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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omy sunday(1999, 롤프 슈벨 作)
게시물ID : movie_1010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나이트폴
추천 : 0
조회수 : 1028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2/26 18:26:49

 Gloomy sunday. 저주받은 음악이라던가? 이 음악을 듣고 자살한 사람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가사조차 없던 음악이, 대체 어떤 메시지를 던졌기에 사람들은 자살이라는 극단적 행동을 보이게 된 것일까?

 

 한스 - 이상한 노리예요. 마치 듣고 싶지 않은 얘길 해주는 것 같았어요.

 라즐로 -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게 진실이라고 하죠.

 

 빌어먹을 한스는 꽤나 정확히 이 음악의 본질을 지적하고 있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행위는,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찾아오는 필연적인 충동이라고 한다. 이룰 수 없는 욕망의 좌절, 그 좌절된 욕망은 죽음이라는 행위를 통해 획득 가능한 것 처럼 느껴진다. 때문에 죽음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실현코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여기에서 다시 삶에 대한 충동으로 회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죽음 뒤의 세계는 그야말로 없는(無) 것. 그것은 욕망의 충족이라기 보다는, 내 존재 자체를 지움으로써 그 욕망마저 지워버리는 행위로 인식된다. 존재의 사라짐은 인간이 죽음 충동에서 벗어나 삶 충동으로 회귀하는 근원적인 요인이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욕망. 그것은 사회적/도덕적으로 억압된 금기(Taboo)다. 금기는 이룰 수 없는 욕망이다. 때문에 한스는 '듣고 싶지 않은 얘길 해주는 것 같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Gloomy sunday는 인간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금기된 욕망, 그 본질적 속성을 들추어낸 것이다. 우리가 숨기고 싶어 하는 것. 외면하고 싶어 하는 것. 자신의 도덕적 자아가 인정할 수 없는 그것. 하지만 그것은 외면할 수 없다. 그것이 내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라즐로는 '그게 진실'이라고 말한다.

 

 일로나와 그를 둘러싼 두 사람의 삼각 관계는, 인물의 이해를 통해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 안드라스와 일로나는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다음날 라즐로와 만난다.

 

 라즐로 - 누구나 모두 좋아할 수 있다. 육체를, 정신을. 무언가 당신을 채워주는 것을, 갈망하는 것을. …일로나를 완전히 잃느니 한 부분이라도 가지겠어.

 

 이렇게 셋의 관계는 이어지게 된다. 일로나라는 한 여자와 라즐로/안드라스라는 두 남자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그들의 욕망을 충족코자 한다. 일로나의 욕망은 그 두 남자를 모두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는 두 남자를 모두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두 남자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들은 일로나를 온전히 가지지 못한다. 그들은 일로나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없고, 단지 그 일부분만을 나누어 갖게 된 것이다.

 

 셋의 사랑. 금기다. 하지만 일로나는 훌륭히 자신의 욕망을 실현해 냄으로써 죽음 충동을 거세시킨다. 그녀는 유일한 탈출구라 생각되는 죽음 이외의 '굴뚝'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타나토스가 사라진 존재. 에로스만이 그녀를 행동하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라즐로는? 안드라스는? 그들의 욕망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일로나의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 그들의 욕망은 소외된다. 그들에겐 '굴뚝'이 없다. 다만 그들은, 일로나의 한 부분을 가졌다는 사실로만 위안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찾아오는 타나토스는 필연적인 결과다.

 

 여기서 하나 더 살펴 보아야 할 것은, '비프 롤'이라는 음식이다. 라즐로는 자살하려 강에 투신한 한스를 건저내고선, 이 음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라즐로 - 서로 너무나 다르면서 또 너무나 어울리죠. 다시 한 입 먹으면 세 가지 맛이 한 번에 느껴져요.

 

 서로 다른 맛들이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맛을 창출해 내는 것이 요리다. 그 중에서도 이 영화에서는 '비프 롤'이라는 음식이 꽤나 비중있게 등장한다. 세 가지 서로 다른 맛이 어울리는 것. 마치 일로나와 라즐로와 안드라스의 관계와 같다. '비프 롤'은 차라리 그것에의 비유라 할 것이다.

 

 한스는 라즐로의 레스토랑에만 오면 '비프 롤'을 주문한다. 그것이 자신과 라즐로를 이어주는 음식,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연장시켜나가게 해 준 하나의 상징적 보상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음에 당연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측면에서 바라볼까? '비프 롤'이 자연스럽게 그 셋을 연상시키는 소재라는 점에서, 한스가 '비프 롤'에만 집착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그 셋의 관계 중 하나의 위치를 갈망한다. 아니, 그 삼자적 관계를 자신과 일로나만의 이자적 관계로 환원하려 한다. 하지만 그러한 이자적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 일로나는 이미 그를 거부했다. 때문에 이미 만들어진 그 삼자적 관계. 일로나를 중심으로 완성된 그 삼자적 관계에, 자신과 일로나만의 이자적 관계를 투영시켜 내는 것이다. 그의 리비도는 이자적 관계를 향해 열심히 투사되고, 그것은 현실적인 대상, 그 상징과도 같은 '비프 롤'을 향해 있는 것이다.

 

 한스가 어쨌거나, 다시 돌아와 Gloomy sunday를 바라보자. 안드라스는 이 곡을 작곡함으로써 부(富)를 손에 넣게 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님을 직감하고 있다.

 

 안드라스 -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뭔가 할 말이 남아 있어요. 메시지요.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는 자신이 작곡한 이 음악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생각한다.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음악이건만, 그는 거기에서 발생하고 있는 메시지를 찾지 못한 것이다. 숨겨져 있는 메시지. 그것이 Gloomy sunday의 본질이리라.

 

 맨델 사(社)의 맨델이 자신의 동생과 함께 라즐로의 레스토랑을 방문한다. 그의 여동생은 Gloomy sunday를 듣고 이런 말을 한다.

 

 맨델.S - 쓴 맛과 단 맛이 적절히 균형을 이룬 것 같아요. …가사는 필요 없어요. 이미 나에게 얘길 하는 걸요.

 

 쓴 맛과 단 맛의 균형. 역시 '비프 롤'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Gloomy sunday의 본질은 '비프 롤'에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 그것이 이루어내는 조화. 그렇다면 무엇이 그것들로 하여금 조화를 이루게 만드는가? 그 조화가 왜 죽음으로 귀결되는가?

 

 욕망의 완성은 죽음이다. 죽음 이외의 방법으로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일로나의 사랑 역시 불구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인간은 이미 그 주체가 주변으로 밀려나고, 타자에게 중심부를 내어준 존재다. 인간의 욕망은 곧 타자의 욕망이고 주체의 욕망이 될 수 없다. 때문에 우리가 흔히 무언가를 욕망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타자의 욕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상징계에 진입함과 동시에, 우리 자신의 입을 잃어버렸다. 때문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그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주체적 욕망은 이미 사라지고, 타자의 욕망만이 남았으니, 그 욕망의 실현이라는 것도 주체가 아닌 타자의 욕망이 실현된 것. 그래서 죽음만이 욕망의 적극적 실현의 한 방법이 되는 것이다.

 

 쓴 맛과 단 맛의 조화, 세 가지 맛의 조화. Gloomy sunday가 알려주는 그 완성된 세계로의 갈망. 완벽한 그 조화를 보니, 그것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곡은 죽음에의 손짓과 다를바 없어진다. 완벽한 그 모습을 이룰 수 있는 것이 곧 죽음이기에. 이 곡은, 듣는 이에게 죽음을 종용함으로써 그 사람의 욕망을 실현케 하는 것이다.

 

 '마지막 한 숨에 고향으로 돌아가요. 안전한 어둠의 땅에서 배회해요.'

 

 이 구절은 나중에 붙여진 Gloomy sunday의 가사 중 일부이다. 여기서 '고향'이니 '안전한 어둠의 땅'이니 하는 말은 모두 죽음으로 귀결되는 어구들이다. 그것을 느꼈기 때문에 일로나는 안드라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당신이 내 곁에 있는 한은……'죽지 않겠다고 말하던 안드라스도, 결국 그녀의 노래를 듣곤 권총 자살해버린다. 자신과 일로나, 그리고 라즐로가 인간으로 남아 있는 현실계에선, 그들이 한 여자를, 그리고 두 남자를 욕망하는 한, 그들의 욕망은 조화를 이루어낼 수 없다. 그들은 '비프 롤'이 될 수 없다.

 

 Gloomy sunday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것은 역설이다. 평안하고 행복해야 할 일요일의 음울함. 자신의 욕망을 실현함으로써 보장받을 수 있는 행복들. 하지만 그것의 현실적인 불가능성. 그로인해 촉발되는 죽음 충동.

 

 라즐로 - 이제야 'Gloomy sunday'의 메시지를 알 것 같아. …모든 사람에게 그만의 존엄성이 있다는 걸 말하는 것 같아. 우리는 상처를 받고 모욕을 당해. 마지막 남은 존엄성을 가지고 최대한 견디는 거지. 더는 못 견딜 상황이 오면 차라리 세상을 떠나는 게 나아. 떠나는 거야. 존엄성을 가지고.

 

 그들의 존엄성은, 그들의 욕망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짓밟혔을 때, 그 자신의 존엄성은 보존되지 못하고 소거된다.

 

 라즐로는 득세한 유태인으로, 그의 욕망은 일로나에게 향해 있지만, 그 자신의 세속적 삶에도 있었다. 그에겐 항문기적인 욕망, 즉, 돈과 부에 대한 욕망이 꿈틀 댄다. 그는 근면하다. 하루라도 레스토랑의 문을 닫을 수 없을만큼. 그것이 그 자신의 욕망을 대변하는 일이다. 그에겐 일로나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세속적인 삶도 욕망의 대상이 된다. 그러한 그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 '주방'이라는 공간이다. 그 공간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곳이다. 그 자신만의 공간. 자신의 비밀을 간직한 공간이다. 하지만 한스는 그 자신의 권력(친분을 사칭한)으로 그 공간을 침범한다. 자신의 공간을 침범당한 라즐로는 한스에게 모든 것을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한스의 앞에서 위축되기 시작한다.

 

 때문에 라즐로는 안드라스가 세상을 떠난 뒤에 일로나를 온전히 차지했음에도, 강렬한 죽음 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 어느 때라도, 그는 자신의 욕망을 이룰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일로나에게 좌절당하고, 한스에게 좌절당한 그의 존엄성은, 이제 그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 강렬한 타나토스로 전환된다.

 

 마지막 존엄성. 그것을 지키기 위한 죽음. 그것마저 남기지 않을 정도가 된다면, 그 자신은 더 이상 자신으로 남을 수 없기에.

 

 죽음은 영원을 약속한다. 변하지 않는 영원.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영속시켜 줄 유일한 방법이다. 그 피안에 모든 것을 남기기로 약속하고, 그렇게 존재는 사라지는 것이다.

 

 안드라스에서 시작된 독약병이 라즐로를 거쳐 한스에게 이르는 과정은, 바로 그 죽음 충동의 전염 과정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이 영화는 『날개』의 탈출 모티브로도 바라볼 수 있다. 폐쇄 공간을 지양하고 개방 공간을 향해 비상하고자 하는 주인공. 라즐로와 안드라스는,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폐쇄적 공간에서 벗어나, 그들의 욕망을 담보할 수 있는 '죽음'이라는 개방 공간으로 비상한 것일는지 모른다.

 

 여하튼 연상되는 것이 많은 영화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관계라는 점은 『판도라의 상자』와 『몽상가들』을, 그리고 안드라스가 권총 자살하는 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생각나게 한다. 또한 음울한 OST가 담아내고 있는 사연들은 마치 『대부』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이런저런 감상들의 조합이 어색하지 않음은, 그것이 드러내는 주제를 몇 가지 소재에 적절히 분담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더 다루자면 끝이 없을 것 같기에, 간단히 끝내본다.

 

 라즐로 - 내일 일은 내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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