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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광등
게시물ID : freeboard_47453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추천 : 2
조회수 : 540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0/11/22 18:45:34
결혼을 하고, 아주 오랜 시간 끝에 찾아온다는 위기.

그것은 형광등 갈기다.

주로 전기에 관련된 일은 바깥일 취급되고,

바깥일이란 한국 전통적 이념상 남자의 일로 취급된다.

바깥일을 잘 못한다는 것은 무시 당할 수도 있다는 의미.

하여 사소해 보이는 형광등 갈기라는 문제는 위기아닌 위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평소에는 나를 안락하게 감싸서 편안히 앉을 수 있던 의자도,

막상 두 발을 위에 딛고 올라서려니 어찌도 이리 사지를 벌벌 떨게 하는 것일까.

고작 무릎 높이의 의자에 올라 선 것인데,

온몸으로 고층 빌딩 옥상에 선 기분을 느낀다.

마음을 다잡고, 평소엔 흔들리지도 않던 의자에 올라서면

덜컹덜컹한게 지금 당장이라도 옆으로 쓰러질 것 같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아내의 감시하는 듯한 눈빛을 애써 외면하고자, 이겨내고자 고개를 위로 들어본다.

처음부터 꺼져있었으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형광등은

깜빡거리기 직전까지 켜져 있었기에 온도를 가늠할 수가 없다.

사실 형광등은 백열등과 달리 뜨겁지 않다는 사실을 언젠가 얼핏 들은 것 같지만

탁상이 아닌 걸상 위에 선 지라 머릿속이 흐릿하기만 하다.

한번 두번 손을 댓다 떼며 온도를 가늠한 후에야 겨우 안심하고 형광등을 잡는다.

호리호리한 몸체는 쥐면 손 안에서 금방이라도 깨질 듯이 창백하다.

어느 방향으로나 90도만 돌리면 되는데, 창백한 형광등만큼이나 창백한 머릿속은

뱅글뱅글 돌리다가 겨우 한 쪽이 빠진 뒤에야 번쩍 정신을 차리고 놀란다.

하마터면 입으로 소리를 낼 뻔하지만 옆에 있는 아내에게 그런 모습을 들켜선 안되는 법.

읍하는 입술을 깨물고, 조심스레 한발 한발 내려와, 새 형광등을 들고 올라선다.

가늘고 긴 허리의 형광등을 조심스레 끼우고, 잘 고정됐나 확인하고 싶지만 당길만한 용기는 없다.

아직 걸상 위인데도 전원을 켜는 아내가 왠지 밉지만

파파팟 하고 들어오는 눈부신 형광등 덕에 어깨가 다시 쫙 펴진다.

오늘도 남편으로써의 위기를 극복했다고 생각하니 뿌듯하다.

라는 생각을 5분도 안되는 채 짧은 시간동안 하며,

양쪽 귀퉁이가 시커매진 형광등을 톡 빼고, 새 형광등을 툭 넣는다.

어젠 왜 이 쉬운 짓을 아니하고 클럽의 사이키 조명을 즐기는 척하며 밤까지 버텼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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