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해는 갑작스레 떨어진다. 붉은 갑옷을 입은 군단장이 산을 넘던 장졸(將卒)들을 멈춰 세웠다. 가죽갑옷을 입은 척후대가 그들을 완만한 구릉지로 이끌었다. 야영을 준비하란 군단장의 말에 병사들은 말뚝을 박고, 천막을 세웠다. 지는 햇빛에 닿아 갑옷이 벌게져 번쩍거렸다. 그들의 얼굴도 흥분으로 달아올라 붉기는 마찬가지였다.
산과 산이 이어진 맥은 넓고 웅장했지만 험하지 않아 수개월의 피로가 누적된 병졸들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았다. 군단장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부하들은 앉거나 엎드리거나 누워서 쉬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향수와 치열한 전투와 오랜 행군을 보는 그의 눈에도 안쓰러운 것이 가득 맺히었다. 군단장은 산등성이를 노려보았다. 야영지를 내려다보는 능선은 날카로웠고 가팔랐다. 한낱 흙덩이 돌덩이가 비웃으며 목을 조여 오는 것만 같은 답답하고 불유쾌한 느낌에, 그는 눈을 감았다.
코끝을 간질이는 저녁의 산바람이 맑고 서늘하다. 다시 뜨인 눈에는 새롭고 밝은 것이 들어차 있었다. 이 산, 저 고개만 넘으면 적의 수도가 코앞이었다. 그것을 점령하는 것이 마지막 전투가 될 터였다. 삶과 삶이 부대끼는 싸움에서, 그들은 승리할 것이다. 창칼을 손에 쥔 인간들의 군대에 비해 포니들의 군대는 너무나도 빈약했다. 그들은 무기를 다루기를 불편하게 여겼고 선량해서 전쟁과는 맞지 않는 종족이다. 가족들이 살 수 있는 땅을 갈망하는 인간들에게 이퀘스트리아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인간들의 군단은 용맹했다. 계속되는 가뭄과 돌림병에 지친 그들은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돌격 앞으로, 충성스러운 그뿐이었다. 포니들의 권리는 배부른 소리이다. 그들은 캔틀롯을 파괴할 것이고, 또 승리할 것이다. 살아남을 것이다.
불모지가 된 고향을 떠나온 이들은 쉬면서도 갑옷을 벗지 않았고 창을 머리맡에 둔 채로 졸았다. 군단장은 야영지 곳곳을 어슬렁거리며 장병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했다. 붉은 갑옷이 붉은 빛을 받아 섬뜩한 색깔을 띠었다.
“내일이면 산을 마저 넘을 것이다. 편히 쉬어라.”
스스럼없고 권위 없는 말씨에도 병사들은 그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할 뿐 달리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저 계속해서 그들의 사령관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군단장님,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도 응답한다.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물음표는 힘이 없었다. 우리는 오늘 중으로 산을 넘을 수 있습니다. 야밤에 저 능선을 넘고 산을 내려가서, 적의 서울을 쳐부술 수 있습니다. 군단장은 다시 그들의 안색을 살폈다. 그들은 누르죽죽하거나 창백한 낯으로 군화를 고쳐 신었다. 우린 아직 더 싸울 수 있습니다.
그는 눈을 낮게 깔아 시선을 피했다. ‘난 아직 더 싸울 수 있어.’ 그의 부하들도, 심지어는 그 자신조차도 그에게 진군을 종용하고 있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도 유혹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이곳까지 오며 푸른 들판을 볼 때마다 당장 갑옷을 던져버리고 농사를 짓고 싶은 마음이 든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려는 그 자신과 부하들을 다독이고 엄벌하였다. 부하와 스스로를 견디고 이겨서 그가 군단의 장인 것이고 못 먹은 이들을 이끌고도 이곳까지 승승장구한 것이다. 풍 맞은 것처럼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고작 하루를 기다린다는 것이 몹시도 힘든 일이었다. 군단장은 고개를 돌렸다. 군단은 여전히 말짱하고 강건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몸은 그들의 의지를 따라가지 못하였다. 하룻밤을 푹 쉬어야만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마저 산을 넘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아침이 밝아올 것이다.”
병사들은 고개를 숙였다. 숙연한 태도였다.
산의 밤은 길고 춥다. 달에 홀린 바람들은 밤이면 산등성일 타고 꼭대기에 오른다. 밤바람들은 그곳에서 높이 뜬 달을 한참이나 바라만 보다가 부엉이 소리가 들리면 그때에야 다시 내려오는데, 이때 실망하여 흘린 눈물이 밤이슬이 되어서 산의 밤은 허벌나게 춥다. 족제비 수염이 난 그의 할아비는 두멧골의 밤에 쉬이 적응하지 못하는 그의 어미에게 누비옷을 건네며 산간의 법도를 일러주었다. 아가, 다랭이논에 모를 심고 남는 땅에 봄콩을 심으여. 아가, 보리는 심었시면 벏고 가을콩이 몸에 좋어야. 아가, 멧도지를 보면은 눈을 깔지를 말어야……. 산 아래 큰강나루 국밥집에서 시집온 그의 어미는 산을 공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어미는 산신당에 제를 드렸고 늦도록 오지 않는 지아비를 걱정했다. 천한 뱃사공의 피가 섞였지만, 그는 뱃속에서부터 박한 돌산을 배웠다. 그는 날 적부터 천박한 산사람이었다. 산에서, 산의 것들이, 낮마다 등뼈가 뒤틀리도록 싸워도 척박한 다랭이논밭의 소출은 형편없었다. 어려서 먹지 못하고 늙어서 쉬지 못해도 산사람들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산이 없이는 살 수 없었고 산에게 감히 말을 건네지도 못했다. 그들은 서로 부둥켜안아 추위를 달랬고 두런대며 허기를 잊었다. 그들은 죽지 못해서 살았다. 산사람은 산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산의 허락 없이는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산의 종이었고, 포로였다.
그는 군단이 잠든 야영지를 어슬렁거리다가 어느 막사에 들어섰다. 밤바람만 겨우 막는 비좁은 막사 안에 스물 남짓한 페가수스들이 밧줄에 꽁꽁 묶인 채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간만에 겪은 산의 추위에 얼어버린 탓인지, 그는 그 막사가 포로들을 수용한 막사라는 것을 꽤나 늦게 알아차렸다.
그들에게 페가수스들은 전쟁 내내 큰 골칫거리였다. 까닭은 간단했다. 페가수스는 내키면 인간을 공격할 수 있었지만 인간은 페가수스를 공격할 수 없었다. 날개 때문이다. 산과 고개를 넘고 넘어 그렇다. 그는 진정으로 날개를 부러워했다.
군단장은 몇 걸음을 더 걸었다. 발끝에 물컹하고 부드러운 것이 걸린다. 그것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재앙을 떨어뜨리던 푸른 날개였다. 어느 들판에서의, 상공의 용사들에 대한 기억은 그의 등허리에도 흉터로 남아 있었다. 허리를 숙여 날개를 만지작거린다. 날개란, 이렇게 부드러운 것이구나……. 감상은 부질없다. 바람을 가르던 페가수스들은 산을 넘지 못하고 포획되었다. 그들은 산에서 잡혀 산에 잡혀 있었다. 그처럼 그들 역시 까마득한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산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그가 만지작거리자 자던 도중에 깨어났는지 털빛 파란 페가수스가 날개를 접어 치웠다. 살짝 열린 눈꺼풀 사이로 어둡고 붉은 빛의 눈이 퀭하니 죽어 있었다. 이쁘군. 그는 헤죽 웃었다. 포니의 가는 목을 따라 난 여러 빛깔의, 무지개색 갈기를 보고는 더욱 크게 히죽거렸다. 페가수스는 포로라기엔 너무 아름다웠다. 어쩌면 포로여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프루아사르는 포로를, 아니, 이 포니를 풀어주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는 군단장이었다.
“군단장님.”
척후대가 귀환했습니다. 번을 서던 병사들을 따라 척후대가 들어왔다. 들어와 군단장의 앞에 선 이는 하나였다. 척후대는 한 명이었다. “알로넨스, 보고하게.” 젊은 척후대장은 소리 없이 웃었다. 알로넨스는 허리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어 예를 표하지 않았으나 군단장은 신경 쓰지 않았다. “군단장님.” 군단장은 고개를 까딱였다. 계속 말하란 투였다.
“척후대는 전멸했습니다. 아니, 정정합니다. 저 빼고 다 전사했습니다.”
알로넨스는 웃는 낯이었다. 말하는 투가 평탄해서 군단장은 그의 말을 장화에 흙이 묻었다는 말과 비슷하게 알아들었다가 곧 눈을 크게 떴다. “산속에 매복중인 적이 있나?” 수백 명 중에서 한 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코앞에 파악하지 못한 전력이 있을 터이고 큰 전투를 앞두고 보통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적병의 규모는 어떻게 되는가?” 알로넨스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제가 왕립대학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스승님께선 걱정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남달리 영특한 데가 있었다. 내로라하는 명문가의 자제들도 쉬이 들어가지 못하는 왕립대학에 입학하기까지 한 알로넨스는 산골 오지 마을의 자랑이었다. 산사람들은 그가 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봇짐을 지고 고갯길을 내려가는 그를 배웅하며, 그가 옛이야기에서나 나오는 날개 달린 영웅처럼 위대한 이가 되어 그들을 산에서 해방시켜 주리라 믿었다.
“제게 이르시고 또 일러주셨지요. 너는 들에서 도시에서 살더라도 산의 사람이다, 하고요. 아시지 않습니까? 대추 선생님 말이에요.” 오직 그의 스승만이 그의 하산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대추를 좋아하던 허연 수염이 떠올라 군단장은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말을 돌리나. “어서 보고하게.” “저는 그 말씀을 늘 잊지 않았습니다. 저도 삼촌도 산에서 나고 산에서 자란 산사람입니다. 우린 산을 넘을 수 없어요. 그러니, 넘으려 해선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우스운지 알로넨스는 입가에 띤 잔잔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군단장은 웃지 못했다.
“척후대의 장은 전몰의 결과를 보고하라.”
척후대장은 핼쑥한 낯이었다. 총기가 가득하던 눈은 흐리멍덩하니 빛이 없었고 수염은 하룻밤 새에 덥수룩이 길어 지저분했다. 생존자는 입을 굳게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침묵이 산허리를 따라 길고 길게 퍼졌다. 상관에 대한 불복종이었고, 상명하복의 원칙에 어긋난 침묵이었다.
“왜, 쌤통이더냐?” 염병할!
군단장은 주먹을 떨었다. 떨림은 손끝에서 곧 어깨로, 입술로 번져나갔다. “여긴 조랑말들의 땅이니까, 저 말새끼들 잘 먹고 잘 살라고 꺼져야 하나?” 알로넨스는 웃지도 대답하지도 않은 채 그저 기이한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는 평생을 품고 산 분노라고도 할 수 있고 설움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격해짐을 느꼈다. 먹지 못한 원이었고 이제는 살지도 못하게 된 한이었다.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은 종족의 배신자이다. 자연의 오묘한 이치에 통달한 대학자였다던 대추 선생은 촌무지렁이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다. 제 스승이 죽자 제자는 남들 앞에서 반전을 외치지 않았다. 옆의 사람이 배고프다고 하면 따라서 배를 움켜잡았고, 누가 칼을 잡으면 같이 창을 들었다. 인간들의 저력은 군대로 몰렸다. 헛간에 남은 눅눅한 쌀알과 녹슨 철이 모였으며 젊은이들이 차출되었다. 신실한 사제나 성실한 농부가 아니라 오직 군인들만이 동포들을 배부르게 해줄 수 있다. 모두의 의견은 같았다. 사는 곳도 생긴 것도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배가 고팠다. 조국에서 굶어죽는 것보다야 타국에서 배불리 먹고 싸우다 죽는 것이 낫다. 군단장은 제자가 토착민들의 생명을 존중하는 줄을 알았지만 자신의 군단에 충군(充軍)시켰다.
“…….”
침묵은 길고 지루했다. 군법에 따르자면 즉석에서 목을 벨 수도 있었지만 프루아사르는 조카를 어찌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답답한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어했다. 사실 알로넨스의 보고를 꼭 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 원주민들의 구원군이 오기 전에 캔틀롯을 공략해야 했다. 적이 있어도 진격을 멈출 수 없다. 뭐가 있든 간에 처부서야 했다.
“내일, 포로들을 처형할 것이다.” 그의 말은 뜬금없었지만 침묵을 메우기 위해선 아무 말이라도 필요했다. “네가 맡아라.” 그 뒤로는 다시 정적이었다. 알로넨스는 파리한 안색으로 발밑만 쳐다보았다. 대화가 끝났다. 어색한 공기가 꿈을 꾸고 있을 포로들의 위로 쌓였다.
갑갑한 마음에 그는 알로넨스를 남겨두고 막사를 나섰다. 밤하늘은 막힌 데가 없어 넓었다. 막사 앞을 지키던 보초들이 눈으로 그에게 물음을 던졌다. “자리로 돌아가 근무하라.” 얼굴을 가리는 투구를 쓴 보초들은 묵묵히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굶어 죽은 이들의 아들들은 힘없는 걸음으로 진지 외곽의 목책으로 가 섰다. 그들은 혹여나 날개 달린 것들의 공습이 있을까, 횃불도 켜지 않고서 어둔 밤을 어서 날이 밝았으면 하는 기대로 지새우고 있었다. 내일, 산을 넘으면. 군단장은 침을 삼켰다. 그들의 머리 위로 밝고 둥근 달이 떠올랐다. 달은 먼 타지에서 본 것이나 고향에서 본 것이나 다르지 않았다. 똑같이 밝고 똑같이 둥글다. 그가 보는 것과 같은 달을 그의 가족들 역시 보고 있으리라. 대보름날인데, 부럼도 못 먹고……. 그의 가족들은 굶고 있을 터였다. 그는 거의 다 떨어지기 직전인 달을 재촉했다. 이놈아, 빨리 지거라. 그래야 친지들을 이 비옥한 땅으로 데려올 것 아니더냐. 농사꾼이 농지로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농사를 지으면, 먹고, 사는 것이 이치였다. 대자연의 이치를 설파하던 반전주의자들은 사람의 이치를 무시하였다. 먼 이치를 가까이 하고 가까운 이치를 멀리 해서, 그들은 추방되거나 맞아 죽었다.
달은 대답하지 않았다. 달에겐 답이 없다. 밤하늘엔 별이라도 있지 달은 너무 공허하다. 그가 살던 고향에서 보이던 토끼는 달에 없었다. 언제인가 들은 이곳 달의 이야기로, 달에는 어느 사악한 날개와 뿔이 모두 달린 암말이 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본 달에는 암말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무언가가 있다. 날개가 달린 말이 달을 지나고 있었다. 그것도 수십 마리나. 순간, 알로넨스의 삼촌 프루아사르는 달빛을 등지고 산을 넘는 그 광경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저 페가수스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목에 빳빳하게 힘을 준 그는 사위를 둘러보았다. 진지는 조용했다. 군단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공습은 아니다. 바쁘게 움직이던 그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알로네엔스!” 알로넨스는 막사에서 나와 그 앞에 서 있었다. 꼿꼿이 선 그의 주위로 끊어진 밧줄 조각 같은 것들이 널브러져 있는 듯하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그의 앞에는 날개 달린 포니가 있었다. 프루아사르가 보았던 진홍색의 눈이 부리나케 달려오는 군단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숨이 턱 하고 막힌다. 알로넨스의 손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더니 페가수스가 날개를 펼친다. 난다. 푸른 날개를 힘차게 퍼덕여 날아서 간다. 페가수스는 동쪽으로 날아갔다. 신비하고 다채로운 빛의 무지개가 가는 길을 쫓아 펼쳐졌다.
알로넨스를 본체만체하고 막사 안을 살핀 군단장은 신음을 흘렸다. 없다. 텅 비어 공허하다. 포로들은 모두 도망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고개를 뒤로 빼자 막사의 휘장이 다시 닫힌다. 그는 포로들을 풀어준 범인을 노려보았다. “너, 너!”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알로넨스를 가리키는 그의 손가락 끝이 성난 그의 얼굴처럼 덜덜 떨렸다. 군법을 위반하다 못해 아예 패대기를 친 알로넨스는 정작 말짱하게 웃는 낯이었다.
“어차피 쓸모도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죽여도 별 이득도 없고, 살려도 별 손실이 없는데, 기왕이면 죽이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군단장의 눈이 분노로 번들거렸다. 더 이상은 안 된다. 그는 칼을 뽑아들었다. 실제적인 이득이 어떻든 간에 군단은 포로들을 처형하는 것을 원했다. 그는 비록 그 군단의 장이었으나 주인은 아니었다. 군단이, 동족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어야 한다. “저기, 보입니까?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고 있어요.” 그리곤 곧 돌아와 우리를 도륙 내겠지. 달이 산 너머로 사라졌다. 포니들 역시 그러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세게 주면 줄수록 알로넨스를 가리킨 칼끝이 그를 제대로 겨누지 못하고 풍 맞은 것처럼 떨리는 것이었다. 그의 조카였지만 근본적으론 민족의 죄인이었다. 종족을 배신한 죄는 작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아도 칼도 말도 떨리기만 계속한다. “왜 그랬어?” 추궁에도 알로넨스는 싱글벙글, 사람 좋게 웃을 뿐이었다. 그는 웃는 얼굴이 두려웠다.
“알로오네엔스! 이 미친 노옴아아!”
코앞에 있음에도 군단장의 말은 마치 먼 곳의 이를 부르는 양 크고 간절했다. 그를 닮아 투박한 그의 칼도 휘둘리듯 떨려 밤바람을 쫓아내었다. 무슨 소란인지 병사들이 하나둘씩 깨어날 때에도 알로넨스는 여전히 담담했다.
“미쳐요? 제가 미쳤다고요? 하하…….”
“…….”
“전 미치지 않았습니다. 스승님두 마찬가지구요. 만약 제가 미쳐서 미친 말과 짓거리를 한다면, 제가 저기 해가 뜬다고 말하면 그것도 미친 겝니까?”
“…….”
동산(東山)에선 동이 터오고 있었다. 새벽의 어슴푸레한 빛이 하늘과 산을 물들이며 다가오고 있다. 군단장은 조카도, 해도 미쳐 간다고 생각했다. 낯선 타향에서 맞이하는 역사의 새벽은 환하니 아주 밝았다. 해는 곧 떠올랐다.
날이 밝았다. 군단은 기상하지 못했다. “우린 산을 넘을 수 없습니다.” 눈부신 태양을 바라보는 알로넨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치랄, 진리랄 것이 그의 젊고 수척한 얼굴에 담기어 있었다.
“…….”
군단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입을 벌리고 멍청하게 알로넨스가 보는 것과 같은 일출을 보고 있었다. 아침이다. 그는 아직 어둑한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하늘에 당당히 뜬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죄를 불사를 불꽃은 하나가 아니었다. 날개와 뿔을 가진 포니가 구름에 싸여 있고, 이글거리는 두 개의 태양이 그것의 눈에 새겨져 있었다. 여명을 맞이하는 프루아사르의 얼굴에는 어느새 공포도 경악도, 그렇다고 좌절도 아니지만 그것들과 매우 흡사한 것이 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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