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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대한제국200년사-(16)한미전쟁과 일본병합
게시물ID : history_479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2013년체제
추천 : 19
조회수 : 1720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2/06/21 22:22:43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필리핀을 차지하여 아시아,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한 미국은 호시탐탐 중국과 일본에 진출하기 위한 빌미를 마련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의 총리대신이던 이토오 히루부미는 필리핀 총독으로 새로 임명된 맥아더의 취임 축하연의 참석을 핑계로 마닐라를 방문하여 맥아더와 비밀회동을 갖고 은밀한 제안을 하였다. 

미국이 일본에서 대한제국을 몰아내고 일본의 주권을 인정해 준다면 일본에 대한 미국의 독점적 특혜권을 보장해 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맥아더와의 회동에서 긍정적 답변을 얻어낸 이토오 히루부미는 동경 시내에서 대한제국군의 철수와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는 관제 시위를 조작하여 유혈충돌을 야기시켰다. 

미국은 네덜란드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일본에 대한 대한제국의 강점을 비난하며 대한제국에게 일본 철수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러한 미국의 외교적 공세는 향후 예상되는 양국간의 군사적 충돌에서 일본독립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확보하고 유럽열강들의 지원 내지는 중립을 유지시키기 위한 술책이었다. 

대한제국의 대표 이 준은 오히려 미국의 필리핀 침략을 강력히 비난하고 아시아에서 구미열강들의 군사적 강점을 해소하기 위한 결의안을 제출하여 반격에 나섰다. 
애초부터 회의는 전 세계 식민지에 대한 기존 열강들의 이해를 조절하는데 관심이 있었지 피압박 민족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관심을 두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양국의 공방은 결국 각각 의례적인 일회용으로 끝나버렸다. 

미국은 대한제국이 러시아와 중국과의 연이은 전쟁에서 상당한 군사적 손실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력의 대부분이 러시아와 중국 국경 일대에 배치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이것을 기회로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착수하였다. 
사실 두 차례의 연이은 전쟁에서 대한제국은 해군력의 절반을 상실하고 육군의 주력도 상당한 피해를 입은 상태라 미국과의 전쟁에 부담을 느끼던 처지였다. 

미국은 필리핀의 마닐라항에 주둔하고 잇던 극동함대와 하와이의 진주만에 정박하고 있던 태평양 함대를 총동원하여 전격적으로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일본열도에 대한 공격의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곧이어 류쿠열도 일대에서 수 차례 벌어진 양국 함대와의 치열한 해전에서, 잇단 전쟁으로 상당한 전투력을 상실한 대한제국 해군을 제압하는데 일단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해전에서의 승리에 도취되어 섣불리 큐슈 상륙에 나선 미 해병대 2만 병력은 대한제국의 정예 해병대의 반격에 막혀 거의 궤멸되다시피 하여 극소수의 생존자만 살아남는 몰살을 당하고 수 천구의 시체를 쌓아둔 채 황급히 퇴각하고 말았다. 

미국은 대한제국군의 전투력과 화력이 자신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막강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일본열도 상륙을 감행하여 전면전을 펼치기에는 너무 자신들의 희생이 막대할 것 같고 승산도 보이지 않아 잠시 주춤하게 되었다. 

미군의 본토 상륙을 고대하며 대한제국 주둔군에 대한 선제 공격에 나선 일본 독립군은 개전 초기에 내륙의 몇몇 현을 장악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전열을 정비한 대한제국군의 공세적인 반격에 점차 밀리게 되었다. 
도고(東鄕平八郞)와 노기(乃木希典)가 이끄는 일본 독립군의 숫자는 20만으로 불어나 있었으나 농기구와 죽창 등으로 대부분 무장도 변변히 갖추지 못한 상태인데다가 군사적 훈련도 전혀 받아보지 못한 농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주로 해안지방에 살며 상공업에 종사하던 도시인들은 일본의 독립전쟁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거나 일부는 친대한제국적 경향까지 나타내었으며 반란에 참가한 내륙지방의 다수 농민들도 자신들의 옛 영주였던 반란군 지도부들의 강압과 종용에 마지못해 전선으로 내몰린 경우가 많아 전반적으로 독립군의 사기는 그리 높은 편이 못되었다. 

대한제국군의 강력한 공세에 밀려 수세에 몰린 일본 독립군은 오매불망 미국군의 본토 상륙 만을 학수고대하며 버티나 미국군이 큐슈에서 대한제국군에 격퇴되어 되돌아갔다는 절망적인 소식에 접하고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잇따른 탈영과 하극상으로 독립군 진영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자 지도부는 최후의 일전을 서둘러 군대를 다시 전선으로 내몰았다. 

일본 독립군은 과거 막부의 창시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시다 미쓰나리를 제압하고 천하를 차지하게 된 결정적 전승지인 세키가하라에 배수의 진을 치고 결전을 준비했다. 
마침내 결전의 날이 밝아 마지막 사무라이의 위엄을 잃지 않고 백마를 타고 진두 지휘에 나선 도고와 노기장군의 강력한 독전에 20만 대군이 총공세에 나섰으나, 일본 주둔군 총사령관 안중근의 지휘하에 최신예 대포와 기관총으로 잘 무장된 대한제국군의 강력한 화력에 밀려 추풍낙엽이 되어 온 산과 강을 벌건 핏빛으로 물들이며 거의 몰살당하고 말았다. 

남방에서 미국과의 전선이 고착화되고 일본군의 반란을 제압한 대한제국군은 전선을 확대하여 사할린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대 2개 사단으로 알래스카를 기습적으로 점령하였다. 
알래스카는 본래 러시아 땅이었으나 1867년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불모지로 판단하고 태평양으로 진출하던 미국에 단돈 720만 달러에 팔아 넘겨 미국 땅이 되어 있던 곳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 기습적으로 알래스카를 점령당하여 미국 본토까지 위협받게 된 미국은 더 이상 이 전쟁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서둘러 종전협상에 나섰다. 
영국의 주선으로 대한제국과 미국은 타이완(臺灣)의 타이베이(臺北)에서 종전협상을 벌여 일본과 필리핀에서의 상대방의 지배권을 상호 인정하고, 알래스카에 대한 대한제국 점령을 인정하는 대신 미국은 괌과 사이판 등 류쿠열도에 속한 남부 일부 섬의 조차를 인정받아 자국 선적의 북태평양 항해를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대한제국과의 두 차례의 전쟁에서 연거푸 참패한 미국은 대한제국과의 화해를 통해 중국과 일본 등으로 진출하여 그나마 자국의 이익을 모색하기로 정책을 전환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1909년) 
미국과의 종전 후 대한제국은 일본을 더 이상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후방에서의 심각한 안보적 위협에 직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그 동안 내정에서의 자치를 보장해 주었던 방침을 철회하고 완전한 병합을 이루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대한제국은 메이지 천황의 동의를 얻어 일본의 내각과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고 천황과 황족의 신분을 보호해 주고 재산을 보장해 주는 선에서 천황을 왕으로 강등시키고 마침내 일본과의 완전한 합방을 성사시켰다. 일본의 초대 총독으로는 대한제국 일본 주둔군 총사령관이었던 안중근이 임명되었다. 
안중근 총독은 취임하자 먼저 미국과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킨 전 총리대신 이토오 히루부미 등 반란 주도 세력을 대거 체포하여 처형하고 일본 지배의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공고히 하였다. 

이로써 서기 7세기경에 성립되어 이후 1300년간 지속되어온 일본의 야마토 조정의 역사는 막을 내리고, 일본열도는 백제 멸망 이후 다시금 한민족의 지배하에 들게 되었다. (19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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