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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신자유주의 유입과정입니다
게시물ID : sisa_36826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엘리트진보
추천 : 0
조회수 : 42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3/04 22:19:45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초 시작되었다.
1974년 어거스트 하이예크(August von Hayek), 1976년 밀턴 프리드만(Milton Friedman)이 노벨 경제학상을 받으면서 신자유주의적 통화 관리 경제 정책이 정당화되었다.
칠레는 “1975년 이후 완전한 신자유주의가 실행된” 하나의 견본이었다.
1979년 영국과 미국에서 “신자유주의의 극적인 강화”가 국가정책의 수준에서 일어났다.
데이빗 하베이(David Harvey),신자유주의의 역사. P 22, 74.

 

임마누엘 월러스테인 (Immanuel Wallerstein)
신자유주의 시작을 70년대 후반으로 산정: “지난 30년의 금융 투기는 실업과 빈부의 격차를 증가시켰다.” 그는 신자유주의를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의 반혁명으로 간주했다.

2008년 라디오 인터뷰에서

 

제임스 페트라스 (James Petras)
“신자유주의의 첫 장”을 1970년대 남미와 1980년 터키로 추정했다.
신자유주의의 첫장은 “군사쿠테타 직후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대규모의 부패와 위기, 사회불평등의 심화와 부정축제를 일삼는 정부의 출현이 동반되었다.
-더 큰 계급분열을 야기했다.
-거대한 민영화와 은행, 산업, 통신 및 다른 전략적 부문에서의 비국유화를 이끌었다.

 

신자유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 전 세계 358명 부자들이 소유한 자기자본이 1996년 기준 전 세계 45% 인구, 즉 23억명이 벌어들이는 소득과 일치했다.
• 전 세계 200명 부자들이 1998년까지 4년 동안에 1조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며 자기자본을 두 배 이상 불렸다.
UN 개발 프로그램, 인간개발 보고서 1996, 1999

 

신자유주의는 “자유시장”이라는 이름하에 국가의 경제가 대기업과 은행에 침투되는 것이다. 이것의 결과는...
• 공기업의 민영화
• 기업의 세금감면
•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
• 빈부 격차의 확대와 빈곤층 증가
• 다수의 비정규직 노동자(현재 남한의 50%이상의 직업이 비정규직이다)
• 외국자본의 유입

 

- 미국에서, 1980년에 정부가 제시한 최저임금은 공식적인 빈곤층 생활수준에 맞아떨어졌다. 1990년까지 최저임금은 빈곤층 생활수준의 30%이하로 떨어졌다.
- 1990년 이후 더욱 가파른 실제 임금 하락이 일어났다.

 

신자유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 케냐는 1990년대 IMF의 구조조정과 무역자유화 결과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작물인 옥수수의 수입국이 되었다.
• 아이티는 1975년에 자국민을 먹이는데 필요한 모든 쌀을 생산하고 있었다. IMF는 아이티에 2억 4천 6백만 달러를 빌려주었고 대신 외국에 시장을 열기위해 쌀과 다른 작물에 대한 수입관세를 낮출 것을 요구했다. 2년 이내에 농민들은 “마이애미 쌀”과 경쟁할 수 없었고 결국 생산을 중단했다. 오늘날 아이티의 빈곤층들은 “진흙 쿠키”를 먹는다.

 

미 상공회의소
• 1970년대 신좌파의 전성기 이후 닉슨대통령에 의해 대법원장으로 임명되기 직전이었던 루이스 포웰(Lewis Powell)은 미 상공회의소를 향해
기밀의 메모를 남겼다. “참으로 오랫동안 지연됐던 그 시기-지혜와 정교함, 그리고 재원을 갖춘 미국 경제가 이것을 파괴할 지 모르는 세력에 맞서 선도할때가 왔다.
• 미 상공회의소는 1972년 6만개의 조직에서 1982년 25만 개 이상으로 확장했다.

 

한국에서의 신자유주의
• 비록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신자유주의가 도입된 것은 1990년대 -특히 1997년 IMF위기와 함께-라고 생각하지만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의 첫 장은
1980년 광주항쟁과 함께 시작되었다.
• 미국은 신자유주의 경제 제도를 강요하기 위해 광주에서의 진압을 지원했다.

 

광주 공동체가 잔혹하게 진압된지 3일 후 글라이스틴은 이렇게 썼다.
...한편 외부의 침략에서 한국을 방어하기 위한 미국의 헌신은 기본적인 신념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안보관계에 대한 선취와 더불어 경제, 상업적 관계가 매우 중요해져 왔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1979년 한국은 미국 수출의 42억 달러, 수입의 41억 달러를 부담하는 13번째로 큰 무역상대였다. 한국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한 미국은행들의 경제적 리스크, 그리고 미국이 직접적으로 이 나라에 투자 소유한 금액은 3억 달러가 넘는다. 이러한 경향은 다가오는 미래에 지속적인 미국-한국의 동맹 관계를 형성해야하는 강한 근거이다.

 

광주와 신자유주의
5월 30일, 글라이스틴은 미국 상공회의소에서 발행하는 경제잡지 ‘내셔널 비지니스’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한다.
“경제적으로, 대한민국은 지난 이 십년 동안의 거의 광적인 성장으로부터 보다 절제되고 안정된, 현재의 경제발달단계에 걸맞는 시장 중심의 성장을 경험하고 있다...이 나라의 경제적 발달을 위한 그 다음 중요한 단계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넘어 시장의 힘을 신뢰하는 경제자유화를 원칙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인가된 조건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글라이스틴은 “중앙의 통제”로부터 “시장의 힘”으로의 변화의 필요성과 “경제 자유화”를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광주항쟁의 진압은 한국에 신자유주의적 체제 증식을 위한 피의 강요였음을 나타낸다.

 

6월 6일, 글라이스틴이 워싱턴에 전문을 보낸다
...미국의 경제인들은 한국의 장기적 안정성에 신중함을 보이지만 상대적으로 민주적 발달에 대해서는 덜 신경을 쓰고 있다. 만약 군부의 지도자가 명백하게 안정된 구조와 경제부흥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미국의 경제인들과 은행가들은 원래대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선호할 것이다. 선교사 집단은 이와 대조적으로 최근의 사태로 인해 격심하게 낙담해 있으며 수많은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가능한 학대를 걱정하고 있다. 그리고 종종 미국이 이러한 사태를 예방하지 않은 것에 대해 몹시 비평적이다. 그들은 순식간에 대사관과 관련한 소문으로 반미 정서를 일으킬 수 있다...미국의 교회 지지자가 경제인보다 숫자가 더 많고 더 큰 목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한의 교회와 관련한 미 거주자들의 미국 정부를 향한 불평의 목소리가 매우 크리라는 것을 예상해야 할 것이다.

 

미국은 전두환에게 경제적 투자를 위한 안정성을 제공할 것을 촉구했고, 전두환의 “정화” 프로그램은 재빨리 수행되었다. 투자자들의 공포를 경감시키기
위해 전두환은 6월 13일 쓰리엠의 대표와 뱅크오브 아메리카, 다우 케미컬, 골프 오일의 대표자들을 포함한 미 상공회의소 한국 대표들과 만찬을 했다.

전두환의 미국 지지의 열쇠는 고급관료에 대한 그의 신뢰였다. 이는 밀튼 프리드만과 “시카고 학파”에 대한 피노체트의 승인, 그리고 터키의 새로운 군사독재자와 같았다. 전두환은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 우호적인,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이행하는 이들을 장려했다.

 

• 부채는 신자유주의가 국가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주요방법이다.
• 1980년부터 2002년까지 개발도상국의 빚은 5800억 달러에서 2.4조 달러로 늘어났다.

 

남한의 외채
년도 외채(10억달러)
1975   8.46
1976   10.53
1977   12.65
1978   14.87
1979   20.29
1980   27.17
1981   32 43
1982   37.08
1983   40.38
1984   43.05
1985   46.76
1986   44.51
1987   35.57

출처: 한국은행 경제계획부서

 

• 신자유주의는 동시에 인플레이션과 불경기(스태그플래이션)이 번갈아 발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1980년대 남한의 경제상황 이었다.
• 동시에, 신자유주의는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 민주주의적 개혁을 뒤집는 하나의 방법(케인즈이론/미국의 뉴딜정책)이다.

 

“신자유주의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을 금융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 신자유주의의 역사 p33

 

"뉴욕의 투자은행들은 언제나 국제적으로 민첩하게 움직여왔으며 1973년 이후 보다 적극적이 되었지만, 지금은 외국 정부에 자본을 빌려주는 것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사업은 국제적인 신용과 자본시장의 자유화를 필요로 하며 미국 정부는 1970년대에 이러한 전략을 적극적으로 촉진하고 지지하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 신자유주의의 역사 p28

 

7월 11일 국무장관 보좌관 크리스토퍼는 미국의 은행가들이 한국의 정치적 역학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다는 내용의 전문을 서울에 보냈다.

• 미국의 은행가들은 한국이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것을 경고했다.
• 우리는 뉴욕의 가장 큰 은행 중 하나로부터 이번 주 한국은행 총재의 방문 동안에 신총재가 솔직한 메시지를 전달받았다는 정보를 받았다. 신총재는 미국 은행가들로부터 만약 한국이 재빨리 정치적 영향력을 수습하지 못한다면 올해 이후 필요한 재정을 지원받는데 몹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더욱이 김대중을 처리하는 것이 한국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당국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외부 자금조달의 필요라는 한국이 당면한 위험한 노정을 볼 때 신총재는 그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뉴욕에 있는 동안에 그는 새로운 통상부 장관이 될 것이라는 언질을 전달받았다.
• 9일 이후 언론은 431명의 은행원들이 해고되었다고 보도했다.

 

8월 2일, 미국의 가장 큰 은행들(뱅크 오브 아메리카, 체이스 맨하탄 신용은행, 화학은행, 하노버 시티은행)은 중단기 대출을 망설였다. 한국 전기공사는 원자력 발전소 7,8호를 위한 상업적 대출을 받을 수가 없었다. 전두환은 그의 반대세력을 향해 더욱 엄격한 조치를 취했다. 이들 은행들이 애매한 입장을 취했던 날, 국무부는 다음과 같은 기밀 전보를 받았다. “한국 국가정보원을 정화하기 위해서 주요 정치적 인물들을 체포하고 자신의 직무 이외의 분야에 관심을 쏟아온 5천명 이상의 고참급과 중간급 군간부 들이 해고되었다.” 6만 7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혹독한 “정화캠프”에 보내졌다.

 

• 9월 2일, 글라이스틴은 만족해하며 이렇게 썼다. “새로운 구성은 국제적인 사업관계에서 이익을 재보증할 것이다.”
• 9월 22일, 뉴욕타임즈는 데이비드 록펠러(David Rockefeller)가 미소를 띤 전두환과 악수를 하는 사진을 실었다.
• 3일 후, 한국 정부는 외국 자본의 남한 내 100% 회사소유, 해외자본의 100% 철수, 외국인의 땅 소유권을 포함한 외국 투자를 완화하는 새로운 정책들을 발표했다.
• 웨스팅 하우스의 회장 로버트 커비(Robert Kirby)는 서울을 방문한 후 이렇게 말했다. “최근의 한국의 성장과 웨스팅 하우스의 전망은 흡족한 상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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