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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적 이해를도와드리기 위한 사회민주주의 이념 정리
게시물ID : sisa_48145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명논객
추천 : 10
조회수 : 677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4/01/13 18:13:54

원본글 : http://todayhumor.com/?humorbest_628995

과거에 제가 쓴 글입니다.

사회민주주의에 관한 개념적 이해를 원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이렇게 정리한 글을 재차 업로드합니다.

드디어 시리즈가 끝났습니다. 재밌게들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오유에 앞으로 이런 배움글이 좀 더 많아지길 기대하며 시리즈 총정리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레비나스님이나 완화제님, 시사게 몇몇 분들께서 이런 방식으로 텍스트를 공유해주시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서로 배울 것도 많고, 저도 부족한 게 많으니까요..ㅎ


#1 http://todayhumor.com/?sisa_359310

#2 http://todayhumor.com/?sisa_359324

#3 http://todayhumor.com/?sisa_359339

#4 http://todayhumor.com/?sisa_359356

#5 http://todayhumor.com/?sisa_359372

#6 http://todayhumor.com/?sisa_359386

#7 http://todayhumor.com/?sisa_359402

#8 http://todayhumor.com/?sisa_359418

#9 http://todayhumor.com/?sisa_360280

#10 http://todayhumor.com/?sisa_360454




1. 독일 사민당의 탄생


일찍이 마르크스는 굉장히 숙명론적 당론을 지니고 있었다. 광범한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노동자 대중이 중심이 되는 계급 대중정당을 건설하면, 혁명적 시기에 노동자들이 혁명에 동참하리라는 생각을 지녔던 것. 독일 사회민주당, 약칭 SPD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정당이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면 안될 사실은, 역사적으로 존재하던 독일 최초의 사회민주당과, 현존하는 독일 사회민주당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다.


전자는 마르크스의 당론에 의거해, 혁명론을 지향하던 당이었고, 후자는 수정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다. 그러면, 독일 사회민주당은 어떤 경로로 수정주의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독일에서 최초로 결성된 노동자 정치조직은 라살레에 의해 창설되었다. <독일 노동자 총연맹>이 그것이다. 당대 독일을 가르던 두 세력의 중심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였다. 보수주의는 군주정을 유지하고자 하였고, 부르주아지에 토대를 두었던 자유주의자들은 입헌 군주정을 주장했다. 


라살레는 이 두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노동자들이 자본가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판단했고, 라살레의 <독일노동자총연맹>은 보수주의자들과 타협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 반대하는 또다른 사회주의자들이 탄생한다. 속칭 "아이제나흐파"라고 불리우는 이들인데, 이들은 라살레주의에 반대하여 <사회민주노동당>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라살레주의가 보수주의자들과의 타협을 주저하지 않았다면, <독일 사회민주노동당>의 중심인물이었던 베벨, 리프크네히트 같은 사람들은 자유주의자들과 연대할 망정, 보수주의자들과는 정면 대결하는 입장을 취했다.


대립각에 있던 <독일 사회민주노동당>과 <독일 노동자 총연맹>은 다시 고타에서 대회를 열고 합당을 시도한다. 소위 "고타 강령"이라고 불리우는 강령 아래, 두 노동자 정치조직은 약칭 SAP, 즉 <독일 사회민주주의노동당>으로 합당한다.


그러나, 맑스는 이 고타 강령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비판의 요지는 "라살레파와 아이제나흐파의 모순을 봉합한 것 뿐이다!"라는 것. 과연 이 당이 오래 갈 수 있을까?


2. 첫 번째 수정주의 압력


고타 강령에서 보듯, 라살레파와 아이제나흐파의 입장 차이를 봉합한 것에 그쳐버린 독일 SAP. 전혀 오래 갈 것 같지 않았던 SAP를 위기로부터 구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바로 "사회주의자탄압법"이 통과된 것.


1873년, 유럽은 거대한 불황을 겪고 있었다. 불황을 타개할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다. 소위 "제국주의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장엄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1871년 독일을 통일한 후, 제국주의 시대로의 변화에 맞춰 독일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궁리했다. 이런 비스마르크 보수주의 정권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SAP였다. 뻑하면 파업, 뻑하면 투쟁. 정말 골치 아픈 놈들이었다. 어떻게든 SAP를 탄압할 명분과 묘책이 있어야 했다.


때마침, 한 무정부주의자가 독일 황제를 저격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아주 좋은 명분이 생겼다. 이 사건 이후 정부는 소위 "사회주의자 탄압법"을 발의한다. 그러나 처음엔 법안의 반민주적 성격 때문에 통과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시 한번 황제 암살 미수사건이 벌어지고, 정부는 의회를 해산시켜버렸다. 결국 사회주의자 탄압법은 통과된다.


곧장 SAP는 "우리는 이 법을 전면적으로 무시할 것"을 선언하고 지하활동에 돌입한다. 주점, 클럽 따위의 주인이 SAP 당원이 되곤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또한, SAP는 비덴에서 당 대회를 열고 새로운 강령을 통과시킨다. 고타 강령에서 천명한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라는 문구에서 "합법적인"이라는 문구를 삭제한 것.


전국적으로 산개한 지하 당원들을 통합하는 역할을 맡은 것은 <조치알데모크라트>라는 당신문이었다. 레닌의 <이스크라>라는 신문은 바로 이 <조치알 데모크라트>를 모델로 삼은 것.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바로 "사회주의자탄압법"은 SAP의 "조직, 집회, 출판물"을 금지한 것이지, 당의 "원내 활동"까지 금지한 것은 아니라는 것. 선거 운동조차 못했지만, 일단 당선만 되면 원내 활동은 합법적인 것이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수정주의 논쟁이 촉발되는 것이다.


이념적 차원에서, "국가와의 협력을 중시하는" 라살레주의는 전면적으로 폐기되었다. 당의 이념은 한차원 급진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탄압법의 영향 아래에 의원들의 원내 활동이 보다 더 중시되었다. 즉 실천의 차원에서는 어떻게든 선거에 당선되는 것이 중요해졌다. 당의 이념과 실천이 서로 엇나가기 시작했다.


3. 증기선 보조금 논쟁이 알려주는 것.


당의 이념과 실천이 서로 엇나가는 모순이 처음으로 폭발한 사건은 바로 증기선 보조금 논쟁이었다. 1884년, 비스마르크 정권은 동아시아와 태평양을 운항하는 증기선 사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총체적으로, 제국주의 정책의 일환이었다.


SAP 의원단이 직면한 가장 곤혹스러운 문제는 여기서 터졌다.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따르자면, 이런 제국주의 정책은 반대해야 함이 옳았다. 그러나, 의원단이 속한 지역구 대부분은 함부르크 등, 조선산업이 활성화된 곳이었다. 베벨 등의 원칙주의자들은 법안에 반대했지만, 아우어 등을 중심으로 한 다수 의원들은 법안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증기선 보조금 법안은 조선산업을 활성화시켜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아우어 등의 의원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구 유권자들의 이해관계를 가장 중요한 판단 준거로 삼았다.


의원단 내에서 베벨, 폴마르, 베른슈타인 등 증기선 보조금 법안에 반대 입장을 표명한 의원들이 소수파로 모이자, 이들은 장외 투쟁을 선언한다. 전국 각지의 당원들은 속속들이 법안에 찬성하는 의원 다수파를 향해 반대 결의문을 제출했다. 그러자 의원단 다수파는 당원들을 향해 의원단의 통제를 벗어났다는 이유로, 당 규율을 어겼다며 역공을 감행한다. 그러자, 다시 각 지역의 당원들은 의원단 다수파를 향해 당내 민주주의를 침해하며 월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결의문을 채택하여 대응한다.


진부한 싸움이 끝나고, 4월에 들어서야 타협을 보았다. 그러나, 의석 분포상, 타협안을 관철시킬 수가 없었기에 결국 SAP 의원 전원이 반대표를 던지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이 증기선 보조금 논쟁이 알려주는 한 가지 사실은, 아우어파와 베벨파를 막론하고 선거에서 지지표를 획득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독일 SAP는 수정주의로 한발짝 더 다가간다.


4. 에르푸르트 강령으로부터


탄압법이 SAP에 남긴 상처는 만만치 않았다. 탄압법은 효력을 다해 사라졌지만, 탄압법으로 인해 독일 노동자들과 SAP 당원들은 적지 않은 트라우마를 겪어야 했다. 어느 새, 당원들 사이에서는 "조직을 지킨다"라는 것이 제 1 계명이 되었다.


조직을 지키고, 선거에서 표를 착실히 늘려 나가면, 언젠가는 혁명이 닥칠 것이라는 것이 독일 노동자들의 신념으로 남았다. 그러나 여기에 반대하는, 조직의 현실에 대해 개탄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소위 "청년파"라 불리우는 이들이다. 이들은 당이 마치 실천이 전부인 것처럼 치부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규모 옥외 집회를 두려워하는가 하면, 당원 자격도 불분명하고, 중앙당과 지구당을 이어줄 광역지부 건설도 미뤄지곤 했다. 1890년대, 제 2 인터내셔널에서 결정된 메이데이 시위를 파업 계획으로 발전시키자는 제안을 했다가 의원단과 충돌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부분 생디칼리즘 노선으로 경도되었고, 당에서 결국 쫓겨나 독자 정당을 창당했다가 사라진다.


SAP는 이듬해, 당명을 <독일 사회민주당>, 약칭 SPD로 바꾸고, 에르푸르트에서 새로운 강령을 채택한다.


에르푸르트 강령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전반부는 "혁명의 필연성"과 당의 궁극적 목표를 밝히는 전반부와 당의 실천 과제를 나타내는 후반부로 나뉜다. 전반부는 당의 이론가였던 카우츠키가, 후반부는 베른슈타인이 작성했다. 


자본주의가 붕괴하고, 혁명이 도래할 것이라 쓰여진 강령의 전반부는 SPD가 드디어 과학적 사회주의를 전면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당의 궁극 이념과, 당면 현실 투쟁 과제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히지 않았다는 것.


즉, 일상 투쟁 과제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 변혁"이라는 당의 궁극 목표에 대해 어떤 의의를 가지며, 어떤 전망을 가지는 것인지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당의 이념은 변혁을 지향하지만, 현실은 제도권 정치에 몸을 맡기고 있는 모습 - 혁명은 그저 하나의 신앙으로만 남고 실제로 관심이 있는 것은 개혁 투쟁이었다. 이론과 실천이 서로 어긋난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두 가지 편향이 나타났다. 하나는 이론 중심 편향, 또 하나는 실천적 기회주의. 전자를 주도한 것은 카우츠키였고, 후자를 주도한 것은 베른슈타인이었다. 독일 SPD는 바야흐로 수정주의 논쟁에 돌입한다.


5.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의 문제제기 - 수정주의 논쟁의 시작


이론 편향에서 카우츠키는, 당의 이념적 노선, 즉 사회주의 혁명과 자본주의 붕괴라는 마르크스 이론의 토대를 과학적으로 논증하는데에 치우쳤다. 카우츠키의 논증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당이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당의 궁극 이념과 어떤 관계를 가지며 전망을 지니는지는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 그리고 1912년 바젤에서 제 2 인터내셔널은 국제주의 입장을 결의안으로 채택한다. 즉, 세계대전이 벌어질 시에는 제국주의 강대국의 노동자들은 자국 정부의 전쟁을 반대하고, 지배 계급에 맞선 내전을 벌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벌어지자, 제 2 인터내셔널에 속한 정당들은 국제주의 결의안을 배반하고 전쟁에 찬성표를 던지고 만다. 카우츠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카우츠키는 어째서 이런 태도를 취하게 되었는가?


카우츠키는 당이 기존의 국제주의적 입장을 실천할 경우, 노동자들 사이에서 득세하던 애국주의를 배반하는 결과물이 되어버려, 결국에는 노동자 운동이 분열될 것이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당시 독일 사민당의 지지율은 매우 높았다. 집권 가능성이 매우 현실적인 것으로 다가와 있었다.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이론은 여기서 발효된다. 전쟁 때문에, SPD가 내놓을 선거 카드가 없다면, 다시 말해 전쟁 때문에 사회주의를 위한 혁명이라는 장기적 과제를 미결로 둬야 한다면, 전쟁이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위기를 나타낸다고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단계가 필요했다. 카우츠키는 자신의 주장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초제국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베른슈타인은 카우츠키의 반대편에서, 실천 편향으로 경도되었다. 베른슈타인의 관심사는 지금 당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당의 궁극 목표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베른슈타인은 당의 엇나간 이론과 실천을 합치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그의 해법은, 당의 실천에 따라 이론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즉 당의 실천 방향에 이론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개혁만이 우리의 전부다!" 이것이 베른슈타인의 요지였다.


이런 베른슈타인의 이론 수정 요구, 정확히는 에르푸르트 강령을 수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혜성과 같이 나타난 여자가 있으니 그녀가 바로 로자 룩셈부르크다.


6.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판

베른슈타인이 독일 사민당의 궁극 목표와 실천과제를, 실천편향으로써 일치시킨 것과는 달리 로자 룩셈부르크는 에르푸르트 강령의 모순을 정확히 짚어내었다. 그녀 말인 즉슨, "어떤 개혁 투쟁인가"가 중요하다는 것.

다시 말하면, 베른슈타인이 "개혁만이 우리의 전부다"라고 주장한 것과 달리, 로자 룩셈부르크는 "개혁 투쟁이야말로 일상시기에 사회민주당이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 주장한다. 당의 개혁 투쟁은, 당의 혁명적 대의에 있어 그 의의와 전망을 지닐 때에 유효한 것이라는 말이다.

베른슈타인이 말했듯, 개혁 투쟁이 당의 전부라면 이런 방식으로 긍정되는 개혁투쟁은 그 목표가 매우 낮게 책정될 수 밖에 없다. 당장 개혁 투쟁으로부터 성과를 얻어내야 하고, 그러자면 당은 의원 내에서 다수를 확보해야 하며, 그런 고로 자유주의자들과 연합이 필요했다.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하고자 한다면, 폴마르가 주장했던 최소 강령만이 당의 '현실적인' 목표가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당이 민주공화국 건설,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대의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여기에 대해 예리하게 반박한다.

그녀에 따르면, 개혁 투쟁에서 중요한 것은 당장 현실적인 성과들이 아니다. 투쟁의 과정에 있어 노동자 계급을 조직하고, 의식을 성장시키는 것이 개혁 투쟁의 진정한 임무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서도 찾을 수 있다.

노동자들은 때때로 승리하나, 그것은 단지 일시적일 뿐이다. 그들의 투쟁들의 진정한 성과는 직접적인 전과(戰果)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더욱더 확대되는 단결이다.

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런 뛰어난 이론적 비판은 독일 사민당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토대가 없었다. 베른슈타인이나, 카우츠키는 의원단이라는 무대가 있었지만 망명해온 여성 활동가에게는 기반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로자의 주장은 그저 당내 우파의 부상을 막아줄 평형추 정도로만 인식되는데에 그쳤다.

수정주의 논쟁을 통해 독일 사회민주당이 우경화의 길로 치달을 무렵, 새로운 충격이 다가왔다. 러시아 혁명이 벌어진 것이다.

7.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으로부터의 충격, 그리고 독일 사민당.

당을 침체에서 구한 것은 1905년 발발한 러시아 혁명이었다. 러시아 페체르부르크에서 짜르에게 청원하러 간 한 무리의 노동자들에게 군대가 발포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노동자들의 구호는 "위대하신 짜르이시여, 우리에게 빵 한 조각을 허락하여 주옵소서"였다.

지극히 평화적이고, 지극히 인간적인 요구에 짜르가 행한 비인간적 대응 - 군대의 발포는 곧장 전 러시아 지역의 노동자들을 총파업의 물결로 인도했다. 짜르의 전제 정치에 항거하는 러시아 노동자들의 총파업 물결은, 밀물과 썰물을 거듭했지만 놀랍게도 1년 넘게 지속되었다. 그 와중, 가장 낙후한 지역의 노동자- 농민들까지 혁명에 가세했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한 것이다.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에서는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당의 활로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가장 주목을 받았던 것은 정치 총파업 전술이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총파업은 경제 투쟁의 한 전술로서만 생각되어왔다. 총파업을 정치적 수단으로서 사용하는 것은, 정당을 불신하고 노동조합을 정치 투쟁의 중요한 수단으로 보는 생디칼리스트들의 주요 무기였다. 

당시 유럽의 분위기는 1891년 벨기에 총파업에서 시작하여 점차 사회주의당들이 정치총파업을 전술로서 진지하게 실험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러나 독일 내부 사정은 이런 사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탄압법의 기억 때문에, 노동자들은 결코 정부의 탄압을 불러일으킬 선제 공격은 시도하지 않았다. 전선은 교착상태였고, 노동조합은 관료화되어 성과를 얻기에 급급했다.

이런 독일에 훈풍을 불어넣은 것이 러시아 혁명이었다. 누구보다도,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당내 좌파들이 가장 먼저 정치 총파업을 전술로서 채택할 것을 주장했다.

당연히 노동조합 관료들은 극렬히 반대했다.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던 같은 시기, 독일에서는 광부 파업이 벌어졌고, 이 파업은 전국적 물결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노동조합 지도부는 이것을 조직 발전의 호기가 아니라 조직의 유지에 있어서 정치적, 재정적 압박을 준 것으로 해석했다. 5월, 쾰른 노동조합 대회에서는 지도부는 정치 총파업을 의제로 올리는 것조차 거부했다.

당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무엇보다 베른슈타인 등 수정주의 지도자들이 정치 총파업에 호의를 보였다. 그러나 이들이 생각하는 것은 의원단과 노동조합 관료들에 의해 적절히 통제되는 총파업을 그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정치 총파업이 자유주의자들을 압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사회민주당에 제휴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 전술로서 유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 등 당내 좌파가 그리고 있는 총파업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우선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이 러시아 혁명을 관찰한 결과물인 <대중파업론>을 통해 정치 총파업을 주장했다. 그녀에 따르면, 일단 총파업이 시작되면 더 이상 지도부에 의해 통제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국면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국면에서 가장 낙후한 노동자들이 투쟁의 전면에 나서는 한편 노동자 대중의 의식과 조직이 유례없이 확장되고 노동자들을 혁명적 주체로 단련시킬 수 있다. 당의 역할은 노동자 대중에게 새로운 무대를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

정치 총파업 전술은, 결국 예나 당대회에서 채택되었다. 그러나 수정주의 지도자들은 총파업 전술에 반대하던 노동조합 지도부의 불만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이들에게 총파업 선동을 하지 않겠다고 확약해버렸다.

마침 이 무렵, 1차 러시아 혁명의 패배로 인해 독일의 투쟁 물결도 퇴조기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사회민주당은 의석의 절반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당 지도부는,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급진화된 당의 분위기가 패배를 가져왔다는 어처구니 없는 진단을 내렸고, 당은 더욱 더 확실하게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8. 독일 사민당의 치욕적인 배신

노선 논쟁이 다시 불거진 것은 1910년 수상이 바뀌는 와중에, 프로이센의 3계급 선거제도를 개혁하자는 움직임이 일면서 다시 표면 위로 올라왔다. 시위와 파업이 잇달아 터졌고, 오랜만에 독일 사민당에도 전투적인 분위기가 물결쳤다.

로자 룩셈부르크를 선두로 하여, 당내 좌파는 이 투쟁을 고조시키려 했다. 좌파들은 \"민주공화국\"을 전면에 내세우고 대중파업으로 나아가야 한다 주장했다.

그러나 당 지도부는 달랐다. 당 지도부는, 2월에 있을 총선을 위해 대중행동은 이제 그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카우츠키는 여기에 피와 살을 보태는 이론을 들고 나왔다.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중파업론>을 격하하며, 대중파업은 저발전된 동유럽 사회에서나 유효한 것이라 주장했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서유럽에서는 \'소모전\'이 필요하다 주장한 것이다.

사회민주당은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주의자들과의 연정을 꾀했다. 결과는 대승이었다. 사민당은 425만표를 얻어, 27.7%의 득표율을 얻고 원내 제 1 당이 되었다.

허나 변수가 있었다. 사회민주당을 지지한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정당에 투표한 반면, 부르주아 정당을 지지한 유권자들은 사회민주당에 표를 주지 않았다. 31개의 의석을 더 얻으리라던 예상은 깨졌고, 11석만을 추가로 확보했다. 사회민주당은 원내 제 1당이 되고 나서도 다시 주변세력으로 밀려나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베벨이 죽고 제국주의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1912년, 각 사회주의 정당들은 바젤에서 열린 제 2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제국주의 전쟁이 벌어지면 총파업을 비롯한 반전 투쟁에 돌입할 것을 결의한다. 독일 사민당은,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거부한 정치총파업 전술을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런 당의 명운을 거는 투쟁을 이렇게 열의없이 수용할 수는 없었다. 

당내 분위기는, 어떻게든 바젤 결의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애국주의가 득세하던 독일 노동자들의 기류에 편승해, 독일 사민당 의원들은 전쟁을 위한 국방비 증액안에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증액된 국방비를 직접세로 걷는다는 것은 이들에게 좋은 명분이 되어주었다. 당 강령에 명시된 것을 실현할 기회라면서 말이다.

오로지 로자를 비롯한 당내 좌파만이 외롭게 투쟁했다. 결국 전쟁의 위기는 닥쳤고, 독일 사민당은 총파업을 소집하지 않았다.

1914년 8월 4일, 독일 사민당 의원들은 단 한명도 예외 없이 전쟁 예산을 승인했다.

씻을 수 없는 배신, 수백만 노동자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 배반을 독일 사민당은 주저 없이 한 것이다. 

9. 혹한의 땅, 얼어붙은 1905년의 러시아에서


우리가 흔히 \"볼셰비키\"로 알고 있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첫 당대회는 1898년에 열렸다. 짜르의 전제정치 체제는 어떠한 반대파도 용납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자는 물론이고, 심지어 가장 온건한 자유주의자들 역시도 비밀경찰에게 탄압받아야 했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철저히 비합법적 상태에서 활동할 수 밖에 없었다.


레닌은 독일의 <조치알 데모크라트>를 모델로 삼아, 전국적 조직을 통합하기 위해 <이스크라>를 창간할 것을 제안한다. 당시 레닌이 썼던 <무엇을 할 것인가?>는 이런 철저히 탄압적 상황에서 당 조직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 제안하는 글이었다. 당 신문으로써, <이스크라>는 어느정도 성과를 보였다. 마침내, 조직을 통합하는데 성공하고 마침내 1903년, 제 2 당대회를 열게 된다.


그런데, 뜻 밖의 분열이 발생한다. <이스크라> 편집 위원회의 레닌과 마르토프가 대립한 것이다. 레닌을 중심으로 \"볼셰비키(다수파)\"가,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멘셰비키(소수파)\"가 형성되었다.


2년 뒤, 1905년. 혁명은 폭풍처럼 다가왔다.


레닌과 마르토프는 심각하게 대립했다.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한 멘셰비키는, 당면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기 때문에 자유주의 세력과 연합해야 하고, 따라서 노동자 농민의 요구와 당 강령도 그에 맞춰 하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레닌을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는 당면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라 하더라도, 혁명 주체는 노동자 농민이기 때문에 강령을 하향할 수 없다고 맞섰다.


1905년 5월, 불길처럼 번진 혁명의 파도 속에서 불리긴 수상은 새로운 의회를 신설했다. 그러나, 이 의회는 짜르의 자문기구에 불과했다. 결코 대의기구로써 기능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멘셰비키는 자유주의 정당인 카데츠와 협력하며 이 의회에 참여한다는 입장이었고, 볼셰비키는 보이콧을 주장했다. 혁명이 파도치는 이 때에 보이콧 전술은 당연한 것이었다.


1914년 1월, 마침내 닥쳐온 전쟁의 위기와, 눈 앞에 다가온 사회주의 혁명의 전진 속에 멘셰비키는 자진해체한다. 이제 레닌은 \"사회민주주의자\"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대신,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라는 말을 썼다. 서로 섞일 듯, 섞이지 않았던 두 분파는 이제 완전히 따로 떨어진 셈이다.


10. 오늘날의 사민주의.


사민주의! 오늘날 수많은 좌파들이 사민주의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만큼 고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독일 SPD가 보였던 것처럼 계급을 배신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의회를 버릴 수도 없다. 오늘날의 사민주의 스탠스는 제도정치에 발 한쪽을 담그고, 눈길은 혁명을 향해 있다.


사민당의 배신으로 인해 한 때 노동자들은 사민당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그러나,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사민당의 지지율은 올랐다. 배신으로 몰락해가던 사민당을 복구한 것은 러시아에서 불어온 "무시무시한" 공산주의의 공포였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했으나 레닌이 죽었다. 스탈린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게 선거되었다. 스탈린은 소비에트를 파괴하는 등 패악적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하며 볼셰비키는 서서히 우경화했다. 제 3 인터내셔널, 노동자 계급 운동의 토대였던 일명 "코민테른"을 스탈린은 자신의 꼭두각시로 전락시켜버렸다. 트로츠키를 짓밟고 천명한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소련에 대한 공포감이, 오히려 사민당을 위기에서 구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못한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사민당으로 대거 들어갔다. 스탈린의 배반적 행위를 비판하며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이 트로츠키를 추모했다. 또다른 좌파들이 생겨났다. "배신자 스탈린!"


오늘날 사회주의자, 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던져진 질문은 한 가지다. "마르크스냐, 아니냐?"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로 돌아갔다. 그러나, 사민주의자들은 대답을 얼버무리고 있다. 마르크스를 본받지만,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 혁명을 이야기하지만, 그들은 겁쟁이다.


마르크스로 돌아온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과감히 스탈린을 버렸다. 한 때, 레닌조차 버릴 "뻔" 했다. 다시금,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레닌을 읽고, 마르크스를 읽고 있다. 사민주의자들은?


그들에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야기했던 배신의 기억도, 비그포르스 등을 위시한 승리의 기억도 있다. 사민주의자들은 매우 애매모호한 입장에 처해있다.


제 2 인터내셔널이 해체되고, 사민당들은 프랑크푸르트에 모였다. 그리고, 속칭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새롭게 조직한다. 이른 바 SI.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낭독한다. "우리도 사회주의자다!"


과연 그럴까? 오늘날의 사민주의자들은, 이런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혁명인가, 권력인가?


"동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 V.I. 레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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