의 목소리가 통했던 건지 화장실을 훔쳐보고 있던 미친놈은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앞 건물 남자는 놈을 잡지 못한데에 아쉬운 탄식을 토해냈다. 그가 머리를 내밀고 있는 방의 형광등이 어느새 환하게 켜져 있었다. 눈부신 불빛을 보며 나는 “고맙습니다....”하고 모기소리만한 목소리로 감사인사를 전했다.

 

“괜찮습니까? 경찰 안 불러도 돼요?”

 

그는 아직도 화가 난 것 같았다. 상기된 감정이 목소리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씩씩 토해내는 숨이 창문과 창문을 통해 전해지는 듯했다. 나는 잠시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보다 약간 높은 높이에 있는 그의 방 창문은 내가 일어나는 시간이면 늘 불이 꺼져 있었다. 내가 출근하는 길에 밤새 술을 마시고 귀가하는 그와 마주치는 일도 간혹가다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팔자좋은 동네 한량이라고 취급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요?” 하고 그가 재차 확인했을 때, 나는 순간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느꼈다.

 

“네......”

 

그 순간만큼은 동네 한량도 백마 탄 기사님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 뒤로 이른 새벽마다 출근하는 길이면 앞건물의 창문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때 나를 도와줬던 앞건물 남자의 방 창문이었다. 집에서 나서며 무심코 고개를 돌리면 그의 창문이 소리 없이 나를 배웅하고 있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어두운 주택가의 골목에서 반짝 빛나고 있는 작은 창문은 마치 별빛 같았다. 밤하늘에 박혀있는, 길 잃은 여행자를 위한 등대 같은 별빛.

 

쳇바퀴 돌 듯 재미없는 일상에 단비가 뿌려졌다. 그의 방 창문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곤경에 처한 여자가 자신을 도와준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는 뻔한 스토리의 주인공은 되기 싫었으나, 어느새 나는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이른 저녁시간이었다. 퇴근길에 골목에서 마주친 그는 먼저 웃으면서 아는척을 했다. 그는 짐짓 걱정스럽단 표정으로 질문했다.

 

“요즘에도 그 변태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을 훔쳐보고 있던 정신이 나간데다 뻔뻔한 그 남자는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내 눈에 발견됐다. 내가 보지 못한 때가 더 많았으리란 점을 감안하면, 그는 내 스케줄을 빤히 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집에 있는 시간에만, 그리고 내 출퇴근 시간에 맞춰서 내 집을 엿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경찰에 신고는 했어요?”

“해도 소용없어요. 순찰을 돌아준단 말밖에....그 아저씨가 상해를 가한 것도 아니고, 문을 뜯고 침입한 것도 아니니까 할 수 있는 일이 없대요.”

“나참.....”

 

그는 나를 대변해 이 세상의 부조리들을 낱낱이 짚어가며 성을 냈다. 나는 그를 따라 골목을 걸으며, 경찰의 무능력함을 나열하는 그의 얼굴을 몰래 힐끔 훔쳐보았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는 그의 젊음과 건강함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고, 귓바퀴를 살짝 덮고 있는 머리카락은 꽤 부드러워 보였다. 조금전에 씻고 나온건지 은은한 샴푸 냄새가 풍겼다. 가끔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담배 냄새가 날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베시시 웃어버리자, 그가 내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왜 웃어요?”

“재미있어서요.”

“뭐가요? 우리 지금 심각한 얘기 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그 변태 때문에 그쪽이랑 알고 지내게 됐잖아요. 재미있는 해프닝 같아서요. 이런 인연도 흔하지 않겠죠?”

“어? 그렇게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니에요. 그 변태가 계속 지켜보고 있다면서요. 큰일 나면 어쩌려구요.”

 

“그럼 그쪽이 지켜주면 되잖아요. 그때처럼.”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몰라도 나는 꽤 당돌한 발언을 내뱉었다.

눈이 동그래진 그가 조금 뒤 씨익 미소 지었다.

 

‘웃기 다는 거야? 아님 자기도 좋다는 거야?’

 

이상한 여자로 비쳤을까 싶어서 걱정됐지만 그는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끝까지 거절 않는 걸 보면 긍정이라 생각해도 되겠지. 나는 조금 붉어진 두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면서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짧은 골목은 금세 끝이 났다. 우리는 금세 우리가 사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남자는 왼편으로, 나는 오른편으로 각자 다른 방향으로 헤어질 시간이었다.

 

“문단속 잘하세요. 모르는 사람 문 열어주지 마시고요.”

“제가 어린앤가요.”

“정말이에요. 요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지 몰라요. 게다가 면식범인 경우가 많다니까 조심하세요. 혼자 사시죠?”

“네...”

“그럼 더 조심하셔야죠. 꺼진 불도 다시 보자!”

 

구호를 외치듯이 그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뭐예요, 그게....”

 

도대체 내가 왜 그를 불량한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었는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지금 내 앞에 서있는 남자는 밝고 건강한 청년 이미지였다. 기어코 나한테 먼저 들어가라고 하는 등쌀에 못 이겨 먼저 들어가 건물 계단에 웅크려 앉아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3월의 쌀쌀한 바람은 어느새 따뜻한 여름햇살을 품고 날아들고 있었다. 꽃샘추위가 물러가고 완연한 봄이 찾아옴과 동시에, 나의 마음에도 봄이 찾아온 게 분명했다.

얼마나 그렇게 계단에 앉아있었을까. 차가워진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아직도 그가 밖에 서있는지 확인하려던 순간이었다.

 

후다닥!!!

 

누군가 뛰어내려왔다.

2층에서 내려온건지 3층에서 내려온건지는 알 수 없었다. 현관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나지 않았으니까 분명히 복도나 계단에 서있었던 게 분명했다. 갑자기 나타난 그림자는 빠른 속도로 내려와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뒷모습이 낯익었다. 시커먼 셔츠에, 운동하는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런닝화를 신은 아저씨였다. 내 기억에 이 건물에 저 나이대의 사람이라곤 3층에 살고 있는 중년부부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집 아저씨는 밤이 돼서야 퇴근했으니까 지금 집에 있을 리가 없었다. 늘 이웃을 보면 인사를 건네던 인사성 밝은 그 아저씨가 이렇게 무례하게 나를 밀치며 뛰어나갈 리가 없었다.

팔다리에 소름이 돋았다. 가방을 꽉 움켜쥐고 공포에 질린 눈을 깜빡거렸다. 건물 입구에 있는 문은 아직도 반동으로 여닫히고 있었다. 아주 센 힘으로 밀고 나간 게 분명했다. 조금 전 그 상황으로, 그의 힘이 얼마나 센지 짐작하게 했다. 두려움으로 인해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1층에 사는 나로서는 2층이며 3층에 올라갈 일이 없었다. 그러니 누가 거기에 서서 내가 귀가하는 모습을 지켜본대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보고 있었던 거야? 설마........”

 

설마, 하면서도 내 머린 바쁘게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나갔다.

그 가설 중에는 어쩌면 내가 이사 온 직후부터 나를 관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단 끔찍한 상상도 있었다. 건물에 웅크리고 숨어서 매일매일 하루에 몇 번씩 나를 훔쳐보고 있었대도 눈치 채지 못했을 거다.

 

“어쩜 좋지?”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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