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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의 주요구절들 모음입니다
게시물ID : phil_508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엘리트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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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79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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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시간 : 2013/03/04 20:20:19

여러 가지 편견이나 권위 · 필요 · 선례(先例), 그 밖의 우리들을 둘러싼 일체의 사회적 여건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본성을 압도하고, 그 자리에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자연과 싸우든가 사회와 싸우도록 강요받기 때문에 당신은 한 인간을 만들 것인가 시민(市民)을 만들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양자(兩者)를 동시에 만들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훌륭한 사회 제도란, 인간으로부터 아주 교묘하게 자연성을 빼앗아, 그 절대적 존재를 제거하고 대신 상대적 존재를 주어, ‘자아’를 공동체 속으로 옮길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무언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언제나 개체의 한 인간이기 위해서는, 말과 행동을 일치시켜야 한다.

 

상류 사회의 교육은 상반되는 두 가지 목적을 추구하다가 어느 쪽 목적에도 도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남들을 위해 살도록 교육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은 자신의 일 외에는 절대로 생각지 않는 이중(二重) 인격의 인간을 만드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자연과 인간에 의해 서로 상반되는 길로 이끌려 들어가, 그 서로 다른 힘에 강요되어, 우리는 어느 쪽 목표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어중간한 길을 걷게 된다.

 

우리들 가운데 인생의 좋은 일 나쁜 일에 가장 잘 견디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잘 교육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장 잘 산 사람이란, 가장 오랜 세월을 산 사람이 아니라 인생을 가장 잘 체험한 사람이다.

 

가정이 쓸쓸하고 고독한 곳에 지나지 않는다면, 다른 곳으로 즐거움을 찾으러 가는 것이 당연하다.

 

육체의 고통은 다른 고통에 비해 훨씬 덜 잔인하고 덜 고통스러우므로, 그 때문에 삶을 단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을 절망시키는 것은 정신적인 고통뿐이다. 우리의 가장 큰 고통은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육체는 약하면 약할수록 명령하며, 강하면 강할수록 복종한다.

 

처방을 해 주는 의사나 교훈을 주는 철학자, 설교를 하는 신부, 그런 사람들이 인간의 마음을 비굴하게 만들고, 죽음을 체념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만든다.

 

인간은, 한 곳에 모이면 모일수록 점점 더 타락한다.

인간은 모든 동물 가운데서 무리를 지어 생활하기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동물이다.

 

욕망이, 필요에 의해 생기지 않고 습관에 의해 생기게 된다. 자연의 욕구에 습관에 의한 새로운 욕구가 추가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모든 악은 약함으로부터 생겨난다.

강해지면 선량해진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

 

억양은 말에 솔직함을 준다. 교육을 제대로 받고 자란 사람들이 억양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든 똑같은 어조로 말하는 습관으로부터 상대방이 눈치채지 않도록 하면서 사람을 야유하는 습관이 생겨난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는 그 야만적인 교육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인간들이여, 동료 인간들을 깊은 사랑으로 대하라. 그것이 당신들의 첫째 의무이다.

 

우리를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밖으로 쫓아내고, 언제나 현재를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하며, 우리가 추적할수록 자꾸 도망쳐 버리는 미래를 쉴새 없이 추적하고, 우리를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가려는 저 허위에 가득 찬 지혜의 외침소리가!

 

가장 행복한 사람은 고통을 가장 적게 받는 사람이며, 가장 불행한 사람은 기쁨을 가장 적게 느끼는 사람이다.

 

고통의 감정에는 언제나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 뒤따르며, 기쁨의 관념에는 반드시 그것을 즐기려는 욕망이 뒤따른다. 모든 욕망은 결핍을 전제로 하며, 그 결핍에는 반드시 고통이 뒤따른다. 따라서 우리의 불행은 우리의 욕망과 능력의 불균형 사이에 존재한다.

 

진정한 행복은, 오직 능력을 넘는 욕망을 없애, 힘과 의지를 완전한 평형 상태에 두는 데 있다.

 

모든 것을 최선의 것으로 만드는 자연은, 처음에 인간을 이런 식으로 만들었다. 자연은 인간에게, 직접적으로는 자기 보존에 필요한 욕망과 그것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능력만을 주었다. 그 이외의 능력은 모두, 필요에 의해 발달하도록, 예비로 인간의 마음 속 깊숙이에 숨겨 두었던 것이다. 이 본원적(本源的)인 상태에서만, 힘과 욕망의 평형을 찾아낼 수 있고, 인간은 불행해지지 않는다. 잠재적인 능력이 활동을 시작하면, 모든 능력 중 가장 활동적인 상상력이 눈을 떠, 다른 능력을 앞지른다. 상상력이야말로,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우리 능력의 한계를 넓혀,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기대에 의해 욕망을 자극하고 크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엔 손이 닿는 곳에 있다고 생각되었던 것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도망쳐 버린다. 잡았다고 생각하면 이미 모습을 바꾸어 먼 저편에 나타난다. 이미 지나온 나라는 벌써 눈에 들어오지 않고, 우리는 그것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 이제부터 갈 나라는 계속해서 커지고 넓어져 간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지쳐 버리고, 결국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쾌락을 맛보면 맛볼수록 행복은 우리로부터 멀어져 간다.

 

체력이 욕망을 채우고도 남는 자는 곤충이나 벌레라 할지라도 강한 존재이다. 힘에 부치는 욕망을 가진 자는 코끼리나 사자, 또는 정복자나 영웅, 나아가 신이라 할지라도 약한 존재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을 때, 인간은 대단히 강하다. 그러나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려고 안간힘을 쓸 때, 약한 존재가 된다.

 

모든 동물은 자기 보존에 필요한 만큼만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만이 여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여분의 능력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다니, 실로 기묘한 일이 아닌가.

 

끊임없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명령하여, 우리가 결코 도달하지 못할 미래로 내닫게 하는 선견지명이야말로 모든 불행의 근원이다. 인간처럼 덧없는 존재가, 좀처럼 가지 못할 먼 미래만을 바라보며 눈앞에 존재하는 현실을 무시하다니,

 

인간을 본래의 자아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가는 것이 자연일까?

 

당신 자신의 삶을 살라.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는 사람이란, 무엇을 행할 때 자신의 힘에 타인의 힘을 보탤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모든 행복 중 첫째가는 행복은 권력이 아니라 자유라는 결론이 나온다.

 

어른은 많은 의지를 가지고 있고, 아이는 많은 환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어른이 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법률과 사회는 우리를 다시 아이 상태로 내던져 버린다. 부자도 위인도 제왕도 모두 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의존하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사물에의 의존으로, 이것은 자연에 기초를 두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인간에의 의존으로, 이것은 사회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인간에게 항상 따라다니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은 인간의 본질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 아닐까? 큰 행복을 알려면 작은 고통을 경험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몸이 너무 편하면 정신이 부패한다. 고통을 모르는 인간은, 인간애에서 오는 감동도 동정의 기쁨도 모른다.

 

얼마나 많은 불행한 사람이나 병자가, 물질적인 적선보다도 마음의 위안을 필요로 하고 있는가.

 

시간을 잘못 이용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서투른 교육은 전혀 교육하지 않는 것보다 아이를 지혜로부터 훨씬 더 멀어지게 한다.

 

사람들은 단순 명쾌한 것을 댓가로 하여, 작은 가치인 재미를 얻는다.

 

겉보기에 자유스러워 보이는 예속의 상태만큼 완전한 예속 상태는 없다.

 

아이의 육체와 정신의 결합은 모두 한 가지 원인, 즉, 어른들이 아이를 너무 일찍부터 어른으로 만들려 하는 욕망으로부터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감동은 감정으로부터 보다는 오히려 반성으로부터 생겨난다.

 

우리의 잘못은 모두 우리의 판단으로부터 생겨나므로, 아무것도 판단 할 필요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잘못을 범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자신의 판단에 대한 그들의 자만심이 지식의 증가보다 더 급속히 증가하므로, 그들이 배우는 하나의 진실은 백 가지의 잘못된 판단을 동반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알면 알수록 더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되기 때문에, 오류를 피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무지이다.

 

지식인에게는 모든 사람이 필요한데, 특히 자기를 칭찬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자유롭게 살며 인간적인 것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것, 그것이 죽음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인간애의 최초의 씨앗

 

인간을 사회적인 존재로 만든 것은 인간의 약함이다. 우리의 마음에 인간애를 느끼게 하는 것은 우리들 공통의 비참함이다. 인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인간애 같은 것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모든 애정은 부족함이 있다는 증거이다.

 

참으로 행복한 인간은 고독한 인간이다.

 

행복한 사람의 모습은, 다른 사람에게 애정보다는 부러움을 느끼게 한다.

자기 혼자의 행복을 획득했다는 것은 자기의 권리가 아닌 권리를 가로챘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비난하고 싶어진다. 이기심은, 그 사람이 우리를 전연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느끼게 하여, 더 한층 괴롭게 한다.

 

상상은 우리를 행복한 인간의 입장보다는 비참한 인간의 입장에 놓으려는 경향이 있다.

 

연민은 달콤하다. 괴로와하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 자신을 두고, 자신은 그 사람처럼 괴롭지 않다는 기쁨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선망의 감정은 괴롭다. 행복한 사람의 모습은, 부러워하는 사람을 그 사람의 위치에 놓기는커녕, 반대로 자신이 그런 입장에 놓여져 있지 않다는 한스러움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준칙

인간의 마음은 자신을 자기보다 행복한 사람의 입장에 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자기보다 불쌍한 사람의 입장에 자신을 놓고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두 번째 준칙

사람은 오직, 자신도 면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타인의 불행만을 동정한다.

 

세 번째 준칙

타인의 불행에 대하여 느끼는 동정은, 그 불행의 크고 작음에 비례하지 않고, 우리가 그 불행으로 괴로와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베푸는 감정에 비례한다.

 

우리가 불행한 사람을 동정하는 것은, 그 자신이 동정 받아야 할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이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괴롭히면서도, 그들은 우둔하니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한다.

 

사려깊은 사람에 있어서는, 사회적인 차별은 모두 무시되어 버린다.

 

부자의 괴로움은 그 신분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악용하는 부자 자신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 비해서조차 불행하다 해도 부자를 동정할 필요는 없다. 부자의 불행은 모두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이므로, 자신의 의지(意志) 하나로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민중은 거칠고 솔직함을 천진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귀족은 예절이라는 껍질 밑에 사악하고 부패한 정기(精氣)를 감추고 있다. 민중에게는 재기(才氣)가 없고, 귀족에게는 인정이 없다.

 

자신을 어떤 계급에도 두지 않으면서도 모든 계급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 좋다.

 

당신도 인간이다. 동료 인간을 경멸하지 말라!

 

우리는 외면적인 것으로 행복을 판단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우리는, 행복을 가장 있을 법하지 않은 곳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행복이 있을 수 없는 곳에서 그것을 구하고 있다. 쾌활한 기분은 행복이 없다는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쾌활한 사람은 타인을 속이고 자신의 기분도 숨기려 하는 불행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 일이 많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언제나 미소를 머금고 쾌활하며 명랑한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이 자기 집에서는 찡그린 얼굴로 소리치며, 잔소리를 많이 한다. 그리하여 하인들은, 주인이 친구들에게 베푸는 즐거움의 댓가를 치러야 한다. 진짜 만족은, 쾌활함도 아니고, 우울함도 아니다. 사람은 그 달콤한 감정을 소중히 하여, 그것을 맛보면서 잘 생각하고, 충분히 즐기면서도 그것이 도망쳐 버릴까 두려워한다. 참으로 행복한 인간은, 많이 지껄이지 않고, 잘 웃지 않는다. 그는 행복을, 말하자면, 자신의 가슴을 꽉 끌어안는다. 떠들썩한 즐거움과 날뛸 듯한 기쁨 뒤에는 엄청난 실망이 숨어 있다. 한편, 우울은 쾌락의 벗이다. 눈물과 연민은 더없이 유쾌한 즐거움에 동반되고, 큰 기쁨에는 환호성보다는 오히려 눈물이 따른다.

 

가장 유쾌한 마음의 습관은, 욕망과 혐오감에 사로잡히는 일이 적은, 절도 있는 즐거움 가운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불안정한 욕망은 호기심과 변덕스런 마음을 낳는다. 떠들썩한 쾌락의 허무함은 권태감을 낳는다. 좀 더 유쾌한 상태를 알지 못하면, 사람은 결코 자신의 상태에 싫증내는 일이 없다.

 

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마음의 여러 가지 감정들을 외적 암시에 의해 판단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 시기에 타락한 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에 있어서보다는 방종한 생활로부터 잘 보호된 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에 있어서 보다 강인한 정신력이 발견된다. 그리고 확실히 이것이야말로, 바른 풍습을 가진 국민이, 통상적으로, 그렇지 않은 국민보다 양식에 있어서나 용기에 있어서 뛰어난 이유의 하나이다.

 

사람의 마음은 자신의 규칙 외에는 규칙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묶어 두려하면 떨어져 가고, 자유롭게 놓아두면 자기의 것으로 묶어 둘 수 있다.

 

인간의 마음에 있어서, 확실히 구별되는 우정의 목소리만큼 무게 있는 것은 없다. 우정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도 잘못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친구가 우리를 속이려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때로 우리는 친구의 충고를 듣지 않는 일은 있어도, 결코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정의(正義)’와 ‘선(善)’은 단순히 추상적인 언어나 오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비추어진 정신이 참으로 느끼는 것이라는 것, 그것은 우리의 원시적인 감정의 바른 진보의 일단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양심과 상관없이 이성만으로는 어떠한 자연의 법칙도 확립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자연의 권리도 인간 마음의 자연적인 요구에 기초한 것이 아니면 모두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악인은, 바른 사람의 성실함과 자신의 부정(不正)으로부터 자신의 이익을 끌어낸다. 그는, 자신을 제외하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바른 사람이면 상당히 좋겠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독립된 존재 · 자유로운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은 완력보다는 오히려 중용(中庸)을 얻은 마음이다. 적은 수의 것에 밖에 욕망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적은 수의 사람에 밖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의 헛된 욕망을 언제나 육체적 욕구로 혼동하여, 그 육체적 욕구를 인간 사회의 기초로 삼는 사람들은, 언제나 결과를 원인으로 잘못 아는데, 그들은 자신의 추론에 의해 자신을 혼란시킬 뿐이다.

 

문명 사회의 상태에는, 권리상의 헛된 가공의 평등이 있다. 왜냐하면, 이 평등을 유지하기 위해 있는 수단 그 자체가 그것을 파괴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며, 약자를 억압하기 위해 강자에게 주어지는 국가 권력이 자연에 의해서 양자 사이에 놓여진 일종의 균형을 깨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대중은 소수자(少數者)를 위해 희생되고, 공공의 이익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희생될 것이다. 언제나 정의라든가 종속과 같은 그럴듯한 말이 폭력의 수단 · 부정의 무기로서 사용될 것이다. 따라서, 다른 계급 사람들에게 유익하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보다 높은 계급의 사람들은, 사실은, 다름 계급 사람들을 희생시켜 그들 자신의 복지를 추구한다. 정의와 이성이라는 명분하에 그런 사람들에게 바쳐지는 존경의 양도 그 점에서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명하게 되는 것은 악인뿐이다. 선량한 인간은, 잊혀지든가 웃음거리가 되거나 한다. 따라서 역사는 철학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인류를 중상(中傷)하게 된다.

 

이러한 모든 고찰에 덧붙여서, 역사는 인물보다 행동 쪽을 훨씬 더 많이 나타내 보인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역사는 인간을, 어떤 선택된 시점에 있어서 밖에, 또 그들이 겉치레 복장을 하고 있을 때밖에 포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몸치장을 한 공인(公人)을 보여 줄 뿐이며, 그 사람의 뒤를 좇아, 집 안으로, 서재 안으로, 가족들 사이로, 친구들 사이로 들어가는 일은 하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대표하고 있는 자로서 그 사람을 그리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가 그리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이다.

 

집단으로서의 사람들이나 국민의 정신은 개별적인 인간의 성격과는 현저히 다르므로, 인간의 마음을 집단으로도 검토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마음을 지극히 불완전하게밖에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 관하여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우선 개인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각 개인의 성향을 완전히 아는 자는 국민 전체 속에 결합된 그들의 경향의 효과는 모두 예지할 수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람의 특징은 그의 위대한 행위에 나타나지 않고, 기질은 그의 외모에 나타나지 않는다. 참 모습이 밝혀지는 것은 사소한 일에 의해서다.

 

위대한 인물도 자신의 가문이라든가 명예 따위가 문제가 되면 금방 소심한 인간이 된다.

 

정복자 모두가 살해된 것은 아니라거나 찬탈자 모두가 계획에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세속적인 편견을 가진 사람들의 눈에는, 그 중 몇몇은 행운을 잡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겉모습에 관계없이 인간의 행복을 그 마음의 상태에 의해 판단하는 사람은, 그들의 성공에서조차 그들의 비참함을 간파할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좀먹는 욕망과 심로(心勞)가 그들의 행운에 따라 커지고 넓어져 가는 것을 알 것이다.

 

자기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물이 되고 싶어 하는 자는 이윽고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인간이 미치지만 않았다면, 그에게서 허영심만을 빼놓고는 어떤 우매함도 고쳐 줄 수가 있다. 만약 허영심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경험뿐이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쓸모없는 것을 가르치면서도 행동의 기술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은 어떤 기묘한 성향(性向) 탓일까? 사람들은 우리를 사회에 잘 적응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방(獨房)에서 사색에 잠기면서, 혹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과 함께 공상적인 토론이라도 하면서 일생을 지내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교육 방법으로 우리를 교육한다.

 

시민 사회에 있어서 개별적인 이해(利害)의 작용과 반작용을 계산해야 한다.

 

사람은 선한 일을 하는 것에 의해서 선한 인간이 된다.

 

자기 자신에 만족하고 있는 것만큼 반성하는 습관을 한층 잘 보존시키는 것은 없다.

 

인간은, 아무것도 믿지 않기보다는 차라리 오류를 범하는 쪽을 좋아한다.

 

의견의 다양성을 낳은 첫 번째 원인은 인간의 지력의 무력이며, 오만이 그 두 번째 원인임

 

우리 가운데 누구 한 사람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없다고 고백하기보다 그때 그때 되는 대로 생각을 정하여,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기를 더 좋아한다.

 

전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우리는, 건방지게도, 이 전체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또, 그 전체에 대하여 우리 자신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결정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헛수고이다.

 

진실과 허위를 안다 해도, 자신이 발견한 허위를 버리고 타인이 발견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신은, 인간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유를 남용하여 나쁜 짓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인간이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같은 무력한 존재가 저지르는 악, 신의 눈으로 보면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혹은, 그것을 방해하면,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여 한층 큰 악을 초래하게 하여 인간의 본성을 더욱 미천한 것으로 만들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신은, 인간이 스스로 선을 선택하고 악을 배척하도록,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만든 것이다. 신은, 인간에게 여러 가지 능력을 부여하고, 그 능력을 바르게 사용하여 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신은 인간의 힘을 제한해 놓았으므로, 인간이 신으로부터 허락받은 자유를 아무리 남용해도, 인간은 전체 질서를 혼란시키지는 못한다. 인간이 행하는 악은 자신에게로 되돌아올 뿐, 그것이 세계의 조직을 변하게 하거나 인류가 존속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불의는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지 신이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사람이 바르지 않은 일을 기뻐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이익이 될 때뿐이다.

 

즐거움과 무위(無爲)를 위한 사회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업무적 관계 속에서는 즐거움이 아니라 이해(利害)가 우리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허영보다는 즐거움이 지배하는 사회

유행이 취향을 질식시키며, 우리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보다는 우리를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해 주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작품 속에서 발견되는 모든 아름다움은 모방된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의 참된 원형(原型)은 모두 자연 속에서 발견된다.

 

우리의 지도자들이란 예술가들, 부유한 자들, 그리고 신분이 높은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 자신은 이기심과 자존심에 의해 인도된다. 그들 중 어떤 자들은 자기의 부(富)를 과시하기 위해, 또 어떤 자들은 이익을 얻기 위해, 자기의 예술 · 돈 · 신분을 사용할 새로운 방법을 열심히 찾는다. 그리하여 사치는 지배력을 얻게 되고, 우리는 희귀하고 값비싼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자연에 대한 순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불복종에 있는 것이다. 사치와 나쁜 취향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돈을 낭비하는 것이 취향인 사회, 그런 사회는 나쁜 사회이다.

 

인간은 나쁜 취향이 최고의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곳에서도 사고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나쁜 취향을 가진 그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 되며, 또 그런 사람들과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 그들과 똑같이 생각하게 되기 쉽다. 우리는 판단의 기계 장치를 그들과 똑같이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만일 지금 내가 부자라면, 나는 부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짓은 무엇이든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나는 무례하고 저열한 인간일 것이며, 오직 나 자신에 대해서만 민감하고 다감(多感)할 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가혹하고 무자비한 인간일 것이며, 하류층의 사람들의 고통을 냉소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방관자일 것임에 틀림없다.

 

부유한 자들의 가장 큰 재앙은 권태이다.

 

사치와 훌륭한 외관으로부터 생겨나는 예절 · 유행 · 습관은 생활의 흐름을 가장 비참한 균일성 속으로 제한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고자 하는 즐거움은 공허한 즐거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들 자신에게 즐거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은 오직 형식뿐이다.

 

만일 당신이 아무런 고통 없이 즐거움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그 즐거움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즐거움을 자유롭게 누리게 하면 할수록, 당신 자신의 즐거움은 그만큼 순수해질 것이다.

 

독점은 즐거움을 파괴한다. 참된 즐거움은 대중과 함께 나누는 즐거움이다. 우리가 혼자서 즐거움을 독점하려 할 때 우리는 즐거움을 잃는다.

 

자연을 속박하고 억누르는 것은 모두 나쁜 취미에 속한다. 그것은 정신을 장식하는 것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몸을 장식하는 것에 있어서도 사실이다. 생명 · 건강 · 상식 · 안락함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불안함 속에는 우아함이 깃들 수 없으며, 무기력한 것은 결코 세련된 것이 아니며, 건강이 나쁜 상태 속에는 매력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만, 즐거움과 기쁨은 건강의 싱싱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평범함을 원하라.

 

여행은, 오직 그릇된 말을 들어도 미혹되지 않고 악덕의 실례(實例)를 보아도 현혹되지 않을 만큼 내적으로 강한 사람들에게만 유익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국토 전역에 걸쳐 보다 균등하게 인구가 분포되어 있는 나라 쪽이 그렇지 않은 나라보다 국력이 더 강하다.

 

국가를 피폐시키고 국가를 약하게 만드는 것은 대도시들이다. 대도시들이 만들어 내는 부(富)는 실속이 없는 부(富)로서, 거기에는 돈은 많고 효용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으로 평화를 찾아 갈 필요가 없는 나라는 얼마나 행복한 나라인가!

선량한 사람은 도시에서는 자기의 성향을 만족시키기가 어렵다. 도시에서는, 그는 자기의 열의를 쏟으려 해도 협잡군과 불한당 이외에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행운을 찾아 도시로 몰려드는 게으른 자들을 도시가 환영하는 것은 지방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시를 희생시켜 지방의 인구를 증가시켜야 하는 것이다. 화려한 사교계를 떠나는 사람은 모두 그 자체만으로도 유익한 일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화려한 사교계의 모든 악덕은 많은 사람들이 그 사교계에 모이기 때문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행복감에 압도당해 버린다. 인간은 행복감을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한 것이다.

 

만일 지상에 행복이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가정에서 그것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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