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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 완도행 버스
게시물ID : readers_480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다리짧은기린
추천 : 20
조회수 : 539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12/02 07:57:50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가녀린 몸에 걸친 얇은 코트. 왠지 모르게 추워 보인다는 생각보다도, 쓸쓸해 보인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눈을 밟으며 가뜩이나 천천히 걷고 있던 걸음을 서서히 멈추었다. 성탄이 다가오는 서울의 겨울은 분주했다. 사방에서 흘려 퍼지는 경쾌한 리듬에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과 달리, 그녀는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서 눈을 맞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목도리 하나 두르지 않은 채였다. 머릿속에서 그녀의 이름이 기억날 듯 말 듯 나지 않았다. 과연 그녀는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휴대폰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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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예 이사할 작정을 하고 오셨나보죠?”

  족히 서너 개는 되어 보이는 내 가방을 보더니 그녀가 물었다. 말하자면 도피인 셈이죠. 쓴웃음을 감추며 내가 말했다. 도저히 삶을 감당할 수가 없었거든요, 하는 뒷말은 애써 목구멍으로 삼켰다. 어디서 오셨어요? 서울이요. 그렇군요. 마음을 가다듬는 데엔 여기만한 곳이 없죠. 아마 마음에 드실 거예요. 미소와 무표정 사이 그 어딘가의 표정으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경험해봤다는 투였다. 그녀는 내 짐을 내 방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괜찮습니다, 거기 두세요. 아니에요. 빨리 정리하시고 내려와서 저녁이라도 드세요. 나는 알겠다는 듯 으쓱하고는, 나머지 짐을 방으로 옮겼다.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 곳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가 화답이라도 하듯 철썩거렸다. 비록 칠흑같이 어두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막연하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무 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소 허름하다면 허름한 민박집의 딸이었다.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여행객들의 수많은 풍문을 들으며 자라왔다 했다. 그러고 보면 저를 키운 것의 팔 할도 바람이었던 셈이죠, 아침상을 가지러 온 그녀가 말했다. 이곳에 살다보면, 흘러가는 것들에 대해서 익숙해지게 되요. 결국 영원한 건 저 바다밖에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우는 거죠. 여독이 좀 풀리셨으면, 밖에 나가 저 돌무더기 바닷가를 한번 거닐어보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요즘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거든요. 다소 쓸쓸하긴 하지만.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그녀는 말을 맺었다. 고맙습니다. 안 그래도 창 밖 풍경이 참 좋아서 나가보려던 참이었습니다. 비로소 맑아진 하늘 아래 붉어진 단풍잎과 탁 트인 바닷가가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가을날이었다.


  한참 바닷가를 거닐다가 해질녘에 다시 돌아왔을 땐 그나마 몇 머물던 여행객들도 돌아가 버린 눈치였다. 텅 비어버린 신발장과 불 꺼진 거실만이 나를 스산하게 맞이했다. 장을 보러간 건지, 주인 모녀마저 집에 없는 눈치였다. 부쩍 짧아진 해 탓에 창밖은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혼자서 한참을 멍하니 거실을 쳐다보다가, 내 방으로 올라갔다. 방은 어느새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우렁각시라도 왔다간 양 방 가운데 덩그러니 차려진 밥상 위에 조그마한 노트만이 남겨져 있었다. '오늘 손님이 아무도 없어서 어머니랑 시내에 다녀오려고 해요. 늦을 것 같으니 먼저 식사하세요.' 생김새만큼이나 정갈한 글씨체였다. 언제까지 계실 건가요? 기약 없습니다. 무턱대고 찾아와 기약 없이 머무를 거라는 나에게, 모녀는 다행히 과도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관심만을 보여주었다. 기껏 서울에서 도망쳐 온 나에게 갖은 서울소식만 골라서 알려주는 매정한 티비를 꺼버리고 바닷소리를 벗삼아 홀로 호젓하게 저녁을 먹었다.


  구계등엘 가본 적이 있나? 아니요.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술에 절어 사시던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을 때, 혼자서 무턱대고 완도행 버스를 탄 적이 있었어. 완도라고는 고등학교 지리 시간이랑 김 먹을 때밖에 들어본 적이 없는 내가 말이야. 아버지 발인을 끝내고 도망치다시피 버스에 올랐어. 될 대로 되라 하는 마음이었지. 눈앞에서 모든 게 사라지는 기분을 아는가? 시계를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가방이 없고, 당신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세상을 잃어버린... 그런 기분 말일세. 그때의 구계등이 나를 살렸지. 매일매일 나가서 넋 나간 사람처럼 바다를 몇 시간동안이나 보고 앉아있는데, 어느 날인가 떼죽음당한 물고기가 눈을 뜬 채로 내 앞으로 떠밀려 내려오더라고. 죽은 물고기들을 보면서 한참을 울었어. 그러고 나니까 주변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 구계등의 바다와 자갈과 숲과 그런 것들이 나를 다 위로해주고 있었던 거지. 직장 선배의 그 말을 가까스로 기억해내고 무턱대고 잡아탄 완도행 버스였다. 아닌 게 아니라 연필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필통을, 아니 모든 걸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따뜻한 물을 받아놓은 욕조에 앉아서 나는 한참을 울었다. 떠나가는 것들을 잡으려고 애써봐야 움켜쥔 손 사이로 빠져나가는 현실이 더욱 더 비참하게 느껴졌었다. 모쪼록 상처에 대비하거라. 선배와 포장마차에서 산낙지와 함께 막차가 끊길 때까지 소주를 마시던 밤이었다. 상처란 건 대개 스스로 받는 법이니까. 받아놓은 물이 미지근해질 때까지, 나는 멍하니 욕실의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나는 아무 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울음소리를 들었어요.

  욕실에서 나와 머리를 털고 있으니 노크소리가 들리고 곧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에게서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온 눈치였다. 도피해 온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상처가 있는 법이겠지요. 내가 말했다. 묘하게도 여기로 온 사람들은 대부분 기쁜 일보다 슬픈 일로 많이들 오더군요. 저는 그런 이야기를 수백 가지나 듣고 자랐고요. 그녀가 또 예의 묘한 중간단계의 표정을 지었다. 밤이 감당이 안 되신다면, 잠깐 나가실래요? 저 바다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그 중에 하나는 위로가 될지도 모르죠.


  다소 쌀쌀했지만 물결은 잔잔했다. 달빛이 밝아 밤바다를 거니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자갈밭을 걷다가 아무데서나 앉았다. 몇 년 전에 천둥 같은 사랑이 왔다가 이듬해에 떠나갔어요. 그 후 마음을 못 잡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어머니 계시는 이곳에 돌아왔어요. 박박 우겨 내 발로 떠나간 지 꼭 십년 만이었죠. 엄마는 기뻐하지도, 그렇다고 딱히 나를 보호자답게 위로해주지도 않았어요. 마치 내가 돌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었죠. 몇 달을 그렇게 말도 없이 일만 도와드렸어요. 결국엔 모두가 혼자라는 사실이 뭐가 그렇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모르겠어요. 혼자 남산만한 짐들을 지고 내려와서 폐인처럼 지내다가 다시 올라가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죠. 여기는 저에게 그런 곳이에요. 모두가 스쳐지나가는 곳. 바다만이 나를 위로해줬죠. 엄마와 내가 이런 곳에서 지박령이 되어버리진 않을까요? 그녀는 쓸쓸하게 웃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잠깐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마 당신도, 곧 회복할 거에요. 어떤 깊은 상처라도 말이죠. 다들 그렇게 조용히 회복하고는 다시 멋쩍게 떠나더군요. 그녀의 표정이, 이번에는 무표정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그 날 밤, 이불을 깔고 누울 준비를 하는데 조심스레 문이 열리며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불을 끄고서 조용히 사락사락 옷을 하나씩 벗었다. 그 날 밤 달빛만이 그녀와 나를 밝혀주었다. 나는 조심스럽고 또 조용하게 그녀를 안았다. 모든 것이 끝나고, 그녀는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무엇인가 말을 하려는 내게 그녀가 그러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일 아침에 당신은 떠나게 될거에요. 알고 있어요. 도피는 도피에서 끝나야 하니까요. 도피가 길어지면 유배가 되어버리죠.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십년이면 충분히 긴 시간입니다. 지박령이 되긴 싫다면서요. 서울로 올라올 생각은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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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대폰을 꺼낸 그녀가 액정을 보며 한참을 망설이더니,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어느새 그녀의 어깨 위에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뒤에 있는 커피숍에서는 캐롤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나는 코트를 벗어 팔에 걸치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 다음날 아침, 떠나는 나에게 그녀는 자그마한 쪽지를 하나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예의 그 정갈한 글씨체였다. 나는 그 쪽지를 언제나 들고 다녔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전쟁터로 다시 돌아온 기분이 어떻습니까?”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확실히 무표정보다는 미소에 가까운 표정으로, 그녀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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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2장을 살짝 초과하는데, 애교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단락간에 간격은 분량에서 제외했습니다.

'구계등'은 윤대녕 작가님의 천지간의 배경이었던 곳이고, 소설이 좋아 저도 다녀왔던 곳입니다.

캐나다에서 현재 교환학생 중에 오유문학제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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