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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 그날에 우리
게시물ID : readers_478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크리티컬박
추천 : 10
조회수 : 304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2/12/02 03:55:50

그날에 우리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용서를 베풀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나는 초연한 자세로 이 모든 분노를 마주하리라. 성내지 않으리, 울부짖지 않으리, 끝의 가장자리에 설지라도 나를 잃지 않으리.

 

그녀의 퀭한 눈동자가 서서히 떠올라 나를 응시했다. 내 모든 것을 걸고 사랑했던 여인의 눈은 이제 죽은 자의 그것과 흡사했다. 움푹 팬 뺨과 앙상한 손마디,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는다. 지금 느끼는 이 미약한 동요는 약한 자에 대한 보편적인 연민과 동정, 그뿐이다.

 

 

 

최루탄 냄새가 교정을 가득 채운 날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겁이 많은 그녀가 걱정되었지만, 전투화에 짓밟혀 머리통이 깨진 친구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나는 녀석을 둘러업고 학생회관 지하의 풍물패 연습실로 숨어 들어갔다. 불온단체라는 명목으로 오래전에 폐쇄된 이곳은 그녀와 나의 비밀장소였다. 여관방 하나를 빌릴 형편도 되지 못했던 우리는 이 텅 빈 콘크리트 상자 안에서 사랑을 나눴다. 나는 내심 그녀가 이곳에 숨어있기를 바랬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선배들, 닭장 같은 버스에 끌려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는 친구들. 구호를 외치며 작전을 지시했지만 나는 너무나도 무서웠다. 그녀를 껴안고 싶었다. 그녀의 따뜻한 입맞춤이 무엇보다도 절실했다. 그녀로 하여금 용기가 충전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한동안 찾지 않아서 쌓여버린 매캐한 먼지뿐이었다.

 

나는 친구의 옷을 찢어 급한 대로 지혈을 마무리했다. 곧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직 투쟁이 끝나지 않았지만, 수면의 유혹을 이겨내기가 힘들었다. 친구를 돌보기 위해서라고 스스로 변명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쾅쾅쾅!'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거칠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친구 녀석은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고 끙끙 앓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나야. 문 좀 열어봐. 안에 있지? 빨리 열어봐.

 

그녀의 목소리였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신앙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무언가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고 믿고 싶어졌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는 시스템이라니, 맹목적인 믿음도 때때로 합리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다. 나는 부리나케 일어나 거울에 머리를 가다듬고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다. 그곳에는 언제나 처럼 아름다운 그녀가 서 있었다. 초대한 적 없는, 몽둥이를 든 건장한 사내들도 함께였다. 사내들 가운데 한 명이 윽박지르듯이 그녀에게 물었다.

 

- 이 새끼지?

 

그녀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눈물을 쏟아냈다. 질문한 남자가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꺅, 하는 외마디 비명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내의 몽둥이도 내 이마를 향했다. 나는 바닥을 뒹굴었고, 그들 중 한 명이 내 목을 짓밟았다.

 

- 이 새끼 맞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어 캑캑 거리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빠르게 눈물을 훔쳤다. 그녀의 손가락이 나를 향했다.

 

- 맞아요. 이 새끼. 이 빨갱이 새끼. 제 말이 맞죠? 여기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전투화 세례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나는 순식간에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디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곳에서 발가벗겨져 묶여있었다. 그 후로 열흘 정도는 인간의 언어로 설명조차 할 수 없는 폭력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야만의 시간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이겨낼 정도로 나는 강하지 못했다. 나는 내용을 알 수 없고, 알아서도 안 되는 몇 장의 서류에 서명을 마쳤다. 그리고 며칠 뒤, 압송되다시피 입대하게 되었다.

 

 

 

 

지금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에 그녀가 서 있다. 병든 고양이처럼 바르르 떨고 있지만, 그녀는 절대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폭풍우 치는 밤에 조각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늙은 어부와도 같은 비장함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오랜 세월 동안 모든 것을 갈무리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눈이 내린다.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여서 하나하나 색을 다시 칠해야만 할 것 같다. 그녀의 소리없는 질문이 대답을 재촉해온다. 사실 답은 그날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

 

- 안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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