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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광주학살 개입연표입니다
게시물ID : sisa_3682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엘리트진보
추천 : 3
조회수 : 113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3/04 21:19:20

미국정부의 시각과 조치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싸이러스 밴스(Syrus Vance)가 1979년 2월 미 대사 글라이스턴에게 전문을 보낸다.
미국의 목표는 “점점 더 번영하고 있는 남한과의 경제적 관계를 통해 미국의 경제적 이익의 몫을 최대한” 얻어내는 것이다.

 

미국은 새로운 군부독재에 대한 반대세력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음을 알고 있었다
• 1980년 2월 미국은 전두환이 38선 후방에서 북한과 싸우기 위해 훈련을 받은 특전사단을 시위 진압을 위해 광주로 동원할 계획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 1980년 5월 8일 미 국방정보국이 합동참모국에 7공수 특전여단(광주에서의 최악의 만행에 책임이 있는)이 “전주와 광주의 대학들의 불안을 잠재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고 보고함.
• 1980년 5월 8일 글라이스턴이 특수부대가 “가능한 학생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옮겨졌다고 워싱턴에 보고함.
• 1980년 5월 9일 글라이스턴이 전두환과 만나서 미국은 남한이“만약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 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 경찰과 군대를 강화하는 긴급대책”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함.
• 1980년 5월 9일 미 국무부와 국방정보국의 전문: 미국은 전두환에게 군대를 학생시위에 동원할 수 있도록 하는 적절한 승인을 해주었다.
• 1980년 5월 10일 미 국무부 차관 크리스토퍼가 글라이스턴에게 보낸 전문: “우리는 경찰과 군대를 강화하려는 남한의 계획에 반대하지 않아야 한다.”

 

1980년 5월 15일, 십 만명 이상이 서울역 앞에서 시위함
글라이스턴은 시위대를 지켜보았고, 후에 시위대 중 일부가 미 대사관 담장을 넘으려 시도하자 이는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 1980년 5월 16일 미국은 제 20사단을 그들의 작전통제권에서 방출함. “워싱턴에 있는 그의 상관들과 의논한 후에” 위컴은 제 20사단이 광주로 배치될 수 있도록 승인함.
• 1980년 5월 19일 한미연합사령관 존 A 위컴 주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얼마나 빨리 힘을 규합하고 어떤 형태로 그것을 가져갈 것인가이다”
위기의 한국: 정치적 음모와 군의 위기에 대한 기억”

1980년 5월 21일 글라이스턴이 DC에 보낸 전문: “광주에서의 대규모 반란은 아직 통제밖에 있으며 걱정스러운 상황을 야기하고 있다”
“…대규모의 폭도가 일시적으로 도시를 장악하고 있으며...”

 

5월 22일 글라이스턴이 워싱턴에 보낸 전문: 광주는 “완전한 공포의 장으로 변하였다...폭도들이 헬리콥터를 향해 총을 쏘았다고 보고되고 있다.”
• 서울의 한 방송사는 5월 21일, 어젯밤 8시 광주의 시위대가 15만명으로 증가했으며 마침내 폭도가 되었다고 보고했다. 폭도들은 230대의 차량을 강탈하고 3500대의 소총과 45,400정의 총탄을 보유했다...
• ...광주는 완전한 공포의 장으로 변하였다. 사상자의 숫자는 전해지지 않았다. 공수부대들은 전남대 의과대학 옥상에서 자동소총을 발사하는 폭도들에 대항해 도시를 방어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폭도들이 헬리콥터를 향해 총을 쏘았다고 보고되고 있다...

백악관 회의
5월 22일 오후 4시, 백악관에서 국무장관 에드문드 무스키(Edmund Muskie), 국무차관 워런 크리스토퍼(Warren Christopher), 동아시아 태평양 차관보
리차드 홀브루크(Richard Holbrooke), 국가안보고문 즈비그뉴 블젠진스키(Zbigniew Brzezinski), CIA 국장 스탠스필드 터너(Stansfield Turner), 국방부장관 해롤드 브라운(Harold Brown), 전 서울 CIA 지부장 도날드 그렉(Donald Gregg)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회의가 열렸다.
“...가장 시급한 사항은 광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라는데 공통된 합의가 이뤄졌다...”

 

백악관 회의

1980년 5월 22일
• 그들은 제 20사단을 한미연합사령부에서 한국군 산하로 옮김으로써 광주민주항쟁의 진압을 승인했다. 그리고 동시에 6월에 존 무어 수출입은행장을 서울에 보내 미국식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위한 거대 규모의 남한과의 계약 체결과 서울 지하철을 확장하는 문제를 처리하도록 결정했다.
• 5월 23일, 백안관에서 모임이 있은지 불과 몇 시간 후, 글라이스턴은 남한의 국무총리 박충훈에게 요구해 회동을 갖고, “폭동 진압을 위한 확고한 수단이 필요하다“고 승인했다.

 

위컴은 “한국 정부로부터 나의 작전 지휘권 아래 있는 특정한국군을 시위대의 진압작전에 동원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요구를 받고 이를 수락, 동의하였다”
1980년 5월 22일 미국방부 대변인

 

5월 23일: 글라이스턴이 미국에 보낸 전문

2. 개요: 국무총리 대리 박 일로부터 처음 연락이 왔을 때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에 따른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 대한 개요를 분명하게 말했다. 나는 5월 17일의 사건에 대한 우리들의 유감은 폭동을 통제하기 위한 대책과 관련이 없음을 분명하게 했다. 하지만 수반하는 정치적 조치들은 기존의 문제들을 악화시켰고 광주의 위기를 야기시켰다. 질서의 회복에 기여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라는 것을 언급했다.
* 워싱턴에서 발표된 성명과 우리의 적극적인 응답으로 광주에서의 진압을 위해 한미 연합군 사령부 산하 부대를 잘라내 한국군이 통솔하게 한다.

5월 23일 이어서
• 5. 미국은 질서의 회복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있다...우리는 광주로의 투입을 위해 한미 연합군 사령부 산하 부대를 잘라내 한국군에 이양하는 것에 승인했다.

 

백악관 기자회견
5월 23일 워싱턴에서 미 국무부 대변인 호딩 카터(Hodding Carter)는 카터 정부는 “남한의 정치 자유화에 대한 압력을 연기하는 한편 안보와 질서의 회복을 지지하기로 결심했다.”고 발표했다. 카터 대통령은 더 노골적이었다: 그는 5월 31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때로는 안보의 중요성이 인권의 중요성보다 우위에 서야 한다고 말했다.

 

1980년 5월 24일미국은 한국에 미국군의 코랄함대가 도착할 때 까지 광주 진압을 연기해달라고 요구한다.
1980년 5월 25일 국무장관 무스키의 전문: 광주의 상황은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바뀌었다. 그의 정보통에 따르면 “온건파 수습위는 상황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고 과격파가 등장해 세력을 장악했다. 인민재판이 열렸고 약간의 처형이 이뤄졌다. 학생시위대는 혁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신원미상의 무장한 과격파들로 대부분 대체되었다.

1980년 5월 26일 글라이스틴이 워싱턴에 보낸 전문: “광주의 상황”은 “더욱 나쁜 쪽으로 과격한 전환을 했다. 과격파들로 이뤄진 무장그룹과 심지어 인민재판과 처형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1980년 5월 26일 시민군대변인윤상원은 글라이스틴에게 미국이 평화로운 해결을 중재해줄것을 요청한다. 글라이스틴은 대답을 거절한다.

5월 27일 윤상원은 군의 진압작전에 의해 도청에서 사망한다.

 

5월 27일 군의 광주 재점령

 

1980년 5월 22일 미국방부 대변인: 위컴 장군이 “그의 작전명령권 산하에 있는 특정 한국군을 시위대의 진압작전에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한국정부의 요구를 받고 이를 수락, 동의하였다”
1989년 6월 19일 미 국무부 보고서: 미국은 “특수전투부대가 광주로 이동한 것에 대해 어떠한 권한도 사전 정보도 없었다.”

 

미국의 광주학살 개입에 관한 연표

 

1979년 2월

미국의 국무부 장관 밴스가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에게 미국의 목표는 “점점 더 번창하고 있는 한국과의 경제적 관계로부터 미국이 얻는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979년 7월

니카라과 혁명 승리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암살

 

1979년 11월 4일

이란주재 미국대사가 학생들에게 피랍되다. 미국 외교관과 민간인 66명이 1981년 1월까지 붙잡혀 있었다. (1979년 1월 이란 혁명이 터져 국왕을 몰아냈다.)

 

1979년 11월 29일

글라이스틴 : “마늘과 고추를 먹고 사는 호전적인 이 사회가 그 본성에서 변화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충분한 신호가 있다. 수십 년 동안 정부 당국과 극단적으로 충돌해 온 반체제 인사들과 일부 야당은 현 정부가 제안한 개혁 시나리오를 거부하고 유신체제를 즉각 해체하라는 자신들의 극단적인 요구를 되풀이해 왔다.”

1979년 12월 7일

긴급조치 9호 해제되다. 69명 이상의 양심수가 석방되다.


1979년 12월 8일

미국의 국무부 차관 리차드 홀브루크가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누구도 또 하나의 이란을 원하지 않는다”면서 기독교인들에게 “장기적인 지지를 기대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하도록 했다. 11월 초에 홀브루크는 예상되는 양극분열이 “한줌의 극단적인 기독교 반체제 인사들”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이 권력을 장악하다 (12·12 쿠데타)

1979년 12월 25일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다

1980년 2월

미국은 전두환이 광주의 불만을 진압하려고 휴전선 이북에 투입할 공수특전단을 모집하여 훈련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1980년 4월 16일

미 국무장관 밴스 전송 : “많은 긍정적 발전에 대해 큰 만족을 느낀다”

1980년 5월 8일

미국의 국방정보국(DIA)이 합동참모본부(JCS)에 (광주에서 야만적 학살을 벌인) 제7공수여단이 “아마도 전주와 광주의 대학들에서 벌어지는 소요를 대상으로 하게 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1980년 5월 8일

글라이스틴이 워싱턴에 보낸 보고 : 공수부대가 “예상되는 학생시위를 처리하기 위해” 이동했다.


1980년 5월 9일

글라이스틴이 전두환을 만나다 : “만일 절대적인 필요 때문에 군대를 투입하여 경찰을 보강함으로써 법과 질서를 유지하려는 한국 정부의 계획이 있다면 미국은 반대하지 않는다.”


1980년 5월 9일

미 국무부와 국방정보국이 전송하다 : 미국은 학생 시위에 군대를 투입하려는 전두환에게 적절한 승인을 했다.

1980년 5월 10일

미 국무부 차관보 크리스토퍼가 글라이스틴에게 : “우리는 군대를 투입해서 경찰을 보강하려는 한국 정부의 계획을 반대하지 않아야 한다.”

1980년 5월 16일

주한미사령관 위컴은 제20사단이 광주에 파견될 수 있다고 승인했다. 그는 “워싱턴에 있는 자신의 상급자와 상의한” 후 제20사단을 미군이 통솔하는 작전통 제범위에서 해제했다.

1980년 5월 19일

주한미사령관 위컴이 워싱턴에 보고하다 : “유일한 문제는 권력을 굳히는 속도이며, 그것이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인가다.”


1980년 5월 21일

글라이스틴이 워싱턴에 보고하다 : “광주에서 일어난 대중 폭동은 여전히 통제할 수 없으며, 긴급 상황을 야기했다.” “거대한 군중이 일시적으로 도시의 운영권을 장악했다.”


1980년 5월 21일

미 국방정보국 관계자 : “광주에서 폭동 진압에 나선 한국군에 대해 작전통제를 해제한 미국의 결정이 반미 분위기를 엄청나게 확산시켰다.”

1980년 5월 22일

글라이스틴이 워싱턴에 보고하다 : 광주는 “완전히 공포의 현장으로 빠져들었다. 폭도들이 머리 위로 나는 헬리콥터를 향해 총을 쐈다고 보고받았다.”

1980년 5월 22일

미 국방부 대변인 : 위컴 사령관은 “자신의 작전통제 아래 있는 한국군 일부 부대를 군중들을 진압하는 작전에 투입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는 한국 정부의 요청을 수용하고 승인했다.”

1980년 5월 22일

백악관은 (군사정권 반대 소요의 전면화를 두려워하면서) 광주 진압을 승인했다.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은 광주에서의 질서 회복이라는 데 전체적인 동의가 있었다.” 제20사단이 서울의 연합사령부로부터 이동한 것을 승인했다. 미국 수출입은행 총재 존 무어의 6월 서울 방문을 승인했다. (1980년 12월, 미국의 원자력 기술을 사들이기 위한 6억 달러 신용차관을 승인했다.)

1980년 5월 23일

 글라이스틴이 한국군을 방문한 자리에서 “굳건한 반소요 조치”를 요청하다. 그는 “우리는 워싱턴에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광주에 투입할 공수특전단을 '나눠’ 달라는 요청에 확고한 응답을 하면서, 질서를 회복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1980년 5월 23일

미 국무부 대변인 호딩 카터의 발표 : 카터 정부는 “정치적 자유화를 요구하는 압력을 미루는 대신 한국의 안전과 질서 회복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1980년 5월 24일

미국은 한국 정부에게 미군 항공모함이 도착할 때까지 광주 진압을 연기하도록 요청했다.

1980년 5월 25일

미 국무장관 머스키의 전송 : “광주에서의 상황은 용납할 수 없는 쪽으로 전개되었다.” 그의 정보원에 따르면 “온건파 시민위원회가 통제력을 상실하고 급진파가 상황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인민재판이 열렸고 몇 건의 처형이 벌어졌다. 학생 시위대는 혁명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말하는 신원 미상의 무장한 급진세력들로 대부분 대체되었다.”


1980년 5월 26일

글라이스틴이 워싱턴에 보고하다 : “광주에서의 상황은” 더 나쁜 쪽으로 급격히 전개되었다. 민병대, 무장한 급진파의 복귀, 심지어 인민재판과 처형에 관한 보고들이 있다.

1980년 5월 26일

글라이스틴이 광주의 대변인으로부터 중재에 나서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1980년 5월 27일

군대가 광주를 다시 장악하다

1980년 6월 21일

미 국무부 차관보 워렌 크리스토퍼가 홀브루크 차관에게 보고 : 전두환은 “현명한 경제정책들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

1989년 6월 19일

미 국무부 백서 : 미국은 “공수특전단이 광주에 투입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

1995년 12월

광주민주화운동 특별법 제정

1996년 3월 11일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다 (1심 선고는 8월 26일, 대법 선고는 1997년 4월)

1996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광주 시민 가운데 82,5%, 나머지 한국인 가운데 50.8%가 미국이 개입되었다고 믿고 있다. 또한 광주 시민 가운데 44.5%가 미국의 사과를 원하고 있으며, 21.8%는 미국이 배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2년 5월 18일

지미 카터와 7명의 다른 미국 관리들이 광주 민중의 시민권을 침해함으로써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다고 민중법정은 판단했다.

2002년 10월 11일

지미 카터가 노벨평화상을 받다. 노벨위원회는 지미 카터가 수십 년 동안 “국제분쟁에서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전진시키기 위해,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증진하기 위해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을 했다고 추켜세웠다.

 

작성 : 조지 카치아피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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