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603일을 맞이하는 12월 9일 오늘은 단원고등학교 2학년 7반 손찬우 학생, 같은 7반 이민우 학생, 그리고 9반 박예지 학생의 생일입니다. 반 순서와 번호 순서대로 소개합니다.
2학년 7반 손찬우 학생입니다.
찬우는 늦둥이 막내입니다. 형하고 13살이나 차이가 납니다. 가족 모두 전혀 예상 못 하고 있었는데 찬우가 태어나서 부모님도 그렇지만 형도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형은 꼬마 동생이 너무 귀여워서, 찬우가 갖고 싶다는 것, 하고 싶다는 것은 전부 해 주었습니다.
찬우는 성격이 좋아서 친구도 많았고, 한 번 친구가 되면 깊이 오래 사귀었습니다. 단원고등학교 2학년 7반에 남아 있는 찬우 자리에는 찬우 초등학교 때 친구들, 중학교 때 친구들이 찾아와서 찬우를 그리워하며 남긴 편지와 쪽지들이 아직도 텅 빈 책상 위에서 찬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찬우의 꿈은 요리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학원에서 한식 요리와 일식 요리를 배웠고, 생선 다루는 것이 어렵지만 재미있다고 했습니다. 찬우는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서 음식을 직접 만들어 대접하기도 했고, 요리를 하면 엄마 드시라고 갖다 드렸습니다. 찬우 어머니는 찬우 요리가 간도 잘 맞고 맛있었다고 하십니다.
어머니는 찬우가 꿈에 나와서 오래 옆에 있으면서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얘기도 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오늘은 생일이니까 찬우가 엄마 꿈에 나와서 오래 곁에 있어드리면 좋겠습니다.
같이 생일을 맞이한 같은 7반 이민우 학생입니다.
민우는 누나가 하나 있는 두 남매의 막내입니다. 누나는 속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는 조용한 성격이라서 집에서는 민우가 가족들 사이의 연결 고리였습니다. 예를 들어 누나가 용돈이 필요하면 민우한테 말하고, 그러면 민우가 아빠한테 마치 자기가 용돈이 필요한 것처럼 "아빠 나 용돈 좀 주면 안 돼?" 하고 부탁하는 식이었다고 합니다. 부모님께 애교를 부리는 쪽도 민우였고, 아빠하고 대화가 많은 쪽도 민우였습니다.
민우는 한 가지에 열중하면 깊이 파고드는 성격이었습니다. 곤충 도감을 달달 외다시피 읽어서 애벌레만 봐도 어느 벌레의 유충인지 척척 맞히기도 했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컴퓨터에 열중해서 친구들한테 컴퓨터를 가르쳐주기도 했습니다.
민우는 공부를 잘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유머감각이 있고 긍정적인 아이였습니다. 아버지는 성적에 관해서 별로 잔소리를 안 하셨는데, 어느 날 민우가 자기 뒤로 두 명이나 생겼다고 자랑했다고 합니다. 민우 아버지는 어이가 없어서 "그래 잘 했다, 다음 번엔 50점은 넘어보자" 하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민우가 다음 번에는 정말로 성적을 훨씬 올렸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놀라서 "야 이러다가 성적 도로 떨어지면 큰일이다, 너무 올리지 마라" 하고 농담을 하셨다고 합니다. 민우는 성적 때문에 야단맞을 줄 알았는데 아빠가 칭찬을 하시니까 신이 났던가 봅니다.
민우네 친가는 바닷가입니다. 민우도 어렸을 때 할아버지 댁에서 지내서 바다를 잘 알고 물에 익숙합니다. 어부이신 할아버님 영향인지 민우도 늦잠 자는 일이 없고 새벽부터 일어나는 편이고, 어렸을 때는 그렇게 일찍 일어나서 자기 손으로 밥을 짓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민우 아버지는 민우가 아침 일찍 배가 기울기 전에 일어났을 것이고 수영도 웬만큼 하니까 살아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월호 선미에서 아마도 구명조끼를 입고 대기하는 것 같은 희미한 사진이 민우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민우 아버지는 민우를 잃고 나서 진실규명 활동에 뛰어들어 광화문 광장 농성장을 오랫동안 지키셨습니다. 농성을 시작한 첫날부터 해를 넘기도록 광화문 광장의 터줏대감이셨습니다. 여름의 땡볕과 겨울 추위를 견디면서도, 온갖 일들을 겪으시면서도 언제나 담담하고 침착하셨고 민우 얘기도 거의 안 하셨는데, 민우 생일 인터뷰를 하시면서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아버지는 신이 있다면, 소원을 빌 수 있다면, 딱 한 시간만 민우랑 같이 있게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민우한테 따뜻한 밥 한 끼 먹여서 보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십니다.
함께 생일을 맞이한 2학년 9반 박예지 학생입니다.
예지는 여섯 살 어린 남동생이 있는 맏딸입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예지는 어렸을 때부터 성숙하고 속이 깊은 아이였고 든든한 맏딸이었습니다. 부모님이 힘들게 일하시는 게 미안하다고 자주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가 안 계시면 동생 밥을 자기가 직접 챙겨 먹이고 엄마 걱정하지 마시라고 음식 차린 밥상을 "인증샷"도 찍어서 보내곤 했습니다. 동생이 어렸을 때는 어린이집에서 동생을 데려오는 것도 예지가 맡아서 했습니다. 예지는 컴퓨터를 잘 했고, 프로그래머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예지는 알뜰하고 생활력이 강한 아이이기도 했습니다. 세뱃돈을 모아서 아빠 중고차를 사 드린 일이 있을 정도입니다. 할머니 생신 때는 영양크림을 선물로 사 드렸습니다. 예지를 잃은 뒤에 할머니는 그 영양크림을 도저히 바를 수 없어 그저 바라보면서 우신다고 합니다.
예지랑 세월호에 함께 탔던 2학년 3반 김시연 학생과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촌입니다. 아직도 세월호 안에 갇혀 있는 미수습자 2학년 1반 조은화 학생과는 둘도 없는 단짝이었습니다. 예지하고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 8-9명 정도 되는데, 그 중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두 명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예지 부모님도 "전원구조" 소식을 듣고 안심하셨고, 다른 부모님들처럼 아이들이 추울 거라 생각하셔서 갈아입을 따뜻한 옷을 가지고 팽목항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전원구조는 오보였고, 막상 팽목항에 내려가보니 아이들은 여전히 기울어가는 배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예지는 일주일 뒤에 부모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지 어머니는 예지의 마지막 모습을 꼭 봐야겠다고 고집하셔서 얼굴과 옷까지 전부 직접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원확인 뒤에 어머님은 쓰러져서 응급실로 실려가셨습니다. 바다에서 진흙 묻은 예지 가방이 나왔을 때 어머님은 그 가방이 깨끗해지고 냄새도 안 날 때까지, 손에 피가 나도록 몇 번이나 밤새워 빨고 또 빨았다고 합니다.
안산 합동분향소 #1111 로 문자 보내 찬우, 민우, 예지 생일을 축하해 주세요. 형과 누나에게 가장 귀여운 동생, 남동생에게 엄마 같은 누나였던 아이들을 잊지 말아 주세요.
아이들의 흔적과, 아이들이 돌아오기를 기원해 주신 모든 분들의 사랑과 희망과 간절함이 남아 있는 단원고 교실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단원고 교실 존치를 위해서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세월호 게시판에 다른 분들께서 이미 글을 써 주신 대로 서명이 별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효력이 있든 없든 많은 분들이 서명을 해 주시면 단원고 세월호 희생자 가족분들께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