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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재가 프랑스 혁명을 비판하는것은 합리적입니다.
게시물ID : sisa_36711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coal
추천 : 1/9
조회수 : 2819회
댓글수 : 15개
등록시간 : 2013/02/28 18:55:13

자유·평등·우애(형제애)를 실현하는 역사의 현장은 공포와 피비린내 나는 도살장을 방불케 했다. 처형당해 마땅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 혁명을 추진한다는 명분이나 지휘자의 오판, 증오심 등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처형되었다. 마치 독일에서 600만의 유대인들이 특별한 이유도 없이 학살당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처형당한 사람들의 태도 역시 천태만상이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반혁명의 흉악한 혐의를 받는 3일 동안의 심문에도 담대한 모습을 보여 상대를 감탄시켰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을 태우고 갈 초라한 수레에만 분을 삭이기 조금 힘든 모습을 보였을 뿐 단두대에 오르면서도 왕비답게 품위를 지켜 군중들이 고개를 숙이게 했다. 그런가 하면 18세의 창녀 에글레는 유머와 재치로 사형집행인들을 훈계하고 처형장에 들어갈 때는 마치 결혼식장에 들어가듯 즐거운 표정으로 사뿐히 걸어갔다. 에글레의 죄목은 혁명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비방한 것이다. 에글레가 길거리에서 혁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서슴없이 털어놓자 경찰이 함께 있던 창녀와 함께 혁명재판소로 보냈다.

혁명재판소 검사인 쇼메트는 두 창녀를 왕비와 함께 단두대로 보내려는 악독한 계획을 세웠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얌전히만 있었더라면 에글레와 함께 잡혀온 창녀는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혁명재판소에서도 소란을 피워 왕비와 함께 음모를 꾸몄다는 죄가 추가되었다. 그녀는 길거리에서 혁명을 비방한 말, 왕에 대한 충성 등을 모두 시인했으나 왕비와 같은 행동을 했느냐는 물음에는 가냘픈 어깨를 쳐들고 단호하게 재판관을 나무랐다.

"그래요, 정말 근사하군요. 멍청이 같은 당신들이 내가 왕비와 같은 행동을 했다고 하니 참 똑똑하게 보이네요. 나는 길거리에서 돈이나 버는 볼품없는 인간인데 그렇게 보아주니 고맙군요. 왕비의 요리사 조수한테도 말 한마디 걸지도 못할 주제의 계집아이에 지나지 않거든요. 당신들처럼 무위도식하는 천치 같은 패거리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배심원 중 몇 사람은 그녀가 에글레의 목숨을 구하려 취중에 저지른 일이라고 변호했다. 그러나 그녀는 술 취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배심원들이라며 모든 변호를 거부한 채 왕실을 옹호했다. 재판관이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모든 재산을 몰수한다고 선언하자 그녀는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말했다.

"잠깐! 이 도둑놈아, 그런 판결이 나올 거라고 내 이미 짐작했지! 그렇지만 내 물건에 나만큼 애착이 있는 사람은 없을 걸! 그 물건은 네놈들이 게걸스럽게 먹어치우지 못할 거야!"

그녀는 처형장으로 가는 수레에 마치 결혼식장에라도 가듯 깡충 뛰어 올라탔다. 단두대에 오르는 그녀의 걸음 역시 가벼웠다. 처형될 때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든 이들은 모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사람들이었다. 정말 무모하고 어처구니없게 죽은 경우를 보면, 첫째로 바스티유의 학살에서 살해된 100여명의 군중을 들 수 있다. 카미유 데물랭의 선동으로 동원된 군중은 상이군인회관에서 탈취한 3만 2000정의 총을 들고 바스티유로 향했다. 바스티유에는 비록 7명의 광인과 방탕자가 수감되어 있었지만 100여 명의 노병과 스위스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사령관 로네가 군중들에게 무기를 양도하라고 했지만 듣지 않아 발포명령이 내려졌고 100명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분노한 군중들은 바스티유를 함락했고 수비대장 로네를 끌어내어 죽인 다음 그의 목을 창끝에 달았고, 이어서 파리 시장의 목을 잘라 창끝에 달아 시내를 돌아다니는 참담한 일을 했다.

둘째, 1791년 7월 17일 샹드마르스 학살이다. 6월 21일, 루이 16세의 바렌 탈출은 국왕에 대한 적대적 분위기와 공화정 수립에 대한 의견을 고조시켰다. 의회가 왕권을 중지시켰으나 의회는 분열되어 특권파와 온건파가 '국왕이 유괴 당했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 7월 15일에 루이 16세가 권한을 되찾자 코르들리에 클럽이 파리 시민들을 샹드마르스 광장에 불러들여 루이 16세의 폐위와 재판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에 놀란 의회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민방위대장 라파예트가 발포명령을 내려 50-100명을 무참히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로써 라파예트는 '자유의 투사'에서 '샹드마르스의 학살자' 라는 악명을 지니게 되었다.

셋째, 1792년 9월 2일, 파리와 국경 사이에 있는 최후의 요새지 베르됭이 함락되자 파리 코뮌은 시민들에게 '무기를 들라'는 격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투옥된 혐의자들이 봉기할 것이 두려워 흥분한 민중들이 파리 감옥을 기습해 1100‒1400명의 죄인들을 즉결 처형하는, 9월 학살이라고 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학살된 사람 중 4분의 3이 일반법 위반자였고 선서거부신부는 270명이었다. 당시 당통은 이 사건을 묵인했고, 로베스피에르는 '살인마'처럼 "그 정도의 대가없이 전제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죄도 없는 사람들을 정식재판도 없이 집단학살하는 것을 묵인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는 이들의 처사는 다분히 정치적인 것이었다.

공포정치의 상징인 단두대

공포정치의 상징인 단두대

넷째, 공식적인 거래에서 아씨냐의 지불을 거부하는 자에게도 사형이 선고되었다. 1793년 9월까지 혁명재판소는 소환된 260명 가운데 66명, 1793년 마지막 3개월 동안에는 395명의 기소자 중 177명을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 12월에 파리에서 체포된 반혁명 혐의자는 4525명으로 프랑스 전체로는 30만 이상이었다. 특히 악명 높은 파리의 검사 푸키에 탱빌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오를레앙 공작, 뒤 바리 부인을 10월에, 지롱드파 지도자들을 11월에 처형했다. 대부분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지만 리옹에서는 총살형, 낭트에서는 익사형이 내려지기도 했다.

다섯째, 방데 지방의 주민학살이다. 베긴교단의 수녀(beguine)와 여성복자(beate)등을 포함한 반혁명주의자와 왕당파들이 참여한 방데 반란이 일어나자 1793년 8월 1일, 국민공회는 방데 지방을 파괴하도록 명했고 왕당파 군대는 12월 23일에 전멸되었다. 튀로 장군이 조직한 '지옥의 부대'는 혁명정부의 동의를 얻어 방데 지방을 수색하는 가운데 마을과 곡식을 불태우며 주민을 학살했다. 아이들도, 부녀자도, 심지어 젖먹이도 살해당했다. 혁명군은 방데 사람들을 '비적 떼'로 간주했다. 여자들은 임산부이건 아니건 '생식의 밭고랑'이라 하여 학살당했다. 심지어 이 지역 출신인 공화국의 군인조차 학살당했다. 약 18%의 주거지가 파괴되었고 반란지역 인구의 30%인 25만 명을 학살한 만행이 저질러졌다.

여섯째, 1794년에 로베스피에르의 암살기도 사건으로 공포정치가 강화되면서 처형된 사람과 테르미도르 사건으로 처형된 사람들이다. 처형된 사람들은 1794년 6~7월, 파리에서 약 1300명, 같은 해 낭트에서 3000명으로 추산된다. 또한 테르미도르 사건으로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등 107명이 3일 동안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1795년 7월까지 처형된 사람은 모두 4-5만 명이나 되었고, 13-15만 명은 조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도피했다. 이 시대는 말 그대로 공포와 처참한 희생의 시대였다. 특히 혁명군은 서부, 남부, 론강 지역 등을 강타하며 혐의자들을 처형했다. 이들 중 부르주아가 25%, 농민이 28%, 상퀼로트가 31%, 귀족이 8%, 성직자가 7% 정도인 것으로 보아 희생자는 주로 농민과 노동자였으니 누구를 위한 혁명이었으며, 정확한 죄목이 무엇이었는지 의문이다. 공포정치 말기에 처형당한 사람은 달마다 50%씩 증가했다.

1793년부터 1796년 사이에 약 17만 명이 희생되었고, 대외전쟁으로 약 100만 명이 죽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100만 명이 전사한 것을 보면 프랑스 혁명은 살육과 공포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무분별한 처형과 무자비한 폭력은 정말 인류사회의 악이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나 생쥐스트 등은 그것을 '필요악'으로 생각했다. 알베르 소불의 말처럼 피와 눈물에 대한 책임은 정의를 위해 투쟁한 자들이 아닌 탄압과 폭력을 위해 무장한 자들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재판도 없이, 변호인도 없이 일방적으로 억울하게 살해된 이들의 넋이 과연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7월 14일의 기념행사로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

http://terms.naver.com/entry.nhn?cid=813&docId=1387059&mobile&categoryId=1586


제글을 실수로 삭제해서 재업합니다.


 전 프랑스 혁명이 이렇게 더러운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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