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역사상 가장 유명한 군인중 한명이자 한국에서는 신격화까지 하는 장군인 더글라스 맥아더....맥아더에 대한 신격화를 배제하고 좀 냉철하게 판단해 보자는 취지에서 이글을 써보겠습니다.
더글라스 맥아더 1880년1월26일 출생~1964년4월5일 사망
할아버지는 위스콘신 주지사 출신 아버지는 미-스페인 전쟁, 미-필리핀 전쟁에서 큰 공로를 세운 군인이자 3대 필리핀 총독 출신. 한 마디로 집안부터가 대단했음
맥아더의 어머니인 핑키 맥아더는 엄청난 치맛바람으로 유명한 사람이었음. 맥아더를 웨스트포인트에 집어넣기 위해 온갖 인맥을 다 동원하고 과외까지 시켰으며 맥아더가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자 인근 특급 호텔에서 아예 숙식까지 하며 아들을 감시했음. 맥아더의 진급심사가 있을때마다 온갖 연줄을 다 동원해 진급을 시켜달라고 청탁을 넣었고 훗날 준장 진급당시(이때의 준장진급만 해도 유례가 없을 정도의 초고속 진급이었음)아예 소장으로 진급시켜달라고 청탁을 할 정도였음 (무슨 구국의 영웅이냐?)게다가 웨스트포인트 학생들이 선배들의 이른바 전통이라 불리우는 구타의식을 고발하는 사건이 터졌을때도 아들에게 모든것을 묵인하고 입닫으라고 압력을 할 정도였음 이런 어머니에 대한 반항이었는지는 몰라도 맥아더의 첫부인이었던 루이스 크롬웰 브룩스는 사회운동을 하던 여자였음. 맥아더의 어머니는 당연히 미칠듯이 반대했고 이때 맥아더가 처음으로 어머니와 대판 싸우며 반항했다고 함. 어쨌거나 어머니의 의도대로였는지는 몰라도 7년 후에는 이혼했고 재혼은 어머니가 소개 시켜준 18세 연하의 진 이라는 여성을 만나 마지막까지 해로했음. 맥아더를 우상시 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어머니조차 현명하고 지혜로운 어머니의 표상인양 전기에서 포장하고 있음.
어쨌거나 어머니가 치맛바람을 펄럭이건 말건 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에서 가장 성적이 뛰어난 학생이었고 연대장 생도를 역임했고 졸업 수석을 차지했음은 물론 웨스트포인트 역사상 맥아더의 졸업성적을 능가한 사람은 단 두명뿐이었다고 함.
1차 세계대전 당시 30대의 나이에 이미 사단장을 맡아 참전 미군중 가장 많은 15개의 훈장을 받았고 종전후 육군사관학교장을 맡았고 이 시기에 첫 부인과 결혼했음. 이후 준장으로 필리핀에서 3년간 복무했는데 이 시기 맥아더가 필리핀으로 가게된 이유중에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바로 당시 4성 장군이자 미군내의 최대 파벌을 이끌던 퍼싱이 맥아더의 아내에게 눈독을 들였고 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서 꾸민 수작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음
이후 맥아더는 3년을 필리핀에서 복무한뒤 최연소로 소장진급 하며 귀환 3군단장을 역임했고 1930년 나이 50에 최연소 대장진급을 하며 육군참모총장이 됨. 이 시기에 맥아더의 인생에 첫번째 치명적인 오점을 남기는 일이 발생함. 당시는 대공황의 시기라 군 관련 예산이 많이 삭감되었고 이때문에 맥아더는 의회는 물론 행정부와도 첨예하게 대립했는데 32년 벌어진 제대군인들의 시위에서 맥아더가 당시 대통령이었던 허버트 후버의 지시를 무시해버리고 군대를 동원해 폭력진압을 하면서 100여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 것. 이 당시 맥아더의 부관이 바로 훗날 미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였는데 아이젠하워는 이 당시 맥아더를 마지막까지 막으려고 했고 이후부터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고 함. 그러거나 말거나 맥아더는 아이젠하워를 좋아했는지 나중에 그를 필리핀까지 끌고갔고 아이젠하워는 총 9년 이라는 시간을 맥아더와 함께 보내야했음. (대략 안습) 하여간 이 사건으로 맥아더는 군인에게 가장 미움받는 군인이 되버렸고 대통령의 명령을 어기는 초유의 사건을 저지르면서(이후로 쭈욱 시작되는 명령 무시의 발단)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음.
그러나 앞서 서술한것 처럼 그의 집안부터가 대단했었고 아버지가 필리핀 총독이었으며 당시 신생 독립국이었던 필리핀의(말만 독립국이지 그냥 미국의 속국이었음)대통령 호손이 그와 친구였기 때문에 맥아더는 필리핀 군사고문겸 필리핀군 원수로 필리핀에 부임하게 됨 맥아더 하면 생각나는 그의 3대 트레이트 마크가 선글라스,담배파이프,그리고 원수모 인데 이 원수모는 바로 미군의것이 아니라 필리핀 원수모임...여담이지만 맥아더는 담배도 피우지 않았음. 담배도 안피우면서 파이프를 항상 물고 다닌건 이른바 이미지 메이킹이었던 셈.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맥아더는 초기에 지나친 낙관론으로 일관하다 개박살이 나고 결국 한밤중에 보트타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치욕스런 도망을 치게 되었음. 이 때문이었는지 대전 후기 지나치게 필리핀 전선에 집착하며(이해가 되는것이 본인의 집안부터가 필리핀과 인연이 깊고 자신의 인맥 상당수가 필리핀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쓸데없는 전투를 벌였다는 이유로 많이 욕을 먹었는데 특히 미 해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독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나 해병대로 부터 욕을 무지하게 먹었음.....해병대가 맥아더를 싫어했던 이유가 상륙전 처럼 피해가 큰 전투는 죄다 해병대에게 시키고 자신이 지휘하는 육군은 나중에 깃발만 꼽고 공을 가로챘다는 이유였음.
그리고 대전이 끝나고 익히 알다시피 맥아더는 일본점령군사령관 자리에 오르며 사실상 동아시아 전부를 총괄하는 자리에 오르게 됨. 그리고 이때부터 우리와의 인연 혹은 악연이 시작됨.
1945년 9월 미군이 한반도에 입성하면서 이른바 맥아더 포고령이라 불리우는 포고문이 발표되는데 이중 제1조 -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통치의 전 권한은 당분간 나의 권한하에서 시행한다 -를 통해 사실상 미군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이며 직접 통치를 하겠다는 선언을 함으로서 당시 활동하던 건국준비위원회나 상해임시정부까지 그 정당성을 완벽하게 부정당하게 됨
그리고 제2조 - 정부의 전 공공 및 명예직원과 사용인 및 공공복지와 공공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 기관의 유급 혹은 무급 직원 및 사용인과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기타의 모든 사람은 새로운 명령이 있을 때까지 그의 정당한 기능과 의무를 실행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 보호해야 한다 - 를 통해 사실상 식민지 시절활동하던 모든 친일파 인사들 부역자들이 그 죄를 받기는 커녕 대거 미군정에 고용되어 활동하게 됨으로서 이후 친일파가 뿌리내리게 되는 확실한 밑바탕을 만들게 됨. 특히 이 시기 미 군정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중 상당수가 친일파,친일 부역자들과 미 선교사들에 의해 미국에 유학을 다녀왔던 개신교 계열의 인물들이었고 이후 한국 개신교가 정치권력과 유착하여 변질되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