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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 그의 이야기
게시물ID : readers_475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좌절한팬더
추천 : 1
조회수 : 20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02 02:43:36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이십 여 분 째, 같은 자리를 서성이다 잠시 생각에 잠기기라도 한 걸까. 두 손에 쥐여진 휴대전화는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었다. 사실 그녀도 집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3월이라곤 하지만 여전히 바람은 날카롭고 길바닥엔 간간이 얼음이 얼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내리고 있었으니 모든 걸 다 그만두고 따스한 이불 속에서 귤이나 까먹으며 빈둥거리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아니, 그녀에게 더 이상 그녀를 반겨줄 집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섯 달째 밀린 방세와 초라한 가재도구, 몇 벌 옷과 몇 권 책이 전부인 한 평 남짓한 작은 쪽방만 있을 뿐이었다. 돈 없으면 방 빼라고 노발대발하던 주인 아주머니에게 이번 달에는 반드시 드리겠노라고, 며칠 후면 새로 잡은 일자리에서 아르바이트 비가 나올 거라고 몇 번이고 사정하고서야 겨우 일주일의 말미를 얻은 곳이었다.

 

. 누구에게나 있는 꿈. 그녀에게도 평범한 꿈이 하나 있었다. 재벌 2세를 낚아 돈 걱정 없이 편하게 사는 현실성 없는 꿈은 꿔 본 적도 없다. 대학을 나와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하고, 그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돈이 모이면 외국으로 배낭여행도 가고. 좋은 사람이 생기면 알콩달콩 연애도 하며 즐겁게 사는 꿈. 그러다 마음이 어긋나면 실연의 아픔도 겪어보고. 그러다 다시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가정을 꾸리며 능력 있는 남편 뒷바라지도 하며 행복하게 사는 꿈.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내리는 눈은 그칠 줄 모르고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그녀의 어깨 위엔 눈이 소복이 쌓였다. 여전히 전화기는 조용하고, 전화를 꼭 쥔 두 손은 파랗게 질려버렸다. 거리엔 새 학기를 맞아 한껏 외모에 멋을 낸 신입생들과 취업걱정에 찌든 대학 졸업반 학생들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조금을 더 기다리다, 그녀는 그 자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너무 오래 서 있었던 탓일까. 다리의 감각이 조금 무뎌진 걸 느꼈다.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날이 궂으면 유동인구가 그리 많지 않은 동네 편의점은 30여 분 째 손님이 한 명도 찾지 않았다. 평범한 차림,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한 여자가 오들오들 떨며 들어올 때 그는 온장고의 커피를 채우는 중이었다.

어서 오세요.”

따뜻한 음료 있나요?”

, , 이쪽에 있습니다.”

정리하던 물건을 잠시 치워놓고 그는 계산대로 돌아왔다. 그리 높지 않은 온화한 목소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모습. 어깨엔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밖에서 오래 서 있었는지 그녀의 두 손은 푸른 빛을 띄었다. 잠시 온장고 안을 둘러보던 그녀는 이내 두유 한 병을 골라 계산대로 가져왔다.

 

-

천 원 입니다.”

“…….”

오천 원 받았습니다.”

“…….”

잔돈 사천 원 받으시구요, 감사합니다.”

“… 수고하세요.”

 

계산을 마친 여자가 편의점 문을 나섰다. 뒷모습이 마치 2년 전 그 날의 그를 떠올리는 듯 했다. 대학생활에 물들어 취업이니 소개팅이니 동아리활동이니에 빠져있던 동기들 속에서 그는 혼자였다. 수업이 없는 때면 학교 도서관에서 사서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다. 토익이나 공모전은 여유 있는 녀석들의 얘기였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그는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등록금은 국가장학금으로 어찌 한다고 해도 그 외에 들어갈 식비나 책값은 어떻게든 벌어서 써야 했다. 10년 전 이혼한 부모는 간간이 안부전화만 할 뿐, 도움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야 했다. 아니, 기대도 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매일 정신 없이 살다가도 밤이 오면 고시원 옥상에 올라 내리는 별빛을 보며 밤새 숨죽여 울곤 했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이미 과거의 것이 된지 오래. 대학은 지성의 요람이 아니었다. 수천을 호가하는 종이쪼가리 발급소에 불과했다. 선배들은 자신들이 배운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 조별과제를 함께 하게 된 사람들은 자기들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학과공부에 집중할 시간이 너무도 부족했다. 당장의 생활비 압박이 너무 급했다. 부모들은 매일 돈 없다고, 돈이나 벌어오라고 핀잔주기 일쑤였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공부하고 있던 전공에 대해 회의가 든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는 대학을 그만두었다.

 

코트를 입은 여자가 가게를 나가자, 가게는 다시 조용해졌다. 하늘은 여전히 눈을 뿌리고 있었다. 그는 창 밖으로 보이는 지하철 선로를 바라보았다. 다음에 쉬는 날이 오면 광화문 서점에 가서 책을 몇 권 읽어야지. 기차를 타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계신 곳을 찾아가 봐야지. 돈을 조금 모으면 시험을 다시 봐서 대학을 다시 들어갈까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9시의 지하철 2호선은 피곤에 찌든 사람들로 가득했다. 땀 냄새, 소주 냄새, 여자들의 화장품 냄새가 뒤섞인 지하철에 올랐다. 가방에는 오늘 받은 과제들과 읽고 정리해야 할 서류들이 가득했다. 가방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건 오늘 하루 얻은 피로감일 것이다. 몸은 분명히 잠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도 잠을 잘 시간이 없다. 에너지음료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특유의 약 냄새와 톡 쏘는 탄산, 단 맛이 이상한 조화를 이룬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무슨 꿈이 있어서 서울로 올라온 게 아니었다. 어차피 남들 다 다니는 곳, 나 역시 가야 한다면 하고 싶은 걸 하자. 그렇게 마음먹고 들어온 곳이다. 후회랄 걸 굳이 따지자면 4열 종대로 연병장을 수십 바퀴 돌리고도 남겠지만 이제와 후회한들 어쩌랴. 이런 생활을 초래한 것도 내 선택인 것을. 지금 당장 그만 둔다고 해서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할 만큼 해 봐야지.

 

며칠 전 집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늘 그렇듯 아버지의 건강문제와 옆집 K의 소식, 엄마 친구 아들놈들의 다소 과장된 사연들, 집안 형편이 대화의 주를 이루더니 급기야는 결혼 얘기까지 나온다. 어머니 동창 중 하나가 딸이 있는데, 마침 나이도 적당하고 직장도 서울에 있으니 한 번 만나보는 게 어떻겠냐는 소리. 화들짝 놀라며 어머니께 손사래치긴 했지만, 애미애비 죽기 전에 손주 하나는 안겨줘야 할 것 아니냐는 하소연까지 하시는 걸 보면 정말 결혼이라는 걸 고민할 때가 온건지도 모르겠다. 그저 노인네들 늘 하는 하소연에 레퍼토리 하나 추가된 것뿐인데.

 

문득 고향 집에 계신 어머니 음식솜씨가 너무도 그립다. 구수한 시골된장으로 끓인 찌개와 손수 농사지으신 채소들로 만든 장아찌며 무침. 그리고 가끔씩 올라오는 돼지 불고기. 따듯한 숭늉 한 사발. 아침은 식빵 한 조각, 점심은 김밥 한 줄, 오늘 저녁은 이 빵 한 조각과 음료 한 캔. 그래도 굶지 않고 사는 게 어딘지. , 김대리 이 인간…… 가뜩이나 돈 없는데 오늘도 담뱃값을 빌려갔지. 언제 갚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떼인 거라고 봐야 할까?

 

후우…….”

 

이런 저런 생각에 한숨만 나올 때, 지하철이 지상구간으로 올라왔다. 지하철 창 밖은 주홍빛 가로등과 제 갈 길을 향하는 차들로 가득했다. 아마 저들도 힘든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그렇고, 당신들도 그렇고, 저마다 각자의 삶을 살고 있겠지.

 

여전히 눈이 내린다. 시간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흐른다. 우리 삶도 계속 흐르고 있다. 3월의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거리에 수북이 쌓여있다가 녹아 언젠가는 넓은 바다로 흐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도 저마다 제 갈 길을 향해 흐를 것이다. 오늘의 힘든 이 날들도 나이를 먹고 나면 언젠가는 추억이라는 제목을 가진 한 편의 시와 노래와 사진들로 기억될 것이다. 너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우리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흐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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