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무명논객
일전에 나는 대처리즘에 관하여 비판(http://blog.daum.net/liveinthought/47)한 적이 있었다. 박근혜 정부의 최근 행보들을 보면서, 나는 대처를 다시금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경제적 실천이라던가 정책적 측면의 기술적, 행정적 장단점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 대처리즘이 지향하는 언어를 박근혜 정부가 쏙 빼닮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나는 대처리즘이 공화주의를 붕괴시키며, 대중적 운동을 공격함으로서 사회의 연대를 급속히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극우적 정부’였다고 비판하였다. 대선 당시 한국의 우파들은 박근혜 후보에게 “대처가 되어라”라고 주문한 바 있었는데, 나는 이것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정국, 그리고 철도파업과 이어지는 시민들의 지지행렬, 연이은 총파업까지, 2013년 말은 스펙타클 그 자체였다. 이런 정세 변화에 대해 박근혜 정부는 어떻게 대응했는가? 이미 일각에서는 박근혜 정부에 대하여 인민주의(남종석), 파시즘(김동춘) 등등 여러 가지 진단을 내리고 있는 상황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1년을 맞이하여 조심스레 말하자면, 박근혜 정부는 많은 경우 대처리즘의 그것과 닮아 있으며, 유사 파시즘에 가까운 정부라는 것이 나의 견해다.
대선 당시 복지를 주장하였던 논조와는 다르게, 박근혜 정부의 신년사는 대부분이 개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지난 15년 간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오랜 기간 진행 되어온 구조로부터, 복지에 대한 요구를 감당하기에는 구조적 개혁에 관한 압박이 먼저 있었을 것이다. 내가 제기하는 질문은 이렇다. 그렇다면, 그러한 개혁을 수행하는 것은 과연 민주적 과정 위에 있었는가? 내가 이제까지 지켜본 박근혜 정부의 언어는 차라리 권위주의-유사파시즘에 가까우면 가까웠지, 민주적 가치를 담보한다고 여겨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박근혜 정부는 분명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로 그 권위와 정당성을 획득하였다.(국정원의 선거 개입이라던가, 부정선거 논란은 일단은 논외로 치자.) 박근혜 정부는 출범부터 시종일관 ‘법과 원칙’을 이야기하며, 철도 노조 파업 시국에서는 ‘불법과의 타협은 없다’라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일부 극우파들은 이러한 박근혜 정부의 행태에 대하여 ‘법치를 정초하기 위한 용단’이라고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 같다. 박근혜 정부는 법의 단호한 적용과 집행을 언도하였고, 실제로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집권 초부터 강공을 펼쳤다. 철도 노조 파업과, 민주노총-한국노총 양대 노총이 연대 총파업을 실시한 유례 없는 사태를 맞이하여 박근혜 정부는 “자랑스러운 불통”을 말하였고, 정국이 어느 정도 해소 조짐이 보이자 “유언비어에 적극대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이 와중 민주당의 헛발질은 덤이다.)
일련의 사건 전개에 있어서, 각각의 상황 속에 놓인 주체들이 박근혜 정부의 ‘법치’라는 언명과 얼마나 접점을 이루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확실하게 언급할 수 있는 것은 박근혜 정부의 법치에 관한 언어 체계다. 주지하다시피, 법은 일상으로부터 발생하는 갈등을 조정-규율하기 위한 규칙으로서 기능하게 되며, 바람직한 민주주의 사회의 경우 ‘법치’가 성립하고자 한다면 위로부터의 준법 강요가 아니라 법 자체의 적용과 집행, 그리고 판결을 내리는 법관의 판단이 얼마나 사회적 책임과 압력에 노출되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가령, 우리는 현대사에서 발견되고 있는 이집트 혁명, 재스민 혁명 등의 대중운동이 ‘불법’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으며 나아가 그러한 운동이 법치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판단 이전에 운동이 벌어지게 된 정치적 배경과 압박 주체를 먼저 살펴보게 된다. 발전되고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치라는 가치가 준수되어야 한다는 점이야 이견을 달 필요가 없겠으나, 그러한 법의 준수에 관한 도덕적 강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이는 사회적 문제제기의 차원으로 이양되어야 옳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시종일관 법치에 관한 도덕적 강제를 정치의 제 1 지상과제로 삼고 있다.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이 벌어진 데에 대하여, 그것을 ‘불법’이나 ‘유언비어’ 등의 관념으로 환원하는 레토릭을 구사함으로서, 정치적 압력 자체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기성 정당들이 운동에 효과적으로 결합하지 못한 문제도 있겠지만, 설령 기성 제도권과의 유기적 결합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박근혜 정부가 이러한 대중적 압력을 수렴했을지는 의문점으로 남게 된다. ‘법과 질서’라는 가치 체계가 현실 정치를 규율하고 조정하는 규범체계로서가 아니라,일자의 통일된 전체주의 의식으로 환원되어야 하는 도덕적 명령으로서 강제 되는 레토릭이 구사되는 시점에서, 과연 박근혜 정부가 올바른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는지 심각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그나마 희망적인 것이 있다면, 최근 철도노조 파업에 관하여 검찰이 노조원들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였으나 법원이 이를 기각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박근혜 행정부의 행동과는 달리 법원이 스스로의 독립성을 구축해 가고 있음을 반증해주는 사례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박근혜 정부가 호명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줄곧 박근혜 정부는 ‘국민 대통합’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서 정부를 선전하였으나, 과연 ‘국민 대통합’이라는 테제가 호명하는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지점은 불분명하다. 이미 철도 파업을 기점으로 정치적 대립은 양극화로 치달았으며, 고학력 중산층을 주요 지지층으로 삼고 있는 주요한 시민단체들은 대부분이 박근혜 정부와 대립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다른 한 편에서, 극우파들이 저열한 반달리즘과 더불어 나치 돌격대를 연상케 하는 완장 행위를 하고 다니는 시점에서,이러한 정치적 갈등을 봉합하고 사회적 연대를 재건할 마땅한 수단이 존재하는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모종의 타개책보다는 ‘내부의 적’을 상정함으로서 그들을 향해 책임과 분노를 전가함으로서 상황을 모면하고자 한다. 이를테면, 일종의 ‘이념적 불러내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념적 불러내기’란, 사실이나 현상에 대해 사회적 의미가 부여되는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이 동원되고 접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박근혜 정부의 경우, 이념적 불러내기의 동원 대상은 다름 아닌 반공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다. 교학사 교과서 논란, 그리고 얼마 전 북한에서의 장성택의 숙청, 나아가 철도노조 파업 시국에서 “노조 간부 중 종북주의자 적발”이라는 보도 등등, 박근혜 정부는 곳곳에서 반공주의를 불러내고 있다. 이런 이념적 불러내기의 최대 수혜자는 시민사회가 아니라, 열린 사회를 파괴하고자 시도하는 극우파들이다.(극우파들의 활동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것은 단순한 미디어의 과장 보도 여파가 아니라, 실제로 이명박 때부터 극우단체들의 숫자는 급격히 증가해왔다.)
내가 박근혜 정부를 유사 파시즘 정부로 규정하는 데에는 바로 이 지점이 주효하게 작용하였다.민주주의 사회에서 행정부 수반의 역할은 그들의 최대 입법자인 시민 사회로부터의 압력과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나아가 의회와 법원으로부터 견제되어야 하는 제한적 기구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준법의 화신’으로서, 준법의 도덕적 명령을 강제하는 ‘아버지’로서의 지위를 찬탈하였고, 열린 사회로부터 생산되는 건강한 담론을 파괴하는 이념적 불러내기를 통해 이데올로기적 압력을 권위적으로 행사하고자 하는 정치적 시도들을 감행함으로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였다. 박근혜는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말하였지만, 민주적 가치들에 도전하면서 실현되는 ‘비정상의 정상화’가 과연 얼마나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일각에서는 박근혜 정부를 ‘독재’라고 규탄하는 듯 하다. 엄밀한 규정에서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지금과 같은 유사 파시즘적 행보가 이어진다면 민주주의의 후퇴는 기정사실이라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