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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한국 군인들이 베트남여성분들께 한 행동을 아시는지요..
게시물ID : humordata_48023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프로세르핀
추천 : 16
조회수 : 1006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08/09/13 12:51:59
한 일본여성분들께서 할머니분들과 위안부관련 시위를 하시는 기사내용 밑에 달린 댓글을 보았습니다. 근데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음. 우리나라가 베트남전쟁에 참여했던건 다들 아실꺼예요. 우리나라 군인들이 베트남에 가서 얼마나 참혹한 짓을 저질렀는지는 세상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많은 분들이 모를꺼예요. 일본인이 우리 할머니들에게 했던 짓보다 더 심각한짓을 했어요 우리나라 군인들은.. 젖먹고 있는 아이옆에두고 가슴을 도려내고.. 그 증거가 라이따이한이예요. 아버지없는 베트남 아이들.. 한국 군인들이 베트남 전쟁시 베트남여자를 통해 성적욕구를 채우고 그대로 버리다싶이 했기때문에 지금의 라이따이한들이 있는거예요; 베트남 호치민에 가보면 시내 한가운데에 동상이 있는데 그 동상에 한국이 우릴 도와준것을 잊지 않겠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한 짓 또한 잊지않겠다 이렇게 써있데요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쓴 한국군인들에 대해 얘기와 함께요.. 우리가 일본에게 위안부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거예요. 이들에게 사과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이들에게 사과를 해야 하니까요. 우리가 일본보다 더 나쁜짓을 많이 했으니까요.. 물론 우리할머니들 그렇게 한 놈들 손톱을 하나한 뽑아가며 온 몸을 난도질해가며 죽여도 모자라지만 우리도 일본인들보다 더 나쁜짓했잖아요.. 16:05 이 일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건 미국이 우리나라 군인들이 한 짓을 덮어두었기 때문이예요; 우리도 베트남에 가서 무릎꿇고 사과받고 저들에게 사과를 요구해야 되지않을까요? 우리죄는 이렇게 묻어버리고 우리만 용서받기엔 너무 떳떳하지 못하지 않나요? 이런글 쓰면 혹여나 나쁜댓글 달 분 있을지 모르겠지만 전 맞는 말을 했을 뿐이예요. 고등학생분들 많으니까 국사나 근현대사등 많은 선생님들께 한번 여쭈어 보세요 제 말이 맞는지 아닌지..다시한번 전 우리할머니들이 일본정부에게 석고대죄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우리도 부끄러운 과거는 하루빨리 청산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 일본인들 정말 고맙네요 16:05 이런 식의 내용입니다.. 정말 간단하게 한줄로 간추려 보자면 '우리나라 군인 역시 베트남전때 베트남여성분들께 일본놈들이 우리 할머님들께 하던짓 보다 훨씬 더 심한 짓을 저질렀다' 는 겁니다.. 일본, 우리 할머니분들께 정말 씻지 못할 상처를 안겨주셨죠.. 그에 대한 사과는 마땅히 받아야 하는겁니다. 그게 당연한거구요. 그치만 우리 역시 베트남분들께 사과해야되는 것 아닐까요?? 그리고 라이따이한이라는것은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 이건 어떤 라이따이한 관련 프로그램 밑에 나와있었던 글인데요. 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따이한’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떠난 한국인 아버지를 기다리는 라이따이한의 아픔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라이따이한 ‘푸옹’은 몇 년 전 한국인과 결혼했지만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고 한국으로 떠난 뒤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다.그도 어머니처럼 언제 올 줄 모르는 남편을 기다리며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다. 제작진은 베트남 투자 열풍이 거세지면서 베트남 현지에 진출한 한국인 사업가와 한국 유학생들이 남기고 간 라이따이한들이 늘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고통받는 베트남 여성과 라이따이한의 삶을 집중 조명한다. -밑에는 한국군들이 했던 짓입니다.... "1969년 10월 14일, 베트남 남부 판랑지역에서 남한 군인들이 린선 사 스님들을 향해 총기를 휘두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이공의 보도에 따르면 남한군 한명이 린선사에서 베트남 여성을 희롱하다 주지승에게 쫓겨나자 이에 격분, 동료들을 몰고 와 총기를 난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사건으로 71살의 주지승, 69살의 노승, 41살의 여승, 15살의 행자승 등 4명이 사망한 사실을 베트남 정부가 공식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인민군대>자 1969. 10. 24) (중략) 당시 유일한 생존자인 푸(78)스님과 현장 목격자인 응웬티유엔한(45)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내 필자를 짓누르곤 했던 불안이, 부인하고만 싶었던 이야기가 눈앞에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아이건 산모건 사정없이. "따이한(남한) 군인들이 먼저 스님들을 향해 총을 쏘았어요. 이어서 살려달라며 달아나는 여자 보살님에게도 총을 쏘았지요. 그리고는 시체를 모두 불태웠어요."유엔한의 증언이다. 당시 겨우 15살이던 그는 두려움에 질려 고함도 지르지 못하고 숨어만 있었다고 고백한다. 린선사는 모두 다섯스님이 거처하는 자그마한 절이었다. 그때 푸 스님은 주지스님보다 먼저 마을에 내려가 초상집에서 독경을 읽고 있었따. 증언의 대부분은 유엔한을 통해 이뤄졌고, 그 절의 유일한 생존자인 푸 스님은 말이 없다. 당시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람들은 그 때 그 학살의 주인공인 따이한의 후예들을 살뜰히 배려한다. 시원한 차를 내오고, 과일을 깎아 권하고, 파파야를 먹느라 지저분해진 입을 닦으라고 물까지 받아다 줄 때는 울컥 눈물이 솟았다. (중략) "여성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 한국군은 잔혹한 대량 학살을 일삼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조차 가급적 직접적인 교전은 피하려 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전선도 없고 적이 누군지도 모르는 베트남전에서 베트콩의 근거지를 수색, 파괴한다는 작전상의 명분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학살행위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기록은 그 내용이 워낙 끔찍해 자세히 밝히기에 부담이 없지 않았지만, 그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1965년 12월 22일, 한국군 작전병력 2개 대대가 빈딩성, 퀴년시에 있는 투이프 군, 프 호아사(使), 턴지앙 촌에 500여발의 대포를 발사한 뒤 "깨끗이 죽이고,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파괴한다"는 구호 아래 수색소탕작전을 펼쳤다. 그들은 이 마을에서 12살 이하 22명의 어린이, 22명의 여성, 3명의 임산부, 70살 이상 6명의 노인을 포함, 50여명이 넘는 양민을 학살했다. ".랑은 아이를 출산한 지 이틀만에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아이는 군화발에 짓이겨진 채 피가 낭자한 어머니의 가슴위에 던져져 있었다. 임신 8개월에 이른 축은 총알이 관통해 숨졌으며, 자궁이 밖으로 들어내져 있었다. 남한 병사는 한살배기 어린아이를 업고 있던 찬도 총을 쏘아 죽였고, 아이의 머리를 잘라 땅에 내동댕이쳤으며, 남은 물통은 여러 조각으로 잘라내 먼지구덩이에 버렸다. 그들은 또한 두살배기 아이의 목을 꺾어 죽였고, 한 아이의 몸을 들어올려 나무에 던져 숨지게 한 뒤 불에 태웠다. 그리고는 12살 난 융의 다리를 쏘아 넘어뜨린 뒤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넣었다." 판랑에서 헤어진 지 이틀만에 퀴년시를 조사중인 "나와 우리" 일행에게서 전화가 왔다. "찾았어요! 당시 따이선 현 인민위원회 주석 말이에요." 1966년 3월 19일과 20일 이틀간에 걸친 "베트남 중부 각 성의 전쟁범죄조사회의"에서 남한 군대의 죄악상을 낱낱이 밝혔던 응웬탄퐁을 이르는 말이다. " 손에 들고 있는 이 자료가 점점 두려워지는군요. 어쩌면 우리는 이 자료를 더 보충해야 할지도 몰라요. 빈딘성을 중심으로 이 자료에 소개된 네 지역말고도 한국군의 학살현장이 더 있다고 하는군요." 당시 응웬탄퐁의 보고에 따르면 66년 1월 23일부터 2월 26일까지 약 한달 동안 맹호부대 3개 소대, 2개 보안대대, 3개 민간자위대에 의해 이지역에서만 모두 1200명의 주민이 학살됐고, 그 중에는 한명도 남김없이 몰살당한 가족이 8가구나 됐다. 또한 1535채의 가옥과 850만t에 이르는 양식이 불태워졌고, 649마리에 이르는 물소가 총탄에 맞아 죽거나 불태워졌다. 이러한 수색소탕작전은 일차적으로 융단폭격 등으로 작전지역을 공개하고, 한국군 등 지상군이 현장에 투입되어 마을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즉결처분한 뒤 집을 불사르고 불도저 등으로 마을 전체를 밀어버리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생존자들의 산국군에 대한 증언에서 공통되는 점은, 무차별 기관총 난사, 대량살육, 임산부 난자살해, 여자들에 대한 강간살해, 가옥 불지르기 등이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국군들의 양민학살 방식을 정리해보면 몇가지 공통된 유형이 나타난다. -주민들(대부분이 여성과 노인, 어린이들)을 한데 끌어모은 뒤 다시 몇개의 그룹으로 나눈 다음 기관총을 난사해 몰살시킨다. -주민들을 한집에 몰아넣고 총을 난사한 뒤 집과 함께 죽은 자와 산 자를 통째로 불태운다. -아이들의 머리를 깨뜨리거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절단해 불에 던져넣는다. -여성들을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나올 대까지 군화발로 짓밟는다. -주민들을 마을의 땅굴로 몰아넣고 독가스를 분사해 질식사시킨다. 한국군의 대량학살이 자행된 곳에는 아이들의 입에 캔디나 케이크가 물려 있었다. 노인들의 입에는 담배가 물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마을사람들을 안심시키면서 한곳으로 모으는 한 수단이었던 듯하다. 과연 그대들에게 진정한 반성은 있는가 우리에게도 베트남전은 잊고 싶은 전쟁이다. 한국은 1964년 의료지원단과 태권도 교관 등 270여명을 사이공 남쪽 붕타우에 파견함으로써 베트남전에 군사적인 개입을 시작했다. 이후 65년에서 73년까지 약 30만명의 전투부대를 "베트남 정부의 요청" 이라는 미명 아래 베트남전선에 투입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들도 4960여명이 전사했고 10여만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한국군은 또한 적군인 베트남인을 4만 1450명이나 죽이는 전승(?)을 거두기도 했다. 아군 사망자수의 10배에 이르는 적군을 전사시킨 것이다. 그것도 공식적인 통계상으로만! 이제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종전 24년을 맞는 이 순간에도 지구상의 한켠에서는 새로운 총성이 몰려온다. 한국에서는 코소보에서의 인권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다. 20세긱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21세기의 또 다른 상처 하나를 낳고 있는 것이다.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상처받은 "오늘"을 치유하는 과정이 없이는 우리에게 미래가 없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양심에 칼을 대는 아픔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할지라도. 역사는 우리에게 의문부호 하나를 던져놓는다. 과연 그대들에게 진정한 반성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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